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앉아도 될까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네, 그럼요. 유다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그가 대답 없이 앉으며 네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유다님, 조금 피곤해 보이시는데 아침 많이 드세요.”
사라가 상냥하게 말했고 네리가 먼저 무교병과 삶은 달걀을 시켰다.
유다가 종업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살과 피를… 아니, 빵과 포도주를 주세요.”
아침부터 술을 시키는 손님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이 젊은 청년은 어제 저녁때 아래층에서 본 거 같은데…”
유다의 정신은 멀쩡했다.
네리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네, 맞아요. 제 옆에 있었어요.
근데 유다님, 어제 일찍 나가셔서 어디 가셨나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어요. 이제 연극이 거의 끝나가요.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 올라갔다 다시 오는 일만 남았어요.”
사라가 네리와 눈을 한번 마주친 후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
“어제 저녁 만찬에서 선생님이 우리에게 그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었어요.
이 땅에서 받는 마지막 선물이고 우리 몸속에 영원히 남을 깨달음이지요.”
유다가 테이블 위의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계속 말했다.
“저도 그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은혜를 입었어요.
그 후 제가 할 가장 훌륭한 역할을 선생이 지시했고, 이제 제 일은 끝났어요.”
“모든 것이 연극이라면 예수 선생도 곧 풀려나고 사람들이 다시 그를 따르게 되나요?”
사라는 지금 자기가 한 말이 자기가 듣기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네, 하지만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에 다녀오신 후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따르게 되지요.
앞으로 몇백 년 아니 몇천 년이 지나도 따르게 될 거예요.”
식당 종업원이 음식을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유다의 손이 빵보다 술잔으로 먼저 향했다.
살짝 한 모금 마신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선생은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 주었어요.
그러한 상징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거고, 이제 곧 십자가에서도 다른 사람을 구하며 죽을 거예요.
그분의 최대 업적은 이러한 사랑의 밀알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 준 거지요.
지금 다른 제자들은 모두 저를 저주하고 비난하겠지만 저만큼 선생을 알지는 못해요.”
유다는 빵을 한 조각씩 천천히 떼어 먹기 시작했다.
“유다님은 그럼 어제 저녁 중간에 나가셔서 게세마네에 오신 후 밤새 나사렛 예수 선생을 따라 다니셨나요?”
네리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응, 그랬지요.
그리고 유다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한 일의 결과를 확실히 알아야 하니까.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갔다가 빌라도에게, 거기서 헤롯에게 보내진 후 지금 빌라도에게 다시 가고 있을 거야.
이제 빌라도도 어쩔 수 없겠지….”
“유다님은 결국 선생님을 배신한 제자 아닌가요?”
“그게 내 할 일이었으니까… 쓴잔을 마시게 도와주는 역할.
그걸 다 알면서도 선생은 내 발을 씻어주었지… 그의 살과 피도 주셨고…”
“그럼 선생님은 벌써 유다님을 용서하셨나요?”
사라가 얼른 물었다.
“네, 그럼요.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하시지요.”
유다의 창백한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잠깐 스쳤다.
먹던 빵 하나도 다 먹지 않은 채 그가 겉옷 속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었다.
“이것은 제가 선생께 보내는 편지입니다.
언젠가 선생이 이 땅에 다시 오시면 사라님께서 전달해 주세요.”
“이걸 제가 받아도 될까요?”
유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유다님은 이제 어디로 가시려고요?”
“나중에 마태님이 쓴 글을 보면 알게 될 거예요.
모두 예언대로 이루어져야지요.”
그는 들어올 때처럼 소리 없이 나갔다.
나사렛 예수가 다시 왔다는 보고를 받고 빌라도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헤롯이 그의 권위를 인정해주니 내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로마의 권력을 쥐고 있던 그의 후원자가 실각한 후 빌라도는 매사를 조심하며 무사안일주의로 일관했다.
정치적 힘을 믿고 난폭하게 굴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던 사람일수록 배경이 없어지면 더 풀이 죽는 법이다.
예전 같으면 신경도 쓰지 않던 직속상관 시리아 총독도 요즘 자신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가야바도 물론 이런 변화의 조짐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정문 앞에 있다.
한 발자국이라도 빌라도의 관저에 들어서면 유월절을 망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유대인들의 행동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런 군중이 축제를 빙자한 민족주의 감정에 휩싸이면, 순식간에 큰 소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빌라도는 다시 정문 앞으로 나갔다.
“왜 또 왔나요?
이 사람의 문제는 유대교 내부 문제니까 여러분끼리 알아서 처리하세요.”
“이 죄인은 유대 율법으로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또 로마 황제를 무시하고 자기가 왕이라고 주장하는 반역죄도 범했습니다.
사형 집행은 총독의 권한이라 우리가 이자를 끌고 온 것인데, 아까는 헤롯왕께 보내시고 지금도 이러시면 이제는 시리아 총독께 탄원하겠어요.”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제사장이 무리 앞에 서 있다가 강하게 반발했다.
틀림없이 가야바가 시킨 것이리라.
“음, 그럼 일단 죄인을 이 안으로 들여보내시오.
내가 직접 심문을 좀 더 해 보겠소.”
빌라도가 이렇게 말하고 얼른 안으로 사라지자 로마 병사 네 사람이 포박된 예수를 관사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집무실로 돌아온 총독은 유대인들의 풍습을 잘 아는 칼로스 천부장을 즉시 불렀다.
“저 사람들은 왜 이렇게 집요하게 예수라는 자를 죽이려 하는가?”
칼로스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나사렛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그들에게 신성 모독죄에 해당합니다.”
빌라도가 얼른 다시 물었다.
“그건 나도 들어서 알고 있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신성 모독죄를 지은 유대인을 간혹 자기들 맘대로 돌로 쳐서 죽이는 사형을 집행했었는데….”
“네, 사실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투석 처형하면 큰 부작용이 우려 됩니다.
많은 유대인들 사이에는 ‘의인은 늘 고난 받고, 참 선지자는 순교한다’라는 사상이 뿌리 깊게 있는데 투석 처형을 하면 예수가 자칫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고 그의 인기가 높아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군중의 반발을 극히 염려합니다.
반면에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그들의 율법서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 것도 있나?”
“네, 모세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라고 말했는데 그렇게 처형해서 예수가 메시아를 사칭하여 사형을 받은 것으로 널리 알리려는 의도입니다.”
고개를 끄떡인 후 빌라도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 들은 기억이 나는구먼…”
재판을 담당하는 덩치 큰 비서관이 들어와 예수가 대기 중이라고 보고했다.
빌라도가 재판정으로 자리를 옮겨 높은 의자에 앉았다.
아까보다 더 몰골이 나빠진 중년 남자가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그의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