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집안이 텅 비어 있었고 오반도 보이지 않았다.
가구는 그대로 있는데 테이블 밑에 숨겨둔 은전은 없어졌다.
레나와 유리의 옷이 없어진 걸로 봐서 누가 그들을 납치한 것은 아니고 제 발로 집을 나간 성싶었다.
그런데 왜 오반이 같이 없어졌을까….
이것들이 내가 없는 사이에 짝짜꿍이 되어 같이 도망을 쳤나?
하지만 오반이 그럴 리가 없다.
우르소도 옆에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혹시 오반이 유리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가 유리 모녀를 어떤 함정에 빠뜨렸는지도 모른다.
유리가 애타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얼마나 상심이 되었을까….
그녀가 집안 어딘가에 메모나 무슨 사인을 남겨 놓았을 법도 했다.
마나헴과 우르소는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탁자 위의 먼지로 봐서는 적어도 1주일은 아무도 살지 않은 집 같았다.
다시 들어가 본 오반의 방은 옷가지가 하나도 없이 깨끗했다.
“혹시 오반이 먼저 집을 나간 것은 아닐까요?”
우르소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어이가 없어서 대답도 안 하고 복도로 나오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바짝 긴장을 하며 나가보니 키가 큰 젊은이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마나헴을 위 아래로 한번 살펴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점성술 보시는 분인가요?”
당장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꾹 참고 물었다.
“젊은이는 여기 처음 왔소?”
그가 뒤에 서 있는 우르소를 보더니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며칠 전에도 왔었는데 아무도 없어서 오늘 다시 왔걸랑요.”
“그 며칠 전이 며칠 전인가?”
젊은이는 잠시 눈을 위로 뜨면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유월절 전이니까 4~5일 되었네요.
제 친구가 여기에 점성술을 아주 잘하는 인도 아줌마가 있다고 해서 왔었는데 오늘도 안 계시나요?”
“응, 오늘 안 나왔네.”
마나헴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유월절 연휴라 어디 가셨나보네요.
내주에는 나오시겠지요?
제 약혼녀가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자취를 감춰서 너무 답답해서 찾아왔어요.
내 주에 또 올게요.”
젊은이의 말이 마나헴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오지마. 이 집 이제 문 닫았어.”
얼굴이 시뻘게져서 소리를 지르자 젊은이가 기겁을 하고 나가버렸다.
한 번 화가 치솟자 마나헴의 생각은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흘렀다.
아무래도 유리가 지난번 만났던 삼촌이라는 콧수염과 야반도주를 했고, 오반은 처벌받을 게 무서워서 사라진 듯 했다.
그때 더 확실히 닦달을 했어야 했는데, 인간이라는 족속은 믿어주고 잘해주면 남자나 여자나 배신을 잘하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마나헴은 입술을 앙다물고 우르소에게 지시했다.
“지금 당장 나가서 시장 앞에 있는 마차꾼들을 조사해봐.
일주일 전쯤에 여자 두 사람이 옷을 잔뜩 싣고 탔다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겠지.”
급하게 나가는 우르소의 뒤통수에다 한마디 덧붙였다.
“우선 집 정면 위에 쓴 ‘점성술’이라는 글씨부터 지워버려.”
아무래도 레나 모녀에게 끝까지 희롱당한 것이리라.
마나헴은 분노가 치밀면 왼 무릎의 통증이 심해졌다.
지금도 슬슬 아파오기 시작하는데 우르소가 슬며시 다시 들어왔다.
“어느 글씨가 ‘점성술’ 인지 잘 몰라서요…."
마나헴이 벌떡 일어나다가 무릎이 아파서 다시 앉았다.
황제는 요즈음 어머니를 꿈에 자주 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4년 정도 지났지만 처음 몇 년간은 전혀 나타나지 않으시다가 몇 달 전부터 4~5일에 한 번씩 보이신다.
그녀는 로마제국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아내로 오랜 기간 수많은 내전과 안토니우스와의 마지막 결전을 남편과 함께 힘들게 겪어낸 로마의 여성 영웅이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어머니 리비아는 남편 아우구스투스가 서거하고 13년 후, 8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원로원은 그녀의 업적을 기리고 명예를 높이기 위해 리비아 황후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고 추앙하기로 의결하였다.
그녀의 남편에 뒤이어 그녀도 작은 신이 된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낳은 아들이 로마의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근엄한 황제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황제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오래전 배신의 기억으로 시작되었다.
그가 세 살 때 어머니 리비아는 티베리우스의 친아버지를 버리고 장래가 촉망되는 시저의 양아들, 당시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가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진 충격으로 우울하고 외로운 소년으로 자란 티베리우스는, 철이 들면서 세상 여자들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혔고 70대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오래전 부인의 방탕함으로 파국을 맞은 결혼생활 이후, 어떤 여자도 주위에 오래 두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카프리섬 동쪽 끝, 깎아 세운 높은 절벽 위에 세운 ‘빌라 쥬피터’에 은거한 황제는 수영장 옆에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 며칠 사이 따스해진 남풍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여기에 은거하고 있지만, 황제로서의 모든 권력은 철저히 행사하고 있었다.
의붓아버지 옥타비아누스가 이룩한 ‘팍스로마나’의 위엄을 계승하여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고, 시민들에게 충분한 양식을 공급해 주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젊었을 때 여러 전장을 누빈 그는 스스로 뛰어난 마차 경주자이고 검투사로의 자격이 있었지만, 이것을 시민들의 유흥에 활용하여 인기를 얻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이러한 성격을 싫어하는 원로원 위원이나 시민들도 많았지만, 내실을 다져서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고, 외교에도 빈틈이 없는 통치가 그의 권위를 계속 굳건히 했다.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입술이 두터운 소녀 노예가, 반쯤 누워서 팔을 내린 황제의 손톱을 손질해 주고 있을 때 흰옷을 입은 보좌관이 조용히 다가왔다.
“폐하, 유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의 부인인 헤로디아께서 폐하를 알현하기 위해 곧 이곳으로 떠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황제의 근엄한 얼굴에 잔주름이 더 많이 보였다.
“응, 내가 오라고 했어.
언제쯤 도착할 예정인가?”
“네, 알렉산드리아에서 나폴리 항까지 바람이 좋으면 열흘 이내에 오니까, 유대 욥바 항구에서 떠나도 비슷하게 걸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늙은 황제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