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술잔을 드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으나 시간이 좀 지나고 황제의 얼굴이 눈에 익으니 루브리아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왕비가 가지고 온 대추야자가 반가웠다.
황제의 별실은 아늑했고 한 면이 기념품과 작은 흉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식사를 하며 루브리아의 눈길이 그쪽으로 자주 향하는 것을 본 황제가 입을 열었다.
“오른쪽 위에 있는 금색 트로피가 내가 50년 전 올림픽 레슬링에 나가 우승해서 받은 거요.”
노인의 목소리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어머, 올림픽에서요. 그때는 폐하가 20대 초반이셨네요.”
루브리아는 말을 하고 보니 황제가 지금 칠십 노인이라는 것을 강조한 듯해서 불안했다.
“그랬지. 마치 어제의 일 같은데 50년이 흘렀소.”
황제가 개의치 않고 루브리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는 아직 결혼을 하기도 전이었지.
인생이 언뜻 스쳐 간 그림자 같고, 연못에 뜬 물거품 같다더니 그 말이 맞구려.
모두 꿈속에 꿈이었소….”
노인이 연한 자주색 수정 술잔을 들어 붉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중앙 큰 칸에 있는 비너스 흉상은 리시푸스의 작품이오.
이미 4백 년 전 하얀 대리석을 저렇게 진흙 주무르듯 만진 조각가들은 참 대단하지.
얼굴도 살아 있는 듯하고 얇게 걸친 상의도 진짜 천보다 부드러워 보여요.”
“네, 폐하. 정말 그렇습니다. 저도 리시푸스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루브리아는 바라바의 가게에서 비너스 상을 처음 보던 때가 떠올랐으나 곧 노인의 목소리에 집중해야 했다.
“나폴리 포도주도 좋아한다고 했지요?”
“네, 폐하”
노인이 술잔을 들어 루브리아의 술잔과 가볍게 마주쳤다.
“폐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어제 입었던 자주색 드레스에 진주목걸이를 한 루브리아가 말했다.
“고맙소. 내가 우스운 소리 한마디 하리다.
백 세가 된 노인의 생일 파티에서 친구들이 물었소. 후회되는 일이 뭐냐고.’”
노인이 잠시 말을 멈추고 루브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크고 까만 눈동자를 깜빡거리던 그녀가 고개만 갸우뚱했다.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으면 건강에 신경 좀 쓰며 살걸!”
노인의 말에 루브리아가 소리내어 웃었고 그 모습을 노인이 미소로 바라보았다.
“빕사니아도 이렇게 웃었지…. 내가 똑같은 농담을 했을 때….”
긴장이 풀린 루브리아가 황제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전형적인 로마인의 크고 오뚝 솟은 코가 위엄이 넘치는데 얼굴이 조금 짧은 편이라 독수리를 연상케 했다.
처음에는 강인하고 냉정한 분위기가 풍겼으나 오늘 보니까 밝고 따스한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 이분이야말로 누구보다 권력의 희생양이란 생각에 동정심마저 생겼다.
“나는 내가 인기 없는 황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노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20년이 좀 넘는 기간, 나는 로마시민들은 거의 처형하지도 않았고 재산을 몰수하지도 않았소.
그럼에도 내가 서민들이 열광하는 전차 시합이나 검투사 시합 같은 각종 오락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은 나를 싫어하오.
그동안 우리의 국경도 튼튼히 지켜지고 식량부족도 없는 세월이 계속되니까 사람들은 자극적인 흥미 거리를 찾고 있지.
내가 여기서 은둔하며 간접 정치를 하니까 엉뚱한 소문도 나지만 나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오.
오직 로마제국의 평화가 더욱 튼튼한 반석 위에 오르는 것이 나의 목표이자 바람이오.”
황제가 루브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본 후 계속 말을 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공포정치를 한다고 비난하며 두려워한다오.
15년 동안이나 근위대장으로 수족처럼 부렸던 세야누스를 얼마 전 숙청한 후 그런 말이 더 많아졌지.
물론 그동안 내가 국가 반역죄로 재판에 넘긴 사람만 60명이 넘고 그중에는 원로원 의원들도 많소.
하지만 거의 자기네들끼리 서로 고발한 경우가 대부분이지….
재판 결과에 절망한 나머지 명예와 가족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자살한 사람도 많소.
동맥을 끊거나 스스로 음식을 안 먹고 죽는 경우도 있고….”
루브리아는 황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자기에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원로원 의원 중 평민들의 신망을 받으며 로마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행동하는 의원들은 반도 안 돼요.
나머지는 모두 사리사욕에 집착하고 과거의 공로만 계속 내세우고 있지.
앞으로 그들의 수를 대폭 줄일 계획이오.
세네카 선생 같은 사람이 몇 사람 더 들어가서 참신한 바람을 일으키면 좋을 텐데….”
“유대인 중 뛰어난 사람이 많은데 그들도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나요?”
루브리아의 입에서 무심코 나온 질문이었다.
황제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음, 원로원 위원은 로마 시민권이 있어야 하는데 유대인은 시민권자가 별로 없어요.
외국인이 시민권자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로마 군인으로 일정 기간 복무하는 건데 유대인은 국방의 의무가 면제돼 있기 때문이오.”
“네,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폐하”
노인의 설명이 끝나자 생선요리가 나왔다.
생선과 조개를 같이 먹는 맛이 새로운 별미였고 바싹 구운 빵도 잘 어울렸다.
“간혹 의사나 교사 중 공로가 인정되는 사람은 외국인이라도 특별 시민권은 주는 경우가 있지.
혹시 루브리아 양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나요?”
“아닙니다. 폐하. 제가 유대 땅에 좀 있다 보니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노인이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갑자기 밖에서 천둥이 몇 번 크게 치더니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이 생선 접시를 거의 비운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리시푸스의 비너스상 옆에 비어 있는 공간이 있는데 이제 거기에 알맞은 흉상을 놓을 수 있게 되었소.”
무슨 소리인가 하고 루브리아가 장식 벽면을 쳐다보니 비너스상 옆에 상당히 큰 공간이 비어 있었다.
“내일 로마로 떠날 예정이지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폐하. 그렇습니다.”
루브리아의 크고 까만 눈이 노인을 향했다.
“여기서 한 달만 더 머물러 주면 좋겠소.
빕사니아의 흉상을 그동안 10개도 넘게 만들었는데 모두 깨뜨려 버렸지.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조각가들은 눈으로 보지 않으면 제대로 못 만들더군.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루브리아의 까만 눈동자가 조금 더 커졌다.
천둥소리가 다시 멀리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