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님, 프로클라 여사님이 오셨습니다.”
“아, 그래. 어서 안으로 모시지 않고 뭐 하고 있어?.”
헤로디아가 일어나 방문 밖으로 나가 프로클라를 맞았다.
“제가 곧 찾아뵈려고 했는데 한발 늦었네요.”
“무슨 말씀을요. 먼 여행길에 피곤하실 텐데요.”
나이는 프로클라가 많이 어렸지만, 유대 땅 전체를 다스리는 총독의 아내다.
헤로디아도 항상 예의를 깍듯이 지켜야 했다.
프로클라는 젊은 여자답게 피부가 우유처럼 뽀얬고 늘 고상한 자태를 풍겼다.
헤로디아는 ‘십 년만 젊었어도 내가 훨씬 나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소파에 자리를 권했다.
“올 유월절은 어느 해보다 순례객이 많은 것 같네요.
헤롯 전하와 왕비 님께서 그동안 성전도 마무리하시고 여러모로 애쓰신 결과가 점점 나타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가 이렇게 유월절 행사에 참석한 것이 30년이 넘었네요.
여사님도 벌써 5년째인가요?”
“네, 엊그제 이 땅에 온 것 같은데 벌써 그렇습니다.
세월이 빠르네요…. 이번에 빌립 왕 문상도 못 갔습니다.
갑자기 그렇게 되셨나요?”
“원래 어려서부터 몸이 좀 약하셨어요.
그래도 헤롯 전하보다 몇 살 아래인데 너무 뜻밖이라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헤로디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마음이 아프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 그러셨겠지요…. 헤롯 전하께서는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장수하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없는 동안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대충 인사가 끝나자 헤로디아가 먼저 물었다.
“네… 뭐 급한 일은 아니고요, 왕비 님께서 곧 로마에 가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언제쯤 가실 건가요?”
“유월절 끝나면 곧 떠나려 합니다. 제가 무슨 심부름이라도 할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을 한 가지 드려도 될까요?”
프로클라가 계속 말했다.
“로마에 칼리굴라 님의 여동생 드루실라 님께 제 서신 좀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네, 그럼요. 근데 칼리굴라 님을 잘 아시나요?”
헤로디아는 칼리굴라의 이름이 나와서 내심 놀랐으나 침착하게 물었다.
“그분은 잘 알지는 못하고요.
드루실라 님은 어렸을 때 제가 가정교사를 하면서 역사와 철학을 가르쳐 드렸지요.
지금쯤 아주 총명하고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하셨을 거예요.”
시녀가 제비꽃 향내가 나는 허브차를 두 잔 가지고 들어와 탁자 위에 놓았다.
프로클라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붉고 둥근 촛농으로 봉한 서신을 왕비에게 건네었다.
“네, 귀한 서신이니까 잘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지금 예루살렘에 와 있나요?”
“네, 그럴 거예요. 여사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아시나요?”
“만나본 적은 없는데 그 사람이 제 꿈에 가끔 나타나요.”
“어머, 그래요? 무슨 꿈인가요?”
“글쎄요. 이런 얘기를 왕비님께 직접 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아무한테도 말 안 해요.
헤롯 전하께도 물론 안 하고요.”
헤로디아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모세의 후계자가 제자들을 데리고 그리심 산에 나타나서 예루살렘 성전을 공격하려 했어요.”
“사마리아 그리심 산에요?
왜 거기 나타났나요. 예루살렘이 아니고…”
“그건 꿈이니까 모르지요.
그래서 총독께서 그리심 산 성전으로 가셔서 모두 진압했는데 모세의 후계자가 옆구리에 피를 흘리며 다시 나타났어요.
자신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면서 총독에게 이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그랬더니요?”
“거기서 꿈이 끝났어요.”
헤로디아가 앞에 놓인 허브차를 한 모금 들이킨 후 말했다.
“나사렛 예수가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고 하는 소리는 들었는데… 물론 아니겠지만요….”
“네, 여하튼 제가 그 사람에 대해 들은 바로는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총독 각하에게도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언제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자,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떠나기 전에 다시 연락드리지요.”
그녀를 문밖까지 마중한 후 헤로디아는 시녀장에게 꿈을 해몽하는 재정대신 구사를 당장 들어오게 하라고 했다.
“왕비님, 구사 님은 지금 출장 중이시고 루브리아 님이 다시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녀장의 목소리가 급했다.
“아, 어서 들어오라고 해.”
루브리아가 들어오자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지금 프로클라 여사가 다녀갔어.
루브리아가 혹시 칼리굴라의 여동생 드루실라도 잘 아나?”
“그녀는 잘 모릅니다.”
대답을 하는 루브리아의 얼굴이 아까와 달리 불안해 보였다.
“그렇구나. 근데 왜 또 왔어. 무슨 급한 일이 생겼나?”
“네, 아까 왕비 님이 하신 말씀에 따르기로 했어요.
곧 같이 카프리섬으로 가서 황제 폐하를 뵙도록 할게요.”
“호호,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잘 생각했어.
이런 기회는 하늘이 주시는 거야.
내가 입던 예쁜 옷이 많으니까 온 김에 옷방으로 가 보자.
뭐든지 골라 가져가.”
왕비가 막 일어나는데 루브리아가 급히 말했다.
“왕비 님, 옷은 나중에 보고요. 긴히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요.”
“부탁? 뭐든지 해. 루브리아 부탁인데 다 들어 줘야지.”
“네, 고맙습니다. 실은 이번에 체포된 바라바가 곧 사형될 수 있어요.”
루브리아가 그동안의 사건을 설명했다.
헤로디아는 그녀의 자초지종을 들으며 바라바와 그녀가 상당히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까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고 말했던 대상이 바라바라고 생각하니 은근히 질투심도 생겼다.
“음, 그러니까 나보고 총독께 부탁해서 바라바를 처형하지 않도록 해달란 말이지?”
“네, 왕비님. 꼭 좀 그렇게 되도록 해 주세요.”
루브리아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그럼 그래야지. 걱정하지 마.
곧 프로클라 여사에게 가서 말할게.
총독이 그녀의 말이라면 다 들을 거야.”
“감사합니다.”
“천만에. 자, 그럼 옷방으로 가서 옷을 골라 볼까?”
루브리아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왕비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