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의 집은 산헤드린 의원답게 예루살렘 서부 고급 주택가에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넓은 정원이 정문에서부터 펼쳐져 있는 하얀 돌로 만든 2층집이었다.
정문에서 나이가 60은 넘은 듯한 하인이 바라바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지금 손님이 계셔서 의원님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부탁할 말씀이 있으시면 이름과 주소를 써서 나를 주세요.
대개 열흘 안에 약속 시간을 알려드립니다.”
말하는 자세는 비교적 공손했다.
해방 노예나 하인은 주인의 성품을 닮는다는 말이 있는데 니고데모의 평판도 괜찮을 성싶었다.
“저는 바라바라고 하는데 의원님께 서신을 전해드려야 합니다.
좀 기다리더라도 잠깐 뵐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어느 분의 서신인가요?”
“산헤드린 의원인 이삭 님의 서신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하인이 미심쩍은 눈으로 다시 한번 바라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분은 지금 안토니아 요새 감옥에 계실 텐데요?”
“제가 그분과 같은 감방에 있다가 며칠 전에 나왔습니다.”
“아, 그러면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그가 종종걸음으로 들어갔고 정원 오른쪽에 한 줄로 심은 키가 큰 야자나무 위에서 보이지 않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신선한 바람이 불면서 향긋한 꽃내음이 풍겨왔는데 정원 가운데 심은 노란 난초에서 나는 향기인 성싶었다.
바라바는 자유인이 된 것을 새삼스레 느끼며 가슴을 펴고 길게 숨을 들여 마셨다.
잠시 후 하인이 나오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넓은 거실을 지나 집무실 같은 방으로 들어가니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크고 수려한 용모의 30대 남자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가 니고데모입니다.
이삭 님의 서신을 가지고 오셨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악수를 하는 니고데모의 손이 부드러웠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여기 이분은 산헤드린 의원인 요셉 님입니다.”
눈썹이 진하고 금빛 술을 단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싱긋 웃었다.
나이는 니고데모보다 몇 살 많은 듯 보였다.
자리에 앉은 후 바라바가 품 안에서 서신을 꺼내 니고데모에게 주었다.
서신을 읽는 그의 눈동자가 분주히 움직였다.
하얀 옷을 입은 하녀가 감귤 차를 한 잔 바라바의 앞에 놓고 나갔다.
“이삭 님은 여전하시군요.
제가 요즘 면회도 통 못 가보고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바라바 님.”
바라바도 고개를 숙이며 같은 뜻을 표했다.
“차가 식기 전에 드세요. 저희는 조금 전에 마셨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차에서 박하 향기가 은근히 스며 나왔다.
바라바가 차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니고데모가 서신을 다시 한번 보았다.
“음, 이삭 님과 같은 감방에 있다가 며칠 전 풀려났다면….
혹시 이번에 빌라도 총독의 특사로 풀려난 바라바 님입니까?”
찻잔을 천천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바라바가 말했다.
“네, 제가 그 바라바입니다.”
순간 앞에 있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니고데모가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예수 선생님 대신 특사를 받은 분이 누군가 했더니 이렇게 만나는군요.
실은 지금 우리도 돌아가신 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니고데모가 계속 말했고 바라바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우리가 예수 선생님의 시신을 몰래 옮겼다는 소문이 시중에 돌고 있어요.
아리마대 요셉 님의 가족무덤에 그분을 모셨는데, 어제 우리도 가보니 정말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어떻게 된 걸까요?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말도 있다던데….”
“네. 저도 그런 소문을 들었습니다.”
잠시 또 한번의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저희는 이번에 예수 선생님이 특사를 받으시길 바랬는데, 갑자기 바라바라는 사람이 혜택을 받게 되어 은근히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이런 알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바라바, 아니 바라바 님이 오래전 예수 선생님의 크나큰 계획 아래 들어와 있었을 것 같네요.”
옆에서 듣고만 있던 요셉이 굵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래요. 그분의 계획을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생을 우리 별장에서 다음에 모일 로고스 클럽의 연사로 모시려 했었어요.
날씨도 따스하고 바람 없는 날을 골라서, 별장 정원의 포도 넝쿨 아래에서 모이려고 했는데, 그 별장 건너 바위 무덤에 그분을 장사 지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또 무덤이 비게 되니 우리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렵네요.”
니고데모가 고개를 몇 번 끄덕인 후 바라바를 보며 화제를 바꾸었다.
“이제 그럼 바라바 님은 고향으로 돌아갈 건가요?”
바라바가 잡혀 있는 동료들을 위해 칼로스의 요청으로 사마리아 세겜으로 먼저 간다고 설명했다.
“칼로스 천부장은 나도 얼마 전 헤로디아 왕비의 파티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총독과 부인의 신임이 상당히 두텁다고 들었어요.
잘 풀리면 좋겠네요.
그날 헤로디아 왕비와 천부장 사이에 앉은 로마 여인이 레코더를 잘 불어서 칼로스도 감탄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로무스 근위대장의 딸이라고 하더군요.”
“아, 그날 루브리아 님이 레코더 연주를 했나요?”
“네, 그 여자의 이름이 루브리아인가 봐요.
바라바 님과 잘 아는 사이인가요?”
“아, 아닙니다. 무슨 일로 만난 적이 좀 있습니다.”
바라바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녀의 레코더 소리가 갑자기 들리는 듯했고, 어느 화창한 봄날 공원의 벤치에서 만난 일들이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지금 사마리아인들은 우리에 대한 감정이 더욱더 악화돼 있을 거예요.”
요셉의 목소리가 바라바의 생각을 흔들어 깨웠다.
“네, 그리고 어쩌면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민족 분쟁이 크게 일어날 것 같아요.
어디가 먼저 터질지 알 수 없네요.”
“알렉산드리아에서 터지면 거의 전쟁 수준이 될 겁니다.
그리스인 50만과 유대인 50만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어떤 계기만 있으면 폭동이 일어나 수만 명의 사상자는 쉽게 나겠지요.”
“그럼 어떻게 되나요?”
바라바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결국, 로마 황제가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가 문제지요.
유대민족을 위한 정치 외교적 경륜이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인들은 한때 그 지역을 지배했던 민족이고, 유대인들은 더 이상 그리스인들을 인정하지 않으니 감정적인 대립이 커지고 있어요.”
“모든 것이 그야말로 로마로 통하는군요.”
바라바의 머릿속에는 로마로 가고 있는 루브리아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