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카잔은 이모와 함께 세겜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미트라교 교주의 딸 미리암이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확신이 든 후 그의 가슴은 방망이질치고 새로운 삶의 희망에 벅차올랐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보고 싶었으나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칠 우려도 있어서 이모와 먼저 상의했고 촌장과도 의논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나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 아이의 코에 작은 점이 있었어.”
말하며 걷는 이모의 발걸음이 칠십 노인답지 않게 가벼웠다.
카잔 일행을 맞은 촌장의 얼굴이 웃음을 띠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무거웠다.
“어서 오게. 이모님께 말씀 들었네.”
거실로 들어가니 포티나가 와 있었다.
그녀의 눈에도 무언가 슬픈 기색이 엿보였다.
“미리암을 찾았다는 소식에 포티나 님도 같이 상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촌장이 설명을 했고 카잔이 고개를 숙여 감사했다.
가까이서 그녀를 보니 울어서 부은 눈이었고, 그제야 카잔은 나사렛 예수의 소식을 포티나가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리암 생각에 골몰하여 다른 일은 전혀 신경 쓸 수 없었다.
“촌장님도 나사렛 예수의 소식을 들으셨지요?”
카잔이 먼저 그의 처형에 대한 화제를 입에 올렸다.
“어제 들었어….
비통한 심정이네.”
촌장의 낮은 목소리가 큰 거실에 퍼졌고 혼잣말처럼 계속했다.
“워낙 말씀이 놀랍고 혁신적이라 조마조마하긴 했었는데 결국 그런 화를….”
포티나의 눈이 금방 벌게지며 눈물이 글썽했다.
“자, 그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미리암 문제부터 상의하지요.”
촌장이 카잔을 바라보며 발언을 계속했다.
“아이를 찾은 것은 대단히 다행이고 기쁜 일이지만 그 아이, 미리암을 돌려받으려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 같소.”
카잔이 귀를 바짝 세우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선 그 아이가 카잔의 딸 미리암이라는 것을 우리 측에서 입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지….
또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해도 이세벨이 미리암을 자기가 낳은 아이라고 우기면 어찌해야 할지….”
촌장 말이 일리가 있었다.
두 가지 다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카잔이 일단 미리암을 만날 계획을 말했다.
“며칠 내에 그 아이를 샤론 여관 식당으로 가정교사가 데리고 나온다는데, 그때 제가 보면 더 확실히 미리암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코끝에 점뿐만 아니고 가족 사이는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 보면 알 수 있는 무언가가 피에 흐르고 있을 거예요.”
카잔은 레나가 말한 하늘의 별이 같은 성분이라 그렇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건 우리의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요.
그렇다고 다 큰 아이를 솔로몬이 했듯이 나누자고 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말이에요.”
이모가 끼어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미리암이 식당으로 나왔을 때 냉큼 데리고 어디로 가버렸으면 좋겠는데….”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포티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그건 문제가 많아요.
시몬이 가만있지 않을 거고 무엇보다 미리암이 충격이 클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납치돼서 어떤 남자가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한다면 얼마나 놀라겠어요.”
“음, 그 말을 들어보니 그러네.”
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선 이세벨이 11년 전에 미리암을 낳지 않았다는 증인이나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그때 그녀를 알던 사람을 주위에서 찾아볼게요.”
“감사합니다. 포티나 님”
카잔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다.
“천만에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저도 참 좋겠어요.
그동안 카잔 님은 이세벨이 모르는 미리암에 대해 뭔가 아시는 게 없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런 게 있어야 나중에라도 저쪽을 설득하기 쉬울 거예요.”
“네, 저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워낙 오래전이라….”
카잔의 고개가 숙여졌고 촌장이 입을 열었다.
“음, 여하튼 이 문제는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고 미리암이 살아있고 우리가 그 아이를 만날 수 있는 한 어떤 방법이 나올 겁니다.”
촌장 집 어린 하녀가 마실 것과 과일을 접시에 담아왔다.
잘 익은 무화과 열매를 카잔에게 집어주며 포티나가 물었다.
“예수 선생님 소식은 누구에게 들으셨나요?”
“미트라교 집회에 갔다가 시몬이 설교 중 언급해서 알았어요.”
다시 분위기가 침울해졌고 카잔이 계속 말했다.
“무장하지 않은 선지자는 나사렛 예수처럼 된다며 자기가 모세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주장을 했어요.
10년 사이에 놀랍게 변했더군요.”
“실은 예수 선생께서 여기 며칠 머무르실 때도 그 문제, 악에 대항해서 어떻게 투쟁해야 하느냐에 대한 말씀을 하셨어요.
처음에는 우리도 이해하기가 어려웠지요.”
촌장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그때를 회상하는 듯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처음에 그분의 말씀을 무저항주의로 생각했었지요.
악에 대항하지 말고 세상 권위에 복종하라는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예수 선생의 본뜻은 그게 아니더군요.
무저항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이었고 그것이 그분의 강력한 투쟁방법이었어요.”
촌장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카잔은 예전에 우연히 만난 예수의 그윽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꼭 한번 그를 다시 보고 싶었는데 이제 너무 늦어버렸다.
“선생은 불의에 대항하는 폭력 혁명을 찬성하지 않았지요.
그렇다고 악과 위선을 못 본 척하고 복종하는 것은 더욱 싫어하셨어요.
폭력 투쟁과 불의한 권력에 대한 복종, 보통 우리는 이 둘 중 하나를 택하며 살고 있는데 그분의 뜻은 강력한 비폭력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결국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허무한 최후를 맞게 된 것이 비폭력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카잔의 이모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촌장이 다시 말했다.
“그래요. 우리도 그 결과에 대해 참으로 마음 아파요.
하지만 선생의 비폭력 투쟁은 이러한 슬픔 가운데서도 이상하게 우리가 미처 몰랐던 가슴 속의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킵니다.”
포티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