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전을 북서쪽에서 내려다보는 안토니아 요새는 로마 병사들로 가득했다.
보통 때는 5백 명 정도가 주둔했지만, 빌라도 총독이 머무는 기간에는 카이사레아에서 병사 5백명이 더 와서 천 명은 족히 되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만약에 발생할 유월절 혼란에 대비할 수 있다.
내일은 이들에게도 힘든 하루가 될 것이다.
질서 유지도 힘들지만, 성전에서 제사를 위해 죽이는 짐승들의 피와 배설물이 비릿한 냄새와 악취를 온종일 풍길 것이기 때문이다.
안토니아 요새의 1층에 있는 큰 식당도 병사들을 한꺼번에 수용하기에 부족했다.
그들은 점심때부터 식초를 넣은 시큼한 포도주를 연거푸 마셨다.
식당 안 구석에 십여 명의 병사와 백부장 한 사람이 고개를 들지 않고 묵묵히 빵과 고기를 먹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십자가 처형을 담당하는 병사들이다.
내일은 사형수 세 명이 집행을 기다리는데 한 사람당 네 명이 각각의 임무를 맡고 있다.
죄수가 가로대를 들게 하는 일, 손과 발에 못질하는 일, 다리를 부러뜨리는 일, 죽음을 확인하는 일까지 네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조금 전 내일의 처형 명단에서 ‘바라바 예수’의 이름을 본 롱기누스 백부장은 며칠 전 감옥에서 잠깐 만난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하지만 선량한 눈빛과 의젓한 태도를 가진 사내가 이렇게 일찍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이 십자가 사형을 집행한 사람 중 일찍 죽어도 괜찮은 사람은 없었다.
맥슨 백부장이 하는 일이 뭔가 잘 안된 것이다.
지난 2년간 한 번도 사형이 결정된 명단을 받은 후 집행이 취소되거나 연기된 적은 없었다.
롱기누스는 시큼한 포도주를 한입 꿀꺽 삼키고 맥슨에게 안 좋은 소식을 전해 주러 일어났다.
나머지 병사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 많이 마셔야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식당은 수많은 병사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와 고기 굽는 냄새로 축제 분위기였다.
베다니 시몬의 집도 유월절 마지막 준비에 분주했다.
구석구석을 여자들이 깨끗이 걸레로 닦았고, 특히 부엌에 누룩 자국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선생은 오늘 아침에 성전에 나갔다 일찍 돌아왔고 그를 꾸준히 따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게 모이고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와 수산나가 마당에서 손님 접대를 하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부엌에서 점심 준비를 했다.
“오늘 저녁은 선생님이 예루살렘 성내에 나가서 드신다니까 우리도 좀 쉴 수 있겠어.”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마르다가 말했다.
“응, 성내 어디서 드시려나?”
“나도 자세히 몰라.
제자분들께 은밀히 누구를 만나라고 하셨는데 아마 보안을 신경 쓰시는 것 같아.
니고데모 님 집이면 좋겠어.
가 보고 싶었는데…. 아, 무슨 다락방이라고 하셨다니 요한 마가의 아버지 댁일지도 모르고…”
마리아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선생님이 당신의 가혹한 운명을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담담히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것이리라.
제자들과 주위 사람들을 위해 밖에서 식사 모임을 하시는 까닭도 그래서다.
누구도 당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몇 년간 같이 했던 제자와 식구들에게 무슨 말씀을 남기고 싶으실 것이다.
며칠 전 옥합을 깨뜨려 그의 발에 부을 때 그녀를 바라보는 선생의 편안한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사람들의 비난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밖에 누가 왔나 보네.”
마르다의 말이 끝나자 살로메 님이 부엌으로 들어왔다.
“손님이 왔는데 작년에 딴 맛있는 대추야자 어디 있지?”
마리아가 선반 위 찬장에서 대추야자 열매를 꺼내 주었다.
“조금 더 줘. 눈이 안 좋은 여자분도 좀 갖다드리라고 해야지.”
살로메의 목소리가 활기찼다.
마당 식탁 한구석에 앉아 기다리는 사라에게 살로메가 대추야자 한 바구니를 가지고 가서 앞에 앉았다.
“점심을 드시고 가면 좋은데 빨리 돌아가야 하신다니, 이것이라도 조금 드시고 남은 것은 가지고 가세요.
루브리아 님의 눈은 좀 어떠신가요?”
“아직은 별 차도가 없는 듯해요.”
“분명히 며칠 안에 좋아지실 거예요.
혹시 안 그러면 한 번 더 오세요.”
그 말을 듣고 사라가 안 주머니에서 은전 주머니를 꺼내 건네었다.
살로메의 얼굴이 환해지며 얼른 받아 넣었다.
“저는 루브리아 님을 처음 볼 때부터 높으신 신분인데도 우리들의 사정을 잘 헤아려 주실 줄 알았어요.
제가 본 로마 여인 중 가장 아름다우시고 천사보다 더 착하신 분이 틀림없어요.
반드시 큰 복을 받으실 거예요. 사라 님도 그러시고요.
이제 변호사에게 체면을 차리게 되었네요.”
사라가 별말이 없자 살로메가 어린애 주먹만 한 대추야자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거 얼른 드셔 보세요. 작년에 비가 거의 안 와서 제가 그동안 먹어 본 대추야자 중 제일 맛있어요.
얼마나 열매가 달고 쫀쫀한지 꿀이 필요 없어요.”
주황색 속살이 드러난 대추야자를 그대로 받아서 한입 먹은 후 사라가 말했다.
“정말 다네요.
갈릴리에는 이런 건 없지요?”
“그럼요, 바로 여리고 지역에서 다윗 왕 시대부터 가장 달고 맛있는 대추야자가 나오지요.
나무 높이부터 달라요. 이건 키가 20m까지 자라기도 해요.”
사라는 집 위 공원 벤치에서 미사엘이 보여 준 대추야자 기둥이 생각났다.
거기에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도 그새 조금 자랐을 것이다.
사라가 한 개를 다 먹자 살로메가 얼른 한 개를 더 까 주며 말했다.
“오늘 오후라도 시내에 가서 변호사를 만나려 하는데 나중에 호텔로 더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에요. 이것만 먹고 나머지를 가져가도 충분해요.”
사라가 빨리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옆에서 귀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라님, 여기 계시네요.”
돌아보니 사마리아에 갈 때 마차를 몰던 네리였다.
“어머, 네리 씨, 여기는 웬일이에요?
이쪽으로 앉아요.”
사라가 반갑게 자리를 권하자 네리가 살로메를 의식하는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제 풀려날 것으로 기대한 분이 나오지 않고, 로벤도 들어간 후 안 나와서 지금 감람 산에 있는 분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사라 님을 만나러 시온 호텔에 갔더니 여기 계실 거라고 해서 왔어요.”
사라가 대추야자를 한입에 다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 바구니는 총각이 들고 가구려.
마침 잘 왔네. 근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살로메의 말에 네리가 묵묵히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사라님, 고마워요. 루브리아님의 눈은 곧 나으실 거예요.
우리 요한이가 오늘 저녁 만찬을 할 집을 알아보러 나갔는데 오는 대로 저도 같이 변호사 만나러 가야 해요.
그럼 조심해 가세요.”
살로메가 대문 밖까지 나와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