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리섬 황제의 별장 ‘빌라 쥬피터’.
일반인들은 근처에 얼씬도 할 수 없었다.
황제는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부터 대단위 저수조 공사를 실시 했고 웬만큼 큰 배도 바로 닿을 수 있는 선착장을 마련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 있는 빌라 쥬피터는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각종 목욕탕과 웅장한 홀, 넓은 집무실과 침실은 물론 황실 점성술사를 위해 천문대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밤이 되자 어두움이 사방을 가렸다.
달빛도 없고 간밤에 비를 몰고 온 구름이 아직도 하늘을 잔뜩 덮고 있었다.
일찍 잠자리에 든 황제의 침실로 소리 없이 접근하는 두 명의 사내가 있었다.
얼굴에는 시꺼먼 복면을 둘렀고 침실을 지키는 경호원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젊었을 때 전장을 누비며 용맹을 떨치던 황제도 칠십 노인이 되자 팔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눈도 침침해지는 것이 하루가 다르게 느껴졌다.
‘팍스로마나’를 이룩한 위대한 황제,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로마를 다스린 지 20년이 훌쩍 지났다.
이제 후계자를 정하고 그에게 제국의 운영을 맡길 때가 되었는데 티베리우스의 마음은 여전히 오락가락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손자 게멜루스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으나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렸다.
3~4년만 더 있으면 20세가 되는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양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황위를 물려준 것처럼, 마음에는 안 들지만 칼리굴라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게멜루스를 칼리굴라의 양자로 입적하여 후계 구도를 미리 정리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황제는 요즘 자리에 누우면 ‘빕사니아’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녀는 50년 전 그가 갈리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로마에 돌아오자마자, 열렬한 사랑에 빠져 결혼한 티베리우스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
첫아들 드루수스를 낳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중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결혼생활 8년째인 티베리우스에게 자기의 딸인 율리아가 과부가 되었으니 빕사니아와 이혼하고 율리아와 결혼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는 저항했으나 신의 반열에 오른 로마제국의 초대황제에게 끝까지 거역할 수는 없었고 마침 둘째를 가지고 있던 빕사니아는 충격으로 유산을 하게 되었다.
원로원 귀족 가문의 딸인 그녀는 맑은 피부와 검고 큰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오래전의 사랑과 아픔이 몽롱하게 겹쳐지면서 티베리우스가 조금씩 잠에 빠져들고 있는데 그의 침실 안으로 복면을 쓴 두 명의 사내가 그림자처럼 들어왔다.
놀랍게도 조금 전 분명히 안에서 잠근 침실문이 소리도 없이 저절로 열린 것이다.
그중 한 사내가 먼저 황제가 누워있는 침대로 살금살금 가까이 왔다.
티베리우스는 일부러 숨소리를 고르게 내쉬고 있었다.
황제가 깊이 잠들었다고 생각한 그는 침실에 있는 큰 베개를 가지고 와서 황제의 얼굴을 세게 덮었다.
또 한 사내는 티베리우스가 손에 끼고 있는 황제의 반지 인장을 빼앗으려 그의 손가락을 더듬었다.
이상하게 황제는 온몸에 힘이 빠지고 전혀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러고 생각하니 오늘 저녁에 먹은 버섯 맛이 조금 이상했는데 아무래도 치명적인 독에 중독된 성싶었다.
이놈들이 벌써 주방에까지 독수를 뻗은 것이다.
무서운 힘으로 얼굴을 누르는 베개 때문에 점점 숨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그래도 반지 인장은 뺏기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꼭 쥐고 펴지 않았다.
이때였다.
갑자기 창문이 열리며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더니 곧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를 보자 두 명의 괴한 중 한 놈이 칼을 뽑아 들고 찌르려 덤볐다.
하지만 그녀가 하얀 망토를 한 번 펄럭이자 그놈은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베개를 누르던 놈이 놀라서 황급히 침실 밖으로 도망갔다.
티베리우스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는 바로 그 옛날의 빕사니아였다.
황제는 그녀를 안으려다 잠이 깨었다.
베개가 침대 머리에 끼어서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본관 앞뜰에, 요나단 제사장이 아버지 안나스의 지시로 제사장들을 집합시켜 놓았다.
유월절 축제 기간이 아무 탈 없이 잘 지나간 것에 대해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오늘도 날씨는 따스하고 화창했다.
시내 각 주요 회당을 담당하는 제사장들만 50명이 넘었고 이들은 모두 안나스 일가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다.
회당에서 신도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대제사장에게 얼마나 많이 내느냐에 따라 충성도가 결정되는 것은 이들의 오랜 관습이었다.
더욱 혈색이 좋아진 안나스가 눈가에 주름을 지으며 성전에 모인 제사장들 앞에 나와 섰다.
“존경하는 제사장님들, 이번 유월절 기간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그가 인사를 하자 사람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올 유월절은 유대 역사상 세계 각지에서 가장 많은 순례객이 모여든 엄청난 행사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외벽공사를 예정대로 완공하게 되어 더욱 야훼께 영광 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앞줄에 서 있는 수염이 길고 눈썹이 허연 제사장이 다시 박수를 크게 치자 모두 따라쳤다.
“간혹 엉터리 예언자나 허가받지 않은 잡상인들이 눈에 띄었으나 성전경비대가 철저히 치안을 유지하여 질서 있고 안전한 행사가 되었습니다.
빌라도 총독과 헤롯왕께서도 우리의 노고를 치하하시고 내년에는 더욱 성대하고 즐거운 행사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계십니다.
한 가지 약간 아쉬웠던 점은 각종 제물을 바친 후 배수구가 용량이 부족하여, 피 냄새가 좀 많이 날 때가 있었는데 빠른 시일 안에 개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유월절 행사와 축제 기간이 끝났고, 우리는 차분한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가, 매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며 제사장으로서 각자 맡은 지역의 임무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음,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한 가지 특별한 당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나 회당소속 서기관들이 선지자들의 말씀이나 율법을 회중에게 전할 때 제각기 이런저런 해석은 하지 마세요.”
안나스가 잠시 침묵으로 주위를 집중시킨 후 이어나갔다.
“젊은 서기관들이 알면 얼마나 알고 공부를 했으면 뭘 그리 많이 했겠습니까!
내가 매달 내려보내는 말씀과 해석을 토씨 하나 빼지 말고 그대로 전하도록 하세요.
거룩한 말씀은 아무나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율법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르는 건 끝까지 몰라요.
그러니까 어설프게 생각하고 따지지 말고 그냥 내가 한 말씀을 그대로 나누면 되는 거예요.
이것이 제대로 안 되면 발전이 없어요.
잘못하다 자기도 모르게 큰 죄를 질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말에 순종하는 것이 바른길이고 지름길입니다.
괜히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인간은 무조건 죄인이고 야훼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내 말 다 이해되지요?”
눈썹을 올리며 안나스가 제사장들을 쭈욱 한 번 훑어보았고 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훈시를 마친 안나스가 먼저 퇴장하여 옆에 따라오는 아들 요나단에게 말했다.
“지난번 모였던 로고스 클럽, 언제 또 할 거니?”
“네. 곧 한 번 다시 모이려고 합니다.”
“음, 거기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쉬운 길을 가르쳐야 해.
공연히 어려운 철학이니, 역사니, 이런 거 따지다 보면 종교가 설 자리가 없단다.”
“네, 알겠습니다.”
아들을 쳐다보며 안나스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