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걸어 보는 옛 동네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행색이 오히려 예전만 못한 듯했다.
이모를 따라 촌장의 집으로 들어갔다.
반갑게 카잔을 맞은 그의 모습도 거의 그대로였다.
“촌장님,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허허, 그래도 수염은 아주 하얗게 되었네.”
불그스레한 얼굴에 앞머리를 시원하게 넘긴 촌장은 건강해 보였다.
“우리 카잔은 객지 생활에 고생이 많아서 팍 늙었어요.”
옆에서 이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니에요. 아마 턱수염 때문에 그럴 거예요.”
카잔이 턱수염을 떼어 내고 얼굴을 돌리며 싱긋 웃었다.
“어머, 가짜였구나. 그게 없으니 훨씬 젊어 보인다.
근데 그건 왜 붙이고 다니니?”
카잔이 그간의 일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아, 그래서 미트라교에 입교하신 거군요.”
포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리암도 찾을 겸 그렇게 되었어요.”
“그래, 이번에 그 애를 찾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이모의 눈에서 살짝 눈물이 비쳤고 촌장도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그 애는 찾지 않는 게 좋을 것이네.”
카잔의 놀란 눈빛이 촌장의 눈과 마주쳤다.
“지금 미트라 교주가 누군지 아는가?”
“이름은 미갈에게 언뜻 들었어요. 시몬이라던가요….”
촌장이 포티나를 한 번 쳐다본 후 다시 말했다.
“그가 바로 마술사 시몬이야.”
카잔의 눈이 커졌다.
“그래, 바로 그놈이야. 미리암 엄마를 입교시켜 사망케 한….”
“아, 그래요? 여로암은 모르고 있는 것 같던데요….”
“그럼, 벌써 10여 년 전 일이니까….”
촌장이 잠시 말을 멈춘 후 다시 이어 나갔다.
“미트라교는 태양신의 날인 12월 25일, 희생제물로 매년 어린 소녀를 바치는데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지….
어릴 때부터 교주 손에 자라는데, 마음 아픈 얘기지만 공연히 찾다가 더 힘들어질지도….
그냥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생각하는 게 나을 거야.
또 지금 만난다고 해도 자네를 아버지로 생각하지도, 믿지도 않을 걸세.”
카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미리암을 찾기에 이미 늦은 것인가.
카이사리아에서 일하면서부터 로마군들의 가족 중 어린 딸들을 볼 때마다 까만 머리에 까만 눈동자의 어린 소녀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부모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그 소녀들의 웃는 얼굴은 카잔에게 아픔이었다.
10년의 세월을 너무 안타깝게 흘려보낸 후회가 가슴에 밀려왔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로 그의 콧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그래. 촌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구나.
이미 지난 일인데 어떡하니…. 사실 네 잘못도 아니고….”
이모가 위로의 말을 했고 포티나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연민의 빛을 띠었다.
카잔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제가 듣기로는 지금 시몬 밑에서 양의 정강이뼈로 신탁 점을 치는 아이 이름이 미리암이라고 하던데요…”
“미갈이 그 얘기도 했구나….
그 아이가 올해 초부터 보이지 않는단다.
또 미리암이라는 이름은 제일 흔한 이름 아니니.”
이모의 말이 다시 카잔의 가슴을 흔들었다.
몇 달만 일찍 왔으면 적어도 미리암이라는 아이를 만날 수는 있었을 텐데...
이어서 이모가 화제를 바꾸었다.
“포티나님, 우리 카잔 중매 좀 서 주세요.
나이는 좀 있지만 보시다시피 훌륭한 신랑감이에요.”
카잔이 겸연쩍게 웃으며 다시 화제를 돌렸다.
“미트라교가 사마리아 지역에 그동안 엄청 교세를 확장했나 봐요.
조직력도 있고 신도들의 자세가 헌신적인 듯 보였어요.”
“그래서 걱정이네. 이러다가 아무래도 뭔 일이 날 거 같아.”
촌장의 넓은 이마에 주름이 모였다.
“저 있을 때도 한번 신도가 되면 빠져나오긴 어려웠지만, 세력은 약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큰 조직이 되었나요?”
“음, 시몬이 4~5년 전에 교주가 되고부터 폭발적으로 사람들이 모였어.
그동안 우리가 예루살렘에 눌려 지낸 한을 풀어 줄 제2의 모세라고 스스로 선전하고 다녔지.
그 증거라며 주위 몇 사람에게 황금 성배를 보여 주었어.”
“진짜 모세의 황금 성배인가요?”
“그건 모르지만, 여러 사람이 그가 준 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다는 소문이 돌면서 모두 진짜로 믿고 있지….
원래 미트라교는 태양신을 경배하고 황소를 상징으로 시작했는데 시몬이 묘하게 유대민족 종교를 접목해서 이제 주객이 전도되고 있어.”
“네, 이 사마리아 백성의 힘든 삶이 그런 종교를 받아들였어요.
먹을 게 없어서 아직도 굶어 죽는 사람이 많고 이방인이라고 멸시당하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희망처럼 보이니까요.”
포티나가 설명을 계속했다.
“또 아시겠지만,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모계 중심의 가족이 형성되다 보니까 의외로 단결력이 크게 생기게 되더군요.
여성의 자식 보호 본능이 역시 강한가 봐요.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요.”
“이집트에서도 왕족끼리는 근친결혼을 했고, 그리스의 신들도 근친결혼을 하니까, 미트라교는 그런 수준의 종교라고 주장을 하고 있어.
요즘은 그가 점점 야심이 커져서 제2의 모세라는 엄청난 말을 하기 시작했네.”
촌장 집의 큰 거실엔 석양빛이 길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카잔은 옛날에 잠깐 만난 시몬의 얼굴을 기억하려 했으나 이상하게 정확한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시 어둡고 아팠던 기억을 지우려고 오랜 세월 억지로 잊으려 한 탓이리라.
“모세의 후계인 자기가 800년 전 무너진 북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고 그리심 성전을 유대 사람이 와서 경배하도록 재건한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로마와 충돌이 있지 않을까요?”
카잔이 촌장에게 물었고 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