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누보 씨가 앞으로 사마리아 지역 열성당을 재건하겠다고 했을 때 아주 멋있어 보였어요.”
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며 유리가 옆에 앉은 누보에게 말했다.
“그때 혹시 제 눈에서 금빛 광채가 나왔나요?”
“호호. 내가 한 말을 잘 기억하고 있네요.
맞아요. 그런 느낌이었어요.”
여로함이 식당으로 들어오며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카잔 옆에 앉았다.
“잘 쉬셨어요? 오늘 입교식에 두 분만 가실 거지요?”
“응, 그래. 나하고 누보.”
유리가 정색을 하고 카잔에게 말했다.
“저도 가야지요. 오반을 잡는 데 제가 빠지면 되나요.
입교를 안 하면 그들의 제사 모임에 참석도 못 하잖아요.”
“음, 그래. 좀 위험하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카잔의 동의에 여로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그럼 곧 떠날 준비를 하시지요.
제가 마차를 준비해서 여관 앞으로 가지고 올게요. 마부도 미트라 교인이에요.”
잠시 후 마차 안에서 유리가 카잔을 보며 말했다.
“아래 턱수염까지 있으니까 더 점잖아 보이세요.”
“10년 전 여기 살 때는 콧수염도 없었으니까 사람들이 거의 못 알아볼 거야.”
“네, 근데 입교식에서 무슨 질문 같은 건 안 하나요?”
유리가 여로함에게 물었다.
“몇 가지 질문을 하는데 다 ‘네’라고만 대답하면 돼요.”
마차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동남쪽으로 향했고 점점 산기슭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요즘 그리심 산에 강도들은 별로 없나요?”
유리의 계속된 질문이었다.
“몇 년 전 로마 군인들이 소탕 작전을 크게 벌인 후에는 많이 줄었어요.
우리 마차는 미트라교 표시가 있어서 건드리지 않아요.”
“마차 옆에 그린 빨간 황소 뿔이 표시인가요?”
“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마차가 완만한 오르막 경사를 계속 오르더니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좁은 샛길로 방향을 틀었다.
아침 산새들의 소리가 상쾌하게 들렸다.
누보가 ‘어느 손가락에 피를 내는 게 좋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지’라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추었다.
“신전에 들어서기 전에 있는 검문소에요.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올라가야 해요.”
여로함이 먼저 내려서 오늘 새로 입교하는 세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검문소 건물이 숲 사이에 나지막이 보였고 경호원이 몸수색을 했다.
“오늘 입교식은 누가 주관하시나요?”
여로함이 안면이 있는 듯한 여자 경호원에게 물었다.
“이세벨 님이 하세요.”
“아, 그러시군요.”
여자 경호원이 누보의 열성당 당원패를 꺼내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누보가 잔뜩 긴장했지만 뭔지 모르는지 그냥 넘어갔다.
“이세벨이 누구에요? 여자 이름 같은데….”
누보가 몇 걸음 걸은 후 여로함에게 물었다.
“네, 미트라교 부교주인데 아주 미인이에요.”
산길을 조금 더 올라가니 큰 건물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면에 빨간 황소의 뿔이 그려져 있고, 기둥은 화려한 페르시아 장식으로 치장하여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정문으로 들어서니 입교식을 위한 방이라는 표시가 있었고, 방안에는 여러 명이 긴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뒷모습이 보였다.
“새 신도 등록하러 오셨지요?”
입구의 책상에 앉아 있는 여자가 쪽지를 나누어 주며 말했다.
이름과 주소 나이를 적는 칸이 있고 누가 소개했는지 보증인을 적어야 했다.
“두 분은 부부신가요?”
그녀가 카잔과 유리를 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누보가 대답했다.
“앞 의자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시작할 겁니다.”
의자에 앉으니 정면의 벽에 크고 화려한 양탄자가 걸려 있고 금실로 글씨를 새겨 놓았다.
<미트라 신은 만왕의 왕이고 우리는 한 핏줄이다>
잠시 후 큰 보석 귀걸이와 금목걸이를 한 여자를 필두로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와 앞의 사제석에 앉았다.
“저 여자가 이세벨인가요?”
여로함이 고개만 끄덕였다.
향수 냄새가 은은히 풍겼고 곧 여자가 일어나 미소를 지며 좌중을 둘러봤다.
“여러분, 환영합니다. 저는 미트라교 부교주 이세벨입니다.
미트라교는 한 번 교인이 되면 영원한 한 핏줄로 이 세상의 영광을 함께 나눕니다.
먼저 간단한 문답을 하고 피를 나누는 입교 의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이세벌이 자리에 앉자 옆에 서 있는 남자가 입교 신청서를 건네주었다.
그녀가 첫 번째 서류를 보면서 이름을 불렀다.
“누보 씨, 이 앞 의자로 와서 앉으세요.”
사제석 앞에 작은 의자가 하나 있었다.
누보가 나와 앉았다.
사제석 앞 긴 테이블 위를 자세히 보니 금빛이 나는 주먹만 한 작은 항아리가 있었고, 그 옆에 단도와 하얀 수건이 준비되어 있었다.
“왕중의 왕 미트라 신을 경배하십니까?”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누보를 보았다.
“네.”
누보는 이세벨의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누보 씨는 세상에 살면서 지은 모든 죄가 피 섞음으로 깨끗이 됨을 믿나요?”
“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 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인류가 차별 없이 같은 조상이 되고 같은 자손이 됨으로써 지상천국을 이루는 원리에 동참하겠습니까?”
누보는 ‘네’ 하고 나서 점점 질문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아직 미혼인데 미트라 여신도와 결혼하겠습니까?”
질문이 이해는 되는데 대답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유리도 곧 미트라교 신도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 있게 말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이세벨이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수고했습니다. 다음은 유리 씨 나와 앉으세요.”
유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고 카잔과 다른 사람들도 문답이 끝났다.
“이제는 피를 나누는 입교식을 거행하겠어요. 누보 씨부터 앞으로 나오세요.”
누보가 나와서 이세벨의 앞에 서니 그녀가 은빛 단도를 들었다.
반달 모양의 동그란 단도인데 시카리들이 쓰는 칼과 비슷했다.
“이렇게 내가 하는 대로 손가락의 피를 이 성혈 단지에 서너 방울 떨어뜨리세요.”
이세벨이 익숙한 동작으로 왼손의 넷째 손가락을 살짝 베니 피가 단지 속으로 똑똑 떨어졌다.
누보가 칼을 받아 입술을 악물고 같은 동작을 하였다.
두 번째 찌르니 피가 나왔다.
옆에 있는 하얀 수건으로 손가락을 눌렀다.
모두의 피가 모인 후 이세벨이 성혈 단지를 들어서 그 피를 옆에 있는 물항아리에 부었다.
물에 떨어진 피가 무용을 하듯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이 물은 모세의 황금 성배에 담겼던 성수입니다.
그래서 피가 이렇게 기쁘게 춤을 추는 것이 우리 눈에 보이지요.
이제 이 핏물을 한 모금씩 마심으로써 우리는 영광된 미트라 교인이 되는 겁니다.”
모두 한 잔씩 핏물을 나눠 받자 이세벨이 잔을 들고 외쳤다.
“미트라 신은 만왕의 왕이고 우리는 한 핏줄이다.”
누보는 눈을 꼭 감고 손에 든 핏물을 한 번에 마셨다.
비릿했다.
“이제 여러분은 입교식을 통과했습니다.
모레, 금요일 이달에 새로 들어온 신도들을 위한 교육이 있습니다.
모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이세벨이 성혈 단지를 들고 퇴장했고 옆의 남자가 성수 항아리를 조심스레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누보가 유리를 쳐다보며 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