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호텔을 나와 10시 반쯤 루브리아 일행이 재판소 앞에 도착하니 농부 수십 명이 밖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야렛을 석방하라! 야렛은 무죄다!”
지금 재판받고 있는 사람에 대한 시위였다.
방청석도 거의 꽉 차서 사람들을 헤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뜻 둘러보니 아직 바라바는 온 것 같지 않았고 오늘따라 경비가 삼엄하게 느껴졌다.
피고석에 앉은 사람은 재판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가야바가 부심이 건네준 두루마리 선고문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피고 야렛은 요단강 동쪽 주변에서 포도나무를 소작하던 자로서 소득세를 2년간 납부하지 않았다.
비록 몇 년간 가뭄이 들었다 하나, 포도나무는 물이 별로 필요 없는 작물로서 가뭄은 핑계에 불과하다 하겠다.
특히 피고는 이렇게 어려운 때는 성전세를 내려야 하고, 심지어는 십일조도 가난한 사람들은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죄질이 고약함에도 전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본 법정은 피고에게 징역 2년에 추징금 150데나리온을 선고한다.>
갑자기 피고가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감옥에 포도가 없다.”
법원 경비가 그를 양쪽에서 붙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청객들이 웅성거리며 선고 형량이 너무 심하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루브리아가 뒤를 슬쩍 돌아보니 바라바가 변장한 보습으로 방청석 뒤에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캐시미어 목도리를 조금 올렸다.
그도 뒤에서 목도리를 보았을 것이다.
로마 군인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가야바가 다시 나오고 탈레스 선생이 검사석에 앉았다.
루고가 나와서 가낫세 변호사 옆에 앉는데 시꺼먼 수염이 하루 새에 더 많이 자란 것 같았다.
가야바 재판장이 재판 시작을 알리며 어제처럼 사라가 참석했는지 확인했다.
사라가 손을 들고 일어난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라를 보는 루고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선고하겠습니다.”
가야바의 손에 두루마리 선고문이 들려 있고, 그의 예리한 눈이 좌우를 돌아보았다.
루브리아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꼴깍 들렸다.
“이 재판의 최종 판단은 어제 원고 측에서 제출한 아단의 편지가, 그의 자필인지 아닌지에 대한 유권 해석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습니다.
즉 필적 감정사 자격증이 있는 탈레스 검사와 피살된 아단의 형인 무단의 의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재판부는, 나름대로 고심의 하루를 보냈습니다.
필적의 진위를 가릴 때는 필적감정사의 감정이 항상 우선한다는 원고 측 주장은, 로마법에는 있으나 아직 유대 법에는 성문화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필적감정사가 전문가라 하더라도, 평생을 같이 살면서 늘 동생의 글씨체를 보아 왔던 무단의 판단에 무게를 두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하세요. 아직 판결문이 끝나지 않았어요.”
가야바가 고압적인 태도로 방청석을 향해 한마디 했다.
“또한, 피고인 루고가 오랜 기간의 수감생활로 심신이 불안하고, 눈이 잘 안 보이는 등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할 우려가 있으므로, 선고 유예 석 달과 함께 형 집행 정지를 선언합니다."
방청석 뒤에서 누가 굵직한 목소리로 “이 재판 엉터리다”라고 외쳤다.
가야바가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고 말했다.
“한 번 더 그런 소리를 하면 법정 모욕죄로 즉각 구속합니다.”
가야바가 다시 시선을 선고문에 두고 계속 읽어 나갔다.
“다만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하지 않은 만큼, 원고 사라의 고발도 무고죄 성립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라의 입에서 ‘휴’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만약 원고가 피고의 선고 유예 기간인 3달 이내에 새로운 증인이나 증거를 제출하면, 이 재판은 재개됩니다. 이상.”
가야바의 선고가 끝나자 즉시 루고의 몸을 감았던 포승줄이 풀렸다.
루고가 어깨를 크게 돌리니 우드득 소리가 났다.
“선고 유예 기간이 그냥 끝나면 피고인 루고는 무죄가 되는 겁니까?”
재판석에서 일어나는 가야바에게 탈레스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옆에 있던 부심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면 무고죄도 그때 다시 성립되는 겁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불구속 재판 동의서를 제출하겠습니다.”
탈레스의 다급한 말에 가야바가 말했다.
“선고 전에 제출했어야지요. 이미 늦었소이다.”
“이건 순 엉터리 재판이다. 가야바는 물러가라.” 방청석에서 또 누가 큰소리로 외쳤다.
“저놈을 당장 법정 구속하시오.”
가야바의 노기 띤 음성에 재판소 경비병들이 움직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시에 수십 명이 같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엉터리 재판이다. 가야바는 물러가라” 경비병들이 당황하며 누구에게 가야 할지 우왕좌왕하는데, 어떤 사람이 재판정 위로 급히 올라와서 가야바에게 귓속말을 했다.
가야바가 얼른 뒷문으로 퇴장했다.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을 주시했다.
몸집이 건장하고 퉁퉁한 얼굴의 그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진정하시고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는 예루살렘 성전 경호대장 마나헴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지금 이곳에 열성당의 바라바가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지금 이곳의 옆문은 잠겨 있고 정문만 열어 놓았습니다.
먼저 오른쪽 뒷좌석부터 한 사람씩 그 자리에서 일어나 정문으로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정문 출구에는 칼을 뽑아 든 성전 경호 대원들이 어느새 포진하고 있었다.
사라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바라바 오빠가 여기 와 있나요?”
루브리아는 긴장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