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모두 편한 마음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맥슨 백부장도 루브리아가 실명 위기를 넘긴 소식에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는 내일 카이사레아로 돌아간 후 카프리섬과 로마 여행에서도 본인이 계속 루브리아의 호위를 맡으며 동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루브리아의 생각에도 그게 좋을 듯했고 유타나가 특히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탈레스 선생님, 우리 아가씨의 눈이 그렇게 고쳐진 것은 아무래도 예수 선생이 하신 일이 아닐까요?
그때 바람이 그쪽에서 불어오기 직전에 십자가의 그분이 눈을 떠서 아가씨를 바라본 것 같았어요.
그렇지요, 아가씨?”
유타나가 탈레스와 루브리아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탈레스는 아무 말도 안 했고 루브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분의 눈이 분명히 나와 마주쳤으니까 그것이 우연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분이 나에게 하신 말씀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
“무슨 말씀인데요?”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지.”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데 어떤 젊은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식탁으로 다가왔다.
네리였다.
그의 얼굴에는 슬픔과 낙담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 있었다.
“다 끝났어요.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어요.”
“우리가 돌아온 후에 곧 그렇게 되셨나요?”
사라가 물었고, 네리는 앞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설명을 시작했다.
“사라님이 떠나신 후 사형을 집행하는 병졸들이 예수 선생의 통옷을 벗겨 나누어 가졌어요.
햇볕이 뜨거워지자 그들은 십자가가 만든 긴 그늘로 들어가 포도주를 마시고 한바탕 주사위 놀이를 하더군요.
그러던 중 갑자기 해가 어두워지고 바람이 더 세차게 불기 시작했어요.
다시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자리를 뜨려던 제사장들도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죠.”
네리가 물 한 모금을 더 마신 후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어려서 들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혹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람산을 쳐다보았어요.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에 서시면 산의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큰 골짜기가 된다.’라고 했거든요.
저 혼자 느꼈는지는 몰라도 땅이 조금 흔들리는 것도 같았어요.
하지만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날은 계속 어두웠고 병사들은 일어나 외투를 걸쳐 입었어요.
십자가에 달린 선생의 얼굴이 점점 더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그의 상체와 머리가 앞으로 자꾸 늘어졌다 세워졌어요.
이런 시간이 한없이 계속되는 듯 느껴지니 그 장소를 벗어나고 싶더군요.
주위를 돌아보니 저 건너편에 요한 형과 살로메님의 얼굴도 눈에 띄었어요.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아버지는 무력하거나 무심했어요.
이렇게 계속 두세 시간이 지났는데 선생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어요.”
네리가 고개를 한번 숙였다 천천히 들고 말했다.
“갈릴리 방언으로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타니’라고 하셨는데 저는 금방 알아 들었지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이었어요.
사람들은 ‘엘로이’를 ‘엘리야’로 잘못 듣고 선생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또 조롱했어요.
그리고 잠시 후에 예수께서 다시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시더니 숨을 거두셨어요.”
네리의 고개가 또 숙여졌고 사라는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확실히 돌아가신 건가요?” 유타나가 물었다.
“네, 사형집행을 확인하는 백부장이 긴 창으로 선생의 옆구리를 깊이 찌르니까 핏물이 많이 흘러 나왔어요.
잠시 후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부하 병졸들이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린 후 손과 발의 못을 빼서 연장통에 다시 던져 넣더군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사라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나요?”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사십 대 남자 두 명이 선생의 시신을 인도 받았어요.
산헤드린 의원 같았는데 자기네 묘지에 장례를 치른다고 했어요.”
“누굴까…. 산헤드린 의원 중에 그런 사람들도 있네.”
“네, 고마운 분들이에요.
내일이 안식일이라 시신을 나무에 계속 달아 놓을 수 없어서 그분들에게 내어 준 것 같아요.
안식일이 아니었으면 며칠 걸려 있게 해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줬을 거거든요.
이후 사람들이 대부분 흩어지기 시작했고 저도 이리로 왔어요.”
네리의 설명이 끝났지만 분위기는 계속 숙연했다.
잠시 후 사라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음, 그분이 왜 마지막에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타니’라고 하셨을까?”
“저도 그 말씀이 자꾸 생각나요.”
네리가 얼른 말했다.
“혹시 선지자들의 기도문이나 시를 읊으신 걸까요?”
“다윗왕이 쓴 시 중에 그렇게 시작하는 부분이 있지만 아닐 거예요.
전날 밤 예수 선생님이 게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땅에 엎드려 기도하는 소리를 제가 들었잖아요.
얼마나 간곡히 이 고난을 면하게 해달라고 하던지, 저도 하나님이 그분의 기도를 결국 들어 주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끝까지 남아서 자리를 지킨 거고요….
아, 그런데 서 있던 사람들은 선생이 작은 목소리로 옆에 같이 못박힌 사람들과 몇 마디 대화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숨을 거두기 전에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셨대요.
바람 소리가 심해서 저는 못 들었나 봐요.”
“요한님은 다시 못 만났나요?”
“나중에는 요한님과 갈릴리에서 온 여자분들이 저보다 앞쪽에 서 계셔서 안 만나고 그냥 왔어요.
참 루브리아님이 눈에 뭐가 들어갔는데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사라가 가시나무의 가시가 박혀서 루브리아의 눈이 치료된 이야기를 그에게 해 주었다.
네리가 눈이 휘둥그래지며 루브리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럼 루브리아님의 눈이 치유된 것이 나사렛 예수가 이 땅에서 보인 마지막 기적인가요?”
네리의 질문에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고, 탈레스 선생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아는 지식은 기적과 우연을 정확히 가르기에 충분치 않아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만약 기적이 짧은 시간에 제한된 장소에서 일어난 우연한 일이라면, 우리 각자의 삶도 그 자체로 모두 기적이지요.”
오늘따라 선생의 머리칼에 흰머리가 반 이상 되는 듯 보였다.
루브리아가 조금 피곤하여 슬슬 일어나려고 하는데 식당 입구로 헤로디아 왕비의 시녀장이 하얀 옷을 입고 들어왔다.
“루브리아님, 여기 계셨군요.
왕비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되었으니 내일 오전 열 시에 왕궁으로 와서 같이 떠나자고 하시며 카이사레아 온천에도 들리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드려 주세요.”
내일 해가 뜨면 바라바님이 나올 테니 그를 보고 가면 될 것이다.
시녀장이 물러가자 식당 안 사람들이 루브리아의 얼굴을 슬쩍슬쩍 쳐다보았다.
*스가랴 14장 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