유다는 어제저녁 늦게까지 쓴 서신을 다시 읽어보고 있었다.
<예수 선생님, 저 가롯 유다입니다.
지금 제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합니다.
당신께서 기어이 선지자들이 예언한 형극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씩 가까이 가는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당신을 귀신 쫓아내는 능력 있는 분으로 알고 따랐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앉은뱅이, 절름발이, 장님, 나병 환자, 하혈하는 여인을 고쳐 주셨지요.
저는 그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남몰래 흘렸습니다.
그 후에 당신의 명성이 갈릴리 전역에 퍼지면서 사람들은 더 큰 기대를 하였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사람이 점점 늘었고 어느 집회에서는 남자 어른만 5천 명이 넘었었지요.
이제 그들은 당신의 위상을 유대민족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격상시켰습니다.
다윗 왕국이 무너진 후 바빌론 포로 생활을 견디고 그 후 페르시아, 앗수르, 그리스, 지금의 로마 통치까지 무려 800년간 기다렸던 민족의 메시아 말입니다.
물론 그동안 몇 사람이 메시아라고 하며 나타났지만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요.
당신께서는 처음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민중의 기대와 희망이 당신 한 몸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생의 말씀은 하늘에서 오는 듯한 권위가 있었고, 이 땅에서 폭군을 몰아내고 다윗 왕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정의의 메시아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이런 기대가 한참 무르익던 어느 날 저희 제자들은 너무나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당신께서 곧 당신을 보내신 이에게 가시고 대신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하셨지요.
이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저희는 근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잘 모르는 말이나 듣기 싫은 말은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이렇게 시간이 또 지나 이제 다시 유월절을 맞은 우리는 내일부터 예루살렘에 입성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선생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메시아’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당신에 대해서요….
얼마 전부터 어떤 제자들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왜 선생님은 요새 잘 웃지 않으시고 전처럼 즐거워하지 않으실까?
어떤 때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근심에 쌓여 있는 듯 보이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당신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엄청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계획을 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의 봄기운이 유대 땅 전체로 퍼질 때 선생은 하늘로 올라갈 생각이겠지요.
선지자들의 예언을 하나하나 그대로 따라하면서 말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이루는 일과 구원과 영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들인가요?
하지만 저 가롯 유다는 알고 있습니다.
정의와 구원은 결코 서로 화해할 수 없습니다.
정의는 영화롭지만 배타적이지요.
정의 속에서 구원은 찾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은혜롭지만 무기력하지요.
구원 속에서 정의는 의미가 없으니까요.
결국, 선생은 이 땅에서 새로운 왕국을 애타게 기다리는 민중의 희망을 저버릴 것입니다.
벌써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다’라는 말씀으로 눈치를 챈 사람도 꽤 있습니다.
또 선생은 계속 몰려드는,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도 이제는 구원하지 않을 겁니다.
‘악한 세상은 이적만을 바란다.’라고 그들의 속을 들여다보셨지요.
이제 선생의 남은 길, 선생이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길은 옛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루는 길뿐입니다.
저는 선생이 스가랴 예언자의 말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려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이제 자신의 입으로 ‘인자는 자기에게 기록된 대로 가나니’ 하며 속내를 완전히 보였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늘 하던 말씀대로 들을 귀가 있는 자, 저 유다만 그 뜻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베드로나 요한도 아직 선생이 가는 길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혹시 저 말고 또 한 사람 어렴풋이 짐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막달라 마리아겠지요.
그녀의 선생에 대한 개인적 생각은 제가 언급하고 싶지 않으나, 그녀의 얼굴이 무척 어두워지고 슬픔에 차 있는 것으로 봐서 무언가를 느낀 것 같습니다.
저는 선생의 뜻을 파악한 후 메시아의 기록을 찾아 읽어보고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윗 왕이 읊은 시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삐죽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더 읽기 힘든 글은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기어이 이런 치욕을 당해야만 하는 겁니까.
당신께서 요즘 저희를 친구라고 부르시니까 또 눈에 띄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신뢰하며 내 빵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글을 읽으니 선생이 주는 빵을 먹고 누군가 선생을 버려야 하더군요.
더욱 놀라운 것은 선생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면, 선생을 배신한 사람은 은 삼십 냥을 받게 되고 이후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누가 그 일을 할지는 모르지만, 당신께서 빵을 주면서 은밀히 알려 주시겠지요.
저는 선지자들의 예언이 선생을 통해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음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겠습니다.
이제 제가 이렇게 서신을 쓰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예언대로 이루신 후 하나님께 가시면, 얼마 전 말씀하신 대로 하루속히 보혜사를 보내 주시어 선생께서 이 세상에 계신 것과 똑같이 우리가 느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즉 당신께서 부활했다고 사람들이 믿을 수 있을 정도라면 어떨까요?
또 한 가지 염치없는 말씀은 선생을 곧 배반하는 사람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그도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에 따르는 것이니까요.
저는 당신께서 모든 예언을 이루시면 환하게 형체가 바뀌실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몇몇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신 그 모습으로 가시겠지요.
이제 내일부터 하루하루 이를 악물고 슬픔과 고통을 참아 내겠습니다.
선생을 이 땅에서 뵐 날이 아무래도 오래 남은 듯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저를 믿으시고 공동체 살림을 맡겨 주셨는데, 오래 하다 보니 이런저런 소리도 들리는 성싶습니다.
송구할 뿐입니다.
이 서신을 다 쓰고 다시 읽어보니, 선생님께 과연 이 글을 보내야 할지 망설여지네요.
어차피 다 알고 계실 테니까요.
기도해보겠습니다.>
- 가롯 유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