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무스 대장은 루브리아가 무사히 돌아왔고 눈도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탈레스 선생의 말에 크게 안도하며 기뻐했다.
하지만 갑자기 루브리아가 헤로디아 왕비와 함께 카프리섬에 계신 황제 폐하를 만나고 또 로마로 칼리굴라 님을 만나러 떠나게 된 것을 알고 내심 불안했다.
왕비의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고, 그것을 알고 있는 루브리아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헤로디아를 따라나선 것이다.
아빠로서 바라는 그녀의 앞날은 명망 높은 가문으로 출가하여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최고 권력자의 근처에 너무 가까이 가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았다.
로무스 본인도 이번 로마 보안대장의 임기가 끝나는 몇 년 후에는 나폴리 근처에 있는 별장에서 은퇴하여 여생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전장에서 내일을 모르는 긴장 속에 시달리며, 30년이 넘도록 군인의 길을 걷는 것이 이제 좀 지치기도 했고, 루브리아에게 적당한 짝을 찾아주어 따스하고 평화로운 시골 생활을 여유롭게 같이하고 싶은 바람도 있었다.
원로원 위원 맥슨의 아들 맥슨 백부장도 후보자 중의 하나였고, 예루살렘 여행을 같이 보낸 것도 자연스럽게 그런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아직은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가까워진 것 같지는 않으나, 맥슨이 루브리아의 긴 여행 동안 경호 업무를 스스로 맡은 것으로 봐서는 좀 더 두고 볼 일이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루브리아가 들어왔다.
이제 눈에 대한 걱정이 없는데도 얼굴이 별로 밝지 않았다.
아마 긴 여행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준비는 많이 했니?”
“그럼요. 왕비님과 온천 목욕도 같이 했고 이제 내일 떠나면 돼요.
근데 탈레스 선생님은 아빠를 모시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음, 아직 네 눈이 좀 걱정되니까 이번 여행은 같이 가도록 해라.
뱃멀미가 심할 수도 있고…”
“아빠도 먼 여행을 하시는데 주치의가 옆에 있어야지요.”
“나는 다른 의사가 같이 가고 또 큰 도시에는 가는 곳마다 병원도 있으니 아무 걱정마라.”
루브리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로마에 너보다 며칠 늦게 도착할 거니까 그 안이라도 시간 되면 맥슨 백부장의 아버님께 인사드리도록 해라.
너를 보면 무척 반가워하실 거야.”
“네, 알겠어요. 아빠도 빨리 오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내일 빌라도 총독에게 인사하고 모레 떠날 거다.
아,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어제 온 정보인데 나사렛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서 없어졌고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있더구나.”
“어머, 그래요? 그게 사실일까요?”
“음, 글쎄…. 여하튼 그런 소문이 계속된다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별 상관이 없을 거다.”
루브리아의 크고 까만 눈이 어린 소녀같이 아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유대교를 만든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자기 민족을 탈출시킨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지금 그 종교의 역사가 되었듯이 선지자들의 이야기도 그렇게 되는 거지.
설령 전혀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염원과 소망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에게 다윗이나 모세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을 거야.”
“네, 그렇군요. 제가 만났을 때도 사람들이 그분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어요.”
“음, 어쩌면 나중에는 다윗 왕보다 더 높게 평가받을지도 모르지.
다윗은 그들의 역사에서 죽은 것이 확실하니까…모세도 그렇지만….”
루브리아는 골고다 언덕에서 그분의 고통받는 모습, 가시관을 쓰고 축 처진 얼굴이 떠오르며, 바람에 실려 작은 가시가 그녀의 눈을 치료해 준 따끔한 기억이 새로웠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순간이었다.
“근데 나사렛 예수가 그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요?
제가 그분을 만났을 때의 느낌은…”
루브리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영웅적인 인상이나 카리스마는 찾을 수 없었어요.
어쩌면 사람들이 그분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더 주인공의 생각이나 바라는 방향과는 다르게 전개되기 쉽지.
지금의 소문이나 기록이 점점 더 신비하게 포장될 테니까.”
“네, 그럴 수 있겠네요.”
루브리아가 까만 눈을 깜빡거렸고 로무스가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황제 폐하를 만나서 그분이 먼저 물어보시면 아빠 이름을 말씀드려라.
오래전 갈릴리 지역 전투에서 뵌 적이 있는데 기억을 하실지 모르겠다.”
“어머, 그러세요? 기억하시면 좋겠네요.”
“응, 그때는 참 대단히 용맹스러운 사령관이었지.
전술에도 뛰어나시고… 나중에 그분이 황제가 될 거라는 생각은 아무도 못 했었어.
본인도 당시에는 전혀 기대 안 했을 거야.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동생 드루수스가 있었으니까….
폐하의 친어머니 리비아 여사 때문에 후계자가 바뀌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어.”
“네. 그랬군요. 친아들이 아닌 양자가 황제가 된 거네요.”
“그렇지. 그런데 참 묘한 것은 그런 역사가 반복되고 있어.
티베리우스 황제도 친아들 드루수스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고 그전에 양자로 삼은 게르마니쿠스도 여행 중 급사했으니까…”
“아, 이름이 같은 두 분의 드루수스가 모두 그렇게 되셨군요.
제가 아는 칼리굴라 님이 게르마니쿠스 님의 아들이지요?”
“응, 셋째 아들인데 간신히 살아남았지.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큰 형은 모두 유배지에서 사망했지.”
“아, 그분들이 어떻게 모두 그렇게 되었나요?”
“응,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지. 티베리우스 황제”
“어머, 그렇게 무서운 분이셨군요.”
“지금도 원로원 의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황제에 대한 거부감이 많은데 그런 공포정치를 했기 때문이야.”
루브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만한 사건이 있기는 했었지….
게르마니쿠스가 급사한 이유가 황제의 지시에 의한 독살이라고 생각한 그의 부인 아그리피나와 큰아들이 게르마니쿠스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게르만 국경 수비대를 동원하여 황제를 몰아내려고 한 음모가 발각되었어.”
“왜 황제께서 게르마니쿠스를 죽이라는 그런 지시를 하셨을까요?”
“그런 지시를 실제로 했는지는 확실치 않아.
어쩌면 오해일 수도 있지만, 게르마니쿠스 같은 장군이 젊은 나이에 여행 중 식사를 한 후 급사한 것은, 황제가 자기의 친아들 드루수스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그랬다는 소문이 퍼졌지.
장군의 가족들은 그것이 틀림없다고 믿었을 거야.”
“네, 그래서 소문이 사실이 되고 전설이 역사가 되는 것 같아요.
여하튼 칼리굴라 님은 황제 폐하께 감정의 응어리가 크겠네요.”
“속으로는 당연히 그렇겠지.
소문이 사실이라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고, 아니라도 엄마와 형을 외딴 섬에 유배시켜 죽게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황제 폐하가 알면서도 칼리굴라 님을 후계자로 삼을 수 있나요?”
“음, 원래 권력이란 가족 간에도 피가 튀기는 잔혹한 속성이 있고, 다른 대안이 없다면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루브리아가 저절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