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가 방문 사이로, 누보와 유리가 심각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카잔과 둘이 있자니 좀 어색했다.
“아무래도 애들 이야기가 좀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사하려고 먹을 것도 다 치워서 드릴 것이 없네요.”
“괜찮습니다. 아침을 많이 먹고 왔어요.”
카잔이 점잖게 대꾸했다.
“지난번 우리 유리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미행당했을 때도 도와주셨다는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 천만에요. 그냥 빵집에 들어갔다가 고깃집 뒷문으로 빠져나왔지요.”
“네, 그래서 그때 카잔 님이 유리 삼촌이 되셨었지요. 호호.”
“네. 하하. 영광입니다.”
“지금 누보가 유리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혹시 아시나요?”
“음, 실은 누보가 유리에게 그전부터 마음이 있었는데 아마 지금 그걸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아, 네…. 우리 유리가 지금은 좀 마음이 안정이 안 돼서....”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카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 유리가 제 별자리를 봐줬는데 앞으로 어려운 일이 좀 있지만, 그 고비만 넘기면 상당히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네, 유리가 나름대로 기본적인 공부는 했으니까 틀림없을 거예요.
카잔 님은 인상도 좋으셔서 앞으로 일들이 잘 풀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레나 님은 실례지만 유대교를 믿으시나요?”
“저는 힌두교를 믿는데 혹시 들어 보셨나요?”
“그럼요. 인도분들은 힌두교와 불교를 주로 믿으시잖아요.”
“잘 아시네요. 저는 지금도 ‘우파니샤드’를 가끔 읽어요.”
“‘우파니샤드’가 어떤 책인가요?”
“힌두교 경전인데 ‘선생님의 무릎 아래 앉아서’라는 뜻이에요.”
“아, 그렇군요. 어릴 때 사마리아에서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라는 가사가 나오는 노래를 부른 기억이 나요.”
“네, 무릎이 상당히 중요하네요.
이사 끝나고 카잔 님께 식사 대접 해드리면서 그 노래 한번 들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노래 연습 좀 해야겠네요. 하하.”
두 사람이 즐겁게 웃고 있는데 유리와 누보가 방에서 나왔다.
“어머, 이렇게 두 분이 재미있게 말씀하고 있는 줄 알았으면 좀 더 늦게 나올 걸 그랬어요.”
유리가 카잔에게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응, 레나 님이 이사 끝나고 맛있는 거 많이 사 주신다네.”
“이사 며칠 연기할 거니까 오늘 점심에 나가 먹죠, 뭐.”
누보의 말이 계속되었다.
“오반을 추적하는 방법을 유리 씨가 알려주었어요.”
카잔의 콧수염이 흔들렸다.
“앞으로 삼사일 그 방법을 한번 해 보고 안 되면 이사해도 시간은 있으니까요.”
“무슨 방법인데?”
카잔이 즉시 물었다.
“지금 우리 집에 들어앉아 있는 놈들을 오반이 고용했는데 그중 한 놈이 오반의 친척이래요.
그래서 그 사람을 찾아서 오반의 행방을 물어보면 알 가능성이 커요.”
“‘시카리’ 중에 오반 친척을 찾는다는 말인데 위험부담이 너무 높아.”
카잔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는 그렇게 하고 싶어요.”
누보의 목소리는 결의에 차 있었고 그런 누보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은전을 찾기 위한 것만은 아니에요.”
누보가 이렇게 말을 하고 마나헴의 책상으로 가서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서랍 안쪽에서 무언가를 찾아왔다.
“이제 진짜로 열성당의 누보가 되고 싶어요.”
그가 마나헴에게 빼앗긴 열성당 단원 패를 손에 들고 계속 말했다.
“유리 씨가 저에게 크나큰 깨달음을 주었어요.
그동안 저는 하루하루 맛있는 거 먹고 다리 뻣고 자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더 큰 목표를 가지고 살기로 했어요.
마나헴 같은 사람을 피해서 도망치며 사는 삶보다 그런 사람과 맞서서 싸우며 살고 싶어요.
그러려면 물론 은전도 필요하지만, 제 생각을 바꾸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 주위에 저를 도와주실 분도 있어요.
열성당의 헤스론 형님이나 사라 님 같은 분도 계시는데 왜 이런 생각을 그동안 전혀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
나발만 유대 민족의 장군이 되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카잔 형님도 도와주세요.”
짦은 침묵이 흐르고 카잔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구먼… 어디 그 단원 패 좀 볼까?”
누보가 건네준 흑단으로 만든 단원 패에는 ‘열성당 비밀사업부 누보’라고 적혀 있었다.
“음, 무슨 말인지 잘 알겠네.
물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다 도와줘야지.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런 생각을 자네 어머니가 찬성하실까?”
“네, 어머니는 걱정하실 거예요.
이제 어머니한테 정식으로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아야지요.
어머니는 제가 나쁜 애들하고 어울려 다니며 좀도둑질이나 하지 않나 생각하시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거니까요.”
카잔이 고개를 돌려 유리에게 물었다.
“그럼 이사는 언제 갈 건가?”
“마나헴이 아무리 빨라도 1주일 안에는 안 올 테니까 그때까지 연기하려고 해요.
그 안에 오반의 거처를 알 수 있으면 은전을 찾아서 가야지요.”
“음, 시카리들에게 어떻게 접근을 하는 게 좋을까?
지난번처럼 무작정 쳐들어가는 건 이제 안될 텐데….
그때는 운 좋게 한 놈만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그 생각도 해 놓았어요. 앞집에 있는 아칸의 협조를 받아야지요.”
유리가 여유 있게 말했다.
“그 사람이 협조를 할까?”
“네, 그렇게 만들어야지요. 지난번 카잔 님이 그 부인에게 은전을 준 일도 있고요.
자, 이제 나가서 맛있는 점심 먹으며 또 상의하지요.
어머니가 카잔 님께 단단히 사신다고 했으니까요. 호호.”
“네, 그러지요.”
누보가 씩씩하게 앞장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