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호텔은 유월절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제사장들과 각국에서 몰려든 순례자들로 붐비던 로비는 한산하기만 했다.
예루살렘은 축제 기간의 거룩한 도시에서 평화의 도시로 바뀌었다.
살렘이 평화란 뜻이지만 오직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그렇다는 뜻이다.
사라는 호텔을 나와 네리가 알려 준 요한 일행의 은신처로 향했다.
헤롯 대왕이 지은 왕궁을 지나 동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니 눈앞에 감람산이 보였다.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감람나무가 무성하게 푸른 잎을 더해 가는 성싶었다.
네리가 알려 준 집은 시내 남부 빈민가 골목에 있었다.
문을 살며시 두드렸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잠시 후에 조금 세게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집을 잘못 찾아왔나 생각하는 순간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사라 님, 저를 따라오세요.”
돌아보니 네리가 어느새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가니 뒷문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있었다.
집안은 생각보다 넓었고 바리새인 복장에 머리가 하얀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인사하세요. 사라 님, 이분이 글로버 선생님이세요."
여윈 얼굴에 턱수염을 단정히 기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글로버 선생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나도 반가워요. 사라 양이 곧 올 거라고 네리가 말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바라바는 같이 안 왔나요?”
글로버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바라바 오빠는 안토니아 감옥에 동료들을 면회하러 갔어요.
선생님이 여기 계시는 걸 알았으면 같이 올 걸 그랬네요.”
“음, 바라바를 만나면 긴히 할 말이 있었는데 사라 양이 좀 전해 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인가 하고 사라가 긴장한 눈빛으로 선생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선생님께서 내게 서신을 보내셨어요.
선생님의 동생이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자산을 관리해 금융업을 크게 하고 있는데 최근 원로원에 ‘바라바 예수’의 이름으로 올라온 청원서를 보고 필로 선생님께 알려드렸어요.”
글로버가 목을 한번 가다듬고 계속 이어 나갔다.
“선생님께서 청원서의 내용이 유대인의 생활에 직결되는 성전 여행 허가와 성전세 인하 문제인 것을 아시고 이 안건을 발의한 바라바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시면서 한번 만나고 싶어 하세요.”
“어머, 그러시군요. 필로 선생님이 도와주시면 큰 힘이 되겠습니다.
그럼 바라바 오빠가 알렉산드리아에 가야겠네요.”
“지금 거기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큰 충돌이 생겨서 분위기가 아주 안 좋아요.
그리스인들이 유대인 회당을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해안가의 고급 주택에 사는 유대인들을 쫓아내고 있어요.
선생님도 조만간 로마에 가실 예정이니까 시간을 맞추어 로마에서 만나자고 하시네요.”
글로버의 말을 들은 사라의 가슴이 철렁했다.
바라바 오빠는 결국 로마로 가게 되는 운명이었고 이쯤 되면 아무리 애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네. 그러면 좋겠네요. 제가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사라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 청원서가 통과되도록 선생님의 동생분이 벌써 원로원 의원들과 접촉을 시작했어요.
선생님도 직접 원로원 의원들을 만나실 예정인데 결국 황제의 최종 결심이 중요하니까 황제도 알현하게 될 거예요.”
“그러면 바라바 오빠도 같이 황제를 만나겠네요?”
“청원서를 낸 장본인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지금쯤 루브리아 언니가 카프리섬에서 황제를 만난 후 로마에 도착했으리라 생각하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사라가 여기 온 목적이 생각나서 네리에게 물었다.
“요한 님은 안 계신가요?”
“잠깐 누구를 만난다고 나가셨어요. 아마 곧 오실 거예요.”
“음, 그럼 조금 기다려 봐야겠네. 그런데 이 집은 꽤 넓은데 누구 집인가요?”
“야고보 님이 아는 분 집인데 벌써 모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곧 옮겨야 해요.”
“아, 나사렛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님….
나도 베다니에서 만나 뵌 적이 있어요.”
“네, 그분은 지금도 저 안에 있는 골방에서 기도하고 계세요.
나중에 나오시면 인사하세요.
기다리시는 동안 제가 대추야자를 좀 가지고 올게요.
지난번 사라 님과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먹던 맛있는 대추야자예요.”
“자네는 나에게는 안 주고 사라 양이 오니까 좋은 음식 생각이 났나?”
글로버 선생의 농담에 얼굴이 빨개진 네리가 얼른 일어나 음식을 가지러 나갔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사라가 입을 열었다.
“지금 저 안에서 야고보 님은 무슨 기도를 하고 계신가요?”
“글쎄요. 내가 잘은 모르지만 예수 선생을 따르는 새로운 모임에 하나님이 함게하시기를 기원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벌써 그를 ‘의로운 사람 야고보’라고 부르고 있어요.”
사라는 자기가 하나님께 바라바 오빠와 맺어지기를 얼마나 기도했었나 생각해 보았다.
별로 간절히 한 적은 없어도 최근에는 다시 그런 기대 섞인 기도를 하긴 했었다.
“기도는 믿음이 깊고 의로운 사람이 하면 더 잘 이루어지겠지요?”
글로버 선생이 별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어렸을 때는 하나님이 제 기도를 잘 들어주셨어요.”
“어떤 기도였나요?”
네리가 대추야자를 쟁반에 가지고 들어와 선생에게 먼저 권했다.
“아빠가 잠시 무슨 일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어요.
면회를 갔더니 땅콩이 먹고 싶다고 하시는데 시장에 땅콩이 몇 달간 나오지 않았어요.
그날 밤 기도를 열심히 하고 다음 날 시장에 갔더니 고소한 햇땅콩이 새로 나온 거예요.
참 기쁘고 놀라웠어요.”
통통한 대추야자 한 개를 손에 쥐어 들고 선생이 사라에게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감사한 일이네요.
나는 대추야자를 먹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사라 양 덕분에 먹게 돼서 더욱 감사해요. 하하.”
옆에서 네리가 같이 웃었고 사라가 다시 말했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아직은 어딘가 계신 것 같은 아빠에게 기도할 때가 많아요.
그렇게 안 계신 부모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해도 되나요?”
“아, 사라양의 아버님이 열성당의 사무엘 님이라고 들었어요.
훌륭한 분이셨지요.”
글로버가 숨을 한번 깊게 내쉬고 계속 말했다.
“누구나 안 계신 부모님께 기도할 수 있어요.
사무엘 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 것 같은 게 아니라 실지로 계세요.”
사라의 반짝이는 눈빛이 선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바로 여기 계시지요. 사라 양의 몸속에….”
네리가 무슨 소리인가 하고 사라를 바라보았다.
*필로: BC30 ~ CE 45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이며,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사용하여 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