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로 장식된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칼리굴라는 늦은 점심을 즐기고 있었다.
페르시아에서 밀수입한 캐비어를 송어찜 위에 엷게 펴서 먹는 맛이 좋았다.
나폴리 최고급 백포도주를 얼굴이 가무잡잡한 소녀 노예가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따랐다.
술잔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길었다.
칼리굴라는 7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게르만 전투의 영웅인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그때 나이 약관의 33살이었다.
아버지는 31살 때 칼리굴라를 데리고 로마로 돌아와서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게르마니쿠스는 4마리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몰았고 칼리굴라는 두 형과 함께 아버지 옆에 동승했다.
시민들의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그들의 함성이 아직도 칼리굴라의 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귀국한 후 시리아의 안티옥으로 임지가 바뀐 아버지를 따라 칼리굴라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함께 가게 되었다.
두 형은 교육문제로 로마에 남았다.
동방지역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1년을 지낸 후 게르마니쿠스 가족은 이집트로 여행을 떠났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얼마 후 고온에 시달리며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시리아 총독 피소가 남편에게 독약을 먹인 것이라 확신했다.
칼리굴라는 아버지의 유해를 품에 안고 귀국한 어머니와 함께 로마에 살면서 법적으로는 할아버지인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한 증오와 분노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분명히 황제의 지시로 아빠가 독살된 것이고 그 이유는 황제의 양아들 게르마니쿠스가 없어져야 친아들을 후계자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청소년기를 보낸 칼리굴라가 15살이 되었을 때 황제는 카프리섬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원로원 의원들도 연로한 황제가 휴가 삼아 잠시 쉰 후 로마로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는 카프리섬에서 원거리 통치를 하며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몇 년 전 그의 어머니 리비아 여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황제는 섬에서 나오지 않았다.
원로원에 유감의 서신과 장례절차를 간소화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원로원 의원들은 리비아를 그녀의 남편 아우구스투스의 반열로, 신의 경지로 숭배하기로 의결하였다.
침실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아그리파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비서들을 통하지 않고 막 바로 이렇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칼리굴라의 여동생을 제외하면 아그리파가 유일했다.
매부리코에 머리가 약간 벗겨진 아그리파가 급히 무슨 말을 하려 했다.
칼리굴라가 손을 들어 제지하고 그의 다리를 주무르던 노예를 손짓으로 내보냈다.
“유대의 헤로디아가 카프리섬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반쯤 누었던 몸을 천천히 일으킨 칼리굴라가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늙은이를 만나러 가는 것이 분명한데 또 무슨 계략을 꾸미는 걸까요?”
졸린 눈의 칼리굴라가 대답하지 않고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 요녀가 틀림없이 나를 음해할 겁니다.”
또 아무 반응이 없자 아그리파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동행한 일행 중 루브리아라는 여자가 있는데 로무스 장군의 딸이라네요.
이 여자는 왜 같이 오는 걸까요?”
칼리굴라의 크고 쑥 들어간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카프리에 갔다가 여기에도 오나요?”
“네, 그럴 계획이라고 합니다.”
아그리파가 얼른 대답했다.
“배를 타고 오지요?”
“네,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아직 소년 같은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 배가 꽤 무거울 겁니다.
금을 잔뜩 싣고 있을 거예요.”
“아,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오면 나를 만나려 할 거예요.”
“절대 만나시면 안 돼요.”
칼리굴라가 아무 말 없이 은으로 만든 작은 스푼으로 캐비어를 한입 가득 떠서 그대로 입에 넣었다.
아그리파가 반쯤 빈 잔에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침묵이 길게 느껴질 때 칼리굴라가 잔을 들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아그리파 님은 여동생 헤로디아에게 늘 당하는 거예요.”
눈을 감고 천천히 포도주를 입안에서 돌리며 맛있게 삼킨 후 그가 계속 말했다.
“그 배에 실린 황금 중 일부는 나에게 가져올 겁니다.
어쩌면 반 정도 될지도 몰라요.
작은 금액이 아닐 텐데 그걸 받아야지요.”
“아, 네….”
“그리고 이번에 같이 오는 루브리아라는 여자는 내 어릴 때 단짝 동무였어요.
그 여자를 앞세우고 오는 거니까 겸사겸사 만나야 해요.”
“아, 그러시군요. 저는 루브리아라는 여자가 그런 분인지 몰랐습니다.”
아그리파가 조금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은 마세요.
헤로디아가 어떤 음해를 하더라도 내가 막아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헤로디아가 황제를 만나면 돌아가신 빌립 왕의 영토를 헤롯왕이 같이 통치하게 해달라고 조를 겁니다.
걔가 어렸을 때부터 황제의 귀여움을 받아서 어쩌면 덜컥 승낙하실지도 모릅니다.”
그의 목소리가 초조했다.
“음, 그런 문제가 있군요.
거기는 앞으로 아그리파 님이 가야 할 땅인데….”
“네. 헤롯 왕이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30년 가까이 왕 노릇을 했으면 그만둘 때가 된 것을 알아야지요.”
“지금 거기 총독이 누구지요?”
칼리굴라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갔다.
“빌라도라는 군인계급 출신인데 세야누스가 4~5년 전에 보낸 사람입니다.”
“음, 나도 이름은 들은 기억이 납니다.
빌립 왕의 영토는 당분간 총독이 직접 다스리는 것이 좋겠다는 서신을 빌라도가 원로원으로 보내면 좋겠네요.”
아그리파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시간을 많이 벌 수 있지요.
설령 황제께서 아그리피나의 말을 들어주더라도 원로원에서 제동을 걸면 통과시키는 데 반년은 걸리니까요.
그런데 빌라도를 어떻게 움직이실 건가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에게 맡기세요.”
“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그리파가 고개를 숙였다.
“늙은 늑대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요.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네, 그렇긴 합니다만….
세야누스도 이제 없으니 카프리섬에 있는 우리 사람에게 늙은 늑대의 목을 졸라 버리라고 하는 것이….”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식당 입구에서 무언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쨍그랑 났다.
아그리파가 급하게 문을 열고 나가보니 조금 전 방에 있던 소녀 노예가 당황하며 깨진 그릇을 치우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그리파 님의 포도주잔을 가지고 오다 그만…”
“괜찮다. 미끄러우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나는 곧 갈 테니 안 가져와도 된다.”
그녀가 물러나자 자리로 돌아온 아그리파에게 칼리굴라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네, 염려 마십시오.
저 아이는 오늘 안으로 입을 영원히 다물게 하겠습니다.”
칼리굴라가 은 스푼으로 캐비어를 다시 입안에 살며시 집어넣었다.
*소설 바라바 300화까지 주요 등장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