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씨, 나 때문에 걱정 많이 했다고 누보에게 들었습니다.
나는 며칠 동안 악랄한 로마 군인들에게 협박과 회유를 당했지만, 잘 버티었어요.
마침 도와주는 손길이 있어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당분간 거처를 옮기고 더욱 조심하려 합니다.
우리 조직이 지금 흔들리고 있지만, 때가 되면 내가 나서서 다시 정비하고 큰일을 할 겁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고마웠고, 유리 씨도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기 바래요.
어머니에게도 안부 전해 주세요.
나발 씀>
추신) 누보가 착해서 유리씨 걱정을 많이 하네요.
유리는 나발의 서신을 두 번 계속 눈으로 읽었다.
눈에 눈물이 서서히 고였다.
레나가 유리의 손에 들려 있는 서신을 뺏듯이 집어 읽었다.
‘추신’은 누보가 부탁해서 나발이 첨부한 글이다.
“나발 님은 그럼 이제 연락이 안 되나요?”
유리가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네. 자기가 필요하면 나에게 연락하겠다고 했어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눈물이 배인 유리의 눈에 나발의 준수한 얼굴이 비쳤다.
오늘 이사도 하지 말고 그냥 마나헴과 살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어머니가 손으로 유리의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발 님 건강은 괜찮아 보이던가요?”
‘그 싸가지 없는 놈, 건강은 너무 좋습니다’라는 말을 하려다가 꾹 참고, “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라고 말하는 누보의 속이 다시 뒤집혔다.
아무 말 없이 마나헴의 책상을 뒤지던 카잔이 누보에게 쪽지를 내밀며 물었다.
“이게 자네가 쓴 주소인가?”
“네, 맞습니다.”
“그럼 이것이 오반의 주소가 맞겠군.”
또 다른 쪽지에는 오반의 이름과 주소가 쓰여 있는데 누보의 집에서 꽤 가까운 곳이었다.
“그놈이 아직 집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누보가 반짝이는 눈으로 유리와 카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오늘 꼭 이사할 필요는 없어요.”
유리의 목소리가 생기를 되찾았다.
“음, 그럼 우리 식탁에서 차라도 마시며 좀 더 생각을 정리해 봅시다.”
누보가 거실로 앞장서 나가며 말했다.
“누보가 꼭 집주인 같네. 하하.”
카잔의 말에 누보가 싱긋 웃으며 유리에게 물었다.
“오반은 어떤 사람인가요?
나는 그동안 얼굴은 몇 번 봤지만, 말은 별로 안 해봤어요.”
“나도 그 사람 말하는 거 몇 번 못 봤어요.
마나헴이 물어보는 말만 대답하고 싱글싱글 잘 웃던데, 지금 생각하니 무서운 사람이네요...”
“어제 파티에 왜 참석하지 않으셨어요? 왕비가 알면 싫어할 텐데요.”
니고데모가 아침 식사에 아리마대 요셉을 초대했다.
같은 산헤드린 의원인 요셉은, 아리마대에서 집안 대대로 포목 장사를 하는 부유한 상인 출신이었다.
요셉이 진한 눈썹을 한번 꿈틀거린 후 입을 열었다.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지만, 나는 예수 선생을 알고부터는 그런 파티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싹 없어졌어요.”
하얀 옷의 시녀가 옥수수 수프를 큰 은그릇에 가지고 와서 니고데모의 앞에 놓았다.
약간 검고 마른 얼굴에 솟아오른 광대뼈가 요셉의 강한 성정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는 헤롯 왕이나 심지어 빌라도 총독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아리마대가 사마리아 근처라 은근히 요셉을 배척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니고데모는 그의 화통한 성격이 좋았다.
큰 국자로 따끈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란 수프를 요셉의 그릇에 가득 떠 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지금 세상 권세 잡은 사람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요셉이 대꾸 없이 옥수수 수프를 은 스푼으로 떠먹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들으니까 가야바 대제사장이 예수 선생을 잡으려고 노리고 있다는군요.”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입가에 묻은 수프를 하얀 수건으로 닦으며 요셉이 물었다.
“요나단 제사장이 그러더군요.”
“음, 그가 그랬으면 맞는 말이겠네요.”
“네, 사실 예수 선생도 여러 사람 앞에서 세금에 대한 질문을 받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하셨다지요.
이것은 이 땅의 권력자들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이 아닌가요?”
“실은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 말씀에 처음에는 깜짝 놀라고 실망했어요.
은전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왜 그러나 했더니, 거기 새겨져 있는 가이사의 흉상을 보여 주며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데나리온 은전
그 말을 들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도 선생의 뜻밖의 말에 기이하게 생각했어요.
평소 선생이 하던 말과 다르고 은전에 새겨진 가이사의 얼굴에 핑계를 대는 느낌까지 받았어요.”
요셉의 말에 니고데모가 물었다.
“그러셨군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솔직히 지금도 선생의 뜻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아마 니고데모 님 생각처럼 이 땅의 권력자들은 인정을 해 주면서, 동시에 새로운 왕국도 같이 이룰 수 있다는 의미 아닌가 싶어요.
만약 그렇다면 지금 선생을 믿고 따르는 많은 사람이 실망할 겁니다.
물론 선생께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을 첨부하긴 하셨지요.
이 말씀의 은밀한 뜻이 ‘땅의 권력은 하늘의 권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즉 가이사에게 비록 세금을 내더라도 가이사도 결국은 그가 받은 것을 하나님께 내야 한다’라고 확대 해석도 해 봤어요.”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선생이 그런 뜻으로 하신 것 아닐까요?”
짧은 침묵 후 요셉이 다시 말했다.
“글쎄요. 여하튼 옳지 못한 권력과 타협하는 건 선생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도 그런 재치 있는 대답으로 어려운 질문을 피해 가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어요.
옥수수 수프가 맛있는데 제가 말을 많이 하느라 다 식었네요.”
아리마대 요셉이 서둘러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마가복음 12장 17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