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에는 오늘 바람이 일었고, 나사렛 예수의 눈동자는 더욱 깊어만 갔다.
아무래도 이 땅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자신의 뜻대로 아버지가 해 주시지 않아도 모든 것을 넉넉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넓은 벌판에 양떼가 자유로이 풀을 뜯어 먹는 어느 따스한 봄날, 낮은 언덕에 올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목자는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 설교하던 생각, 갈릴리 바닷가에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배 위에 올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축복한 후 다 같이 식사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갈릴리 호수
그의 고뇌에 찬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으나 곧 사라졌다.
선생을 따르는 사람 가운데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가 말하는 진심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적과 빵만을 따라 움직이는 군중인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이제 곧 환란이 닥치면 모두 흩어질 것이다.
제자들도 예외는 아닐 텐데 그들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다.
그를 따르는 여성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나사렛 예수의 가장 큰 두려움은 곧 닥칠지 모를 예언서의 말씀이었다.
끔찍한 고통과 치욕이 그를 기다리며 노리고 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지만, 때때로 엄습하는 공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어차피 해야 할 일을 차분히 진행해야 한다.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당부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 교훈을 남겨 줘야 한다.
선생의 뜻을 어렴풋이 짐작하는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베다니 마리아 정도다.
오늘 여기 모이는 사람들은 내일 유월절에 큰 기적이 발생해 메시아로서 선생의 위상이 예루살렘 성전에 우뚝 솟을 때, 그 옆에 같이 있으려고 오는 것이다.
또한, 생각이 서로 다른 열두 제자도 나름대로 예언서의 성취를 위해 맡은 일을 하는 것을 선생은 알고 있었다.
“선생님, 다녀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들어와 성내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의 주인을 만나 저녁 만찬 장소를 준비했다고 보고했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선생의 얼굴이 고요히 빛나는 듯 보였다.
촛불이 꺼지기 전에 한 번 환하게 그 빛을 발하는 것을 제자들은 알 수 없었다.
방에서 나오며 베드로가 말했다.
“선생님이 기분이 괜찮으신 것 같네.
어제 누가 가져온 좋은 포도주도 가지고 가세.”
“네, 저는 성내에서 어머니와 같이 먼저 만날 사람이 있으니 나중에 올 때 베드로 님이 직접 가지고 오세요.
수산나 님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베드로가 입맛을 다시고 수산나를 찾으러 갔다.
헤로디아는 오전에 프로클라를 만나러 안토니아 탑에 가려던 계획을 잠시 미루었다.
그녀가 서신을 전달해 달라는 칼리굴라의 여동생 드루실라에 대한 소문이 심상치 않았다.
미녀로 소문난 그녀를 칼리굴라가 이미 누이동생이 아니라 결혼 상대로 여기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헤로디아 본인도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 그녀의 두 삼촌과 차례로 결혼했지만, 친형제와 결혼하는 것은 고개가 저어졌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10살 어린 남동생과 결혼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쓰러져 가는 프톨레미 왕조를 지키려는 의미가 있었다.
왕비는 어제 받은 서신을 찾아 꺼내었다.
프로클라의 인장이 찍힌 엄지손톱만 한 자주색 촛농이 서신을 봉하고 있었다.
헤로디아는 촛농의 반대편, 서신의 표면을 시녀가 가져온 뜨거운 물통에 지그시 대며 눌렀다.
몇 번을 끈질기게 반복하자 촛농이 저절로 톡 떨어졌다.
어린 시절 볼모 아닌 볼모로 로마에 있을 때 이집트 왕족에게 배운 솜씨였다.
촛농 인장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놓고 서신을 펼쳐 보았다.
< 드루실라 님, 오랜만에 소식을 드립니다.
유대에 와 있는 프로클라예요.
빌라도 총독과 제가 이 땅에 온 지도 벌써 5년이 되었네요.
드루실라 님도 벌써 19살이 되셨으니 어려서부터의 총명함과 아름다움이 이제 백합꽃처럼 활짝 피셨겠지요.
제가 로마에 있으면 1년에 몇 번은 뵐 수 있었을 텐데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유대민족은 ‘야훼’라는 유일신을 믿는 특이한 민족인데, 그들과 몇 년 같이 지내다 보니까 머리가 우수하고 단결력이 강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야훼’라는 이름도 ‘제우스’ 같은 신의 이름이 아니고 사람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내는 소리가 그대로 신의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자연스럽고 인간의 삶과 직결된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지요.
그러고 보니 숨을 들이쉬면 ‘야’, 내쉬면 ‘훼’ 소리가 나는 듯도 하네요.
유대인 중 우수한 사람들을 로마로 데려다 잘 교육하면 앞으로 우리가 이 땅을 통치하는 데 도움이 될 인재들로 키울 수 있을 겁니다.
드루실라 님, 저는 오래전 게르마니쿠스 장군님 댁의 가정교사로 있었던 일을 평생의 즐거움이자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빌라도 총독도 이곳의 임무를 끝내고 로마에 계신 칼리굴라 님의 곁으로 돌아가게 되면, 작은 일이라도 온 힘을 다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날이 빨리 와서 드루실라 님을 자주 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우스신과 유대의 신 야훼께 간곡히 기원해 봅니다.
그럼 드루실라 님의 앞날에 행복과 영광이 함께 하시기를 빌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유대 예루살렘에서 프로클라 드림 >
편지는 안부를 전하면서도 은근히 로마로 돌아가고 싶은 총독 부부의 심경을 잘 전하고 있었다.
세야누스가 실각해 힘이 빠지니까 이제 칼리굴라를 잡으려는 수작이 틀림없었다.
이런 중요한 서신을 자기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는 프로클라가 순진한 건지 모자란 건지 아리송했다.
여하튼 이 기회에 드루실라도 만나서 그동안 아끼던 보석 세트를 몇 가지 전달하고 친분을 쌓아 놓으면 좋을 것이다.
헤로디아가 촛농 봉함 인장을 조심스럽게 다시 붙이려고 따스한 물통에 대려는 순간 시녀장이 급히 들어왔다.
헤로디아는 제풀에 깜짝 놀랐다.
“프로클라 님이 보내신 시녀가 왔는데 어제 받으신 서신을 잠깐 다시 달라고 하시네요.
추가로 쓰실 말씀이 있다고요.”
촛농 봉함은 붙이기가 훨씬 어려웠다.
특히 본인의 인장을 프로클라가 보고 훼손되거나 뗀 흔적을 발견하면 큰 낭패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고 했나?”
시녀장이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 전에 성전 시찰 나갔다고 해.
저녁 늦게 돌아온다고…. 누가 와도 그렇게 말해.”
왕비의 신경질에 시녀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얼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