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형님을 따라 예수 선생의 제자들과 합류한 네리는 그동안 겪었던 놀라운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엠마오 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행인이 알고 보니 예수 선생님이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이 혼자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 하늘의 별빛이 천사가 되어 내려와 그분을 감싸는 것을 나무 뒤에 숨어서 본 일 등이 꿈의 한 장면 같았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뜻에 따라 나실인 서약을 하며 살아온 것이 어떤 연관이 있는 듯했다.
그동안 그가 배운 하나님의 품성 중 ‘불변’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심을 의미한다.
이것이 기도와 관련될 때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불변이라면 인간이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심각한 의문이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없고 내세에 심판이 없으면, 인간은 오늘의 쾌락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반면에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은 무한히 게을러질 수 있다.
신의 뜻이 아니면 어떤 일도 열심히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의 삶을 신의 축복을 받은 삶, 신에게 선택받은 삶으로 규정하고, 나태하며 교만한 자세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네리가 볼 때는 열심히 회당에 나오는 사람들, 사회적 지위가 있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부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불변’은 인간의 기도로 변화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네리의 고향 선배인 나사렛 예수의 기도도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왜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을까?
왜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한 후 다시 살리신 것인가.
예수가 유대민족의 메시아라면 십자가의 죽음은 가당치 않은 일이고, 모세나 선지자의 글에도 메시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요한 형님은 선생이 평소에 얼마 후 세상을 떠날 것이고 곧 다시 온다고 했다는데 그걸 알았다면 왜 겟세마네에서 그런 피땀을 흘리는 기도를 했는가.
네리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물론 선생의 기도를 그날 다 들은 것은 아니나 기도가 참으로 힘을 얻으려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변경될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는데 누가 네리의 방문을 두드렸다.
예수 선생의 친동생인 야고보 님이었다.
“네리야, 내일 갈릴리로 떠날 준비는 다 했니?”
“네. 야고보 형님, 들어오세요.”
네리가 나사렛에서 나실인 서약을 할 때 야고보도 같이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는 고향에서 어릴 때 만난 네리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형님, 우리가 기도를 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는 없는 건가요?”
“당연히 바꿀 수도 있지.”
야고보의 대답이 아주 쉽게 나왔다.
“히스기아 왕을 처음 계획보다 15년 더 살게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잖아.”
“그럼 하느님의 ‘불변’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요?
인간의 자유로운 요구에 의해 하나님이 계획을 바꾼다면 ‘불변’이란 말은 잘못된 건가요?”
야고보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나님의 불변은 그런 의미는 아닌 듯싶어.
유대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계획을 바꾸신 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고 심지어는 후회까지 하셨으니까.”
야고보는 유대 율법과 역사에 정통했다.
어려서부터 그의 형과 함께 회당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모든 일에 원칙을 지키며 주위 사람의 신망을 많이 받았다.
“어떤 후회를 하셨나요?”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을 후회하시게 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왜 자유를 허락하셨을까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로운 가운데 그분을 선택하고 사랑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인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야고보의 각진 턱이 믿음직해 보였다.
“아,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진정한 사랑은 우리가 자유롭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군요.
그것이 그분의 뜻이네요.”
“그렇게 볼 수 있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로 그분의 계획을 바꾼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겠지.”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영광을 받기 원하시나요?”
“그분의 영광이 우리의 영광이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의 영광.”
그래서 예수 선생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네리가 하는데 야고보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불변이란 그분의 인격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치 않는다는 의미 아닐까.”
“네, 조금 알 것도 같네요. 감사합니다.”
“천만에…. 앞으로도 그런 문제는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 좋겠네.
그럼 내일 만나.”
야고보가 나간 후 네리는 그가 예전보다 생각이 더욱 깊어졌음을 느꼈다.
더욱이 예수 선생이 살아난 이후 주위에서 야고보 님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제자들이 믿고 따르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의 친동생으로서의 권위가 생긴 것이다.
야고보 님도 그전에는 형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십자가 처형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지나 다시 살아난 그분에 대해 그동안 미처 몰랐던 미안함이 경외감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의 신앙이 더욱 깊어졌고 요한 님은 물론 베드로 님도 나이는 아래인 야고보 님의 의견을 존중하기 시작했다.
네리는 예수 선생을 보고 싶어서, 그의 제자들을 따라 갈릴리로 가는 길에 합류했지만, 속으로는 약간 후회도 되었다.
사라 님과 같이 사마리아에 갔다가 갈릴리에 가도 늦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마음 한구석에 사라 님의 뽀얀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드린 대추야자를 드시면서 내 생각이 가끔 나시겠지 하는 마음이 작은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