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와 중요한 안건은 거의 다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빌립의 땅을 당장 흡수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시간만 지나면 해결된다.
노인은 한 번 언약한 일은 바뀌는 법이 없고, 이번에 보니 앞으로 3년이 아니라 10년은 문제없이 버틸 건강이었다.
노인의 마음을 알아낸 것도 큰 수확이었다.
그는 세 사람의 후계자 중 가장 어린 게멜루스에게 확실히 기울어 있었다.
칼리굴라에게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통쾌한 것은 아그리파를 혼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감옥에서 몇 년 썩으면 다시는 헤롯왕의 권좌를 넘보지 못할 것이다.
황제가 루브리아를 이곳에 더 있게 한 것은 의외였다.
누구의 부탁이라고 거절을 하랴.
사실 황제의 부탁은 모두 명령이 아니던가.
노인이 루브리아를 보자마자 빕사니아를 닮았다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하는데 칼리굴라에게 소개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정말 여자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여하튼 그동안 루브리아에게 공을 들인 보람이 있었다.
왕비는 자기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황제가 루브리아가 아니고 자신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나이는 헤롯왕보다 열 살 정도 많지만 젊어서부터 검투사 훈련을 받고 전장에서 단련된 황제가 더 늠름하고 남자다웠다.
이런 생각을 하자 헤로디아의 눈앞에 지난번 풀어 준 바라바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젊고 잘생긴 그와 다시 한번 은밀한 만남을 가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루브리아의 청을 못 이기는 척하고 들어준 것은 두 여자 모두를 위해 참 잘한 일이었다.
노인은 루브리아가 카프리섬에 더 머무르라는 말을 본인이 직접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따로 만찬을 하게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세네카와 대화를 좀 하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만찬장으로 향했다.
어제 입은 옷보다 가슴이 좀 더 파인 주홍색 드레스에 화려한 루비 목걸이를 걸쳤다.
뒤에서 시녀장이 하얀 보자기에 무언가를 싸서 왕비를 따랐다.
세네카와 노미우스가 둥그런 식탁에 앉아 있다가 그녀를 보고 일어났다.
왕비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기타라 연주가 들리기 시작했다.
“헤로디아 왕비님, 축하드립니다.
폐하께서 왕비님 말씀은 다 들어주시네요.”
“호호, 노미우스 실장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린 시녀가 수정으로 만든 투명한 잔에 하얀 포도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세네카가 자기의 잔을 들고 왕비를 향해 말했다.
“제가 건배를 해도 될까요?”
“영광입니다. 세네카 님”
헤로디아가 한껏 고혹적인 눈웃음을 보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유대민족의 지도자이시며 로마제국의 든든한 후원자이신 헤롯 전하와 여기 계신 헤로디아 왕비님께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바입니다.
로마의 제우스 신과 유대의 여호와 신의 은총과 지혜가 왕비님께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을 기원합니다.”
헤로디아가 팔을 뻗어 술잔을 세네카와 노미우스의 잔에 부딪혔다.
“제가 어제는 폐하와 같이 있어 긴장도 되고 깜빡 잊은 것이 있는데 오늘은 미리 꺼내 놓을 테니 애피타이저로 좀 드셔 보세요.”
왕비가 벽 쪽에 떨어져 서 있는 시녀장에게 눈짓을 했다.
그녀가 하얀 보자기를 벗긴 후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여니 자주색 대추야자가 잔뜩 담겨 있었다.
단내가 금방 사방에 진동했다.
“여리고에서 가지고 온 대추야자예요.
꿀을 타지 않았는데 꿀보다 더 달지요.”
왕비가 은으로 만든 작은 꼬챙이로 하나씩 찍어서 세네카와 노미우스에게 주었다.
“아, 대추야자는 여리고 산이 세계 최고라는데 왕비님 덕분에 먹어보네요. 감사합니다.”
노미우스가 황제가 없으니 어제와 다른 사람처럼 계속 싱글거리며 말했다.
“입맛에 맞으시면 제가 계속 보내 드릴게요. 매년 이맘때가 제일 맛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왕비님.
이 대추야자는 디저트로도 좋을 듯한데 지금 별실에서 식사하시는 폐하도 드시고 계신가요?”
“네, 제가 루브리아에게 준비해서 좀 드리라고 했어요.
역시 실장님은 늘 폐하 생각이네요.”
“당연하지요. 제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분이니까요.
그런데 지금 루브리아 양은 폐하와 무슨 말씀을 나누고 있나요?”
노미우스가 불쑥 물어본 말에 왕비가 얼른 대답을 못 했다.
“아, 왕비님도 잘 모르시나 보네요.
저는 폐하의 심기까지 경호해야 하니까 여쭤봤습니다.
혹시 제가 미리 준비할 일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네, 그럼요. 무슨 일이든 실장님께 제일 먼저 알려드려야지요.
제가 폐하를 3년 만에 뵈었는데 앞으로 10년은 문제없으시겠어요.”
헤로디아가 화제를 노인의 건강으로 돌렸다.
황제가 루브리아를 빕사니아로 생각하여 이 섬에 살게 할 거라는 말을 미리 할 필요는 없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네카 님이 뵙기에는 어떠신지요?”
얼굴을 돌려 대추야자 씨를 은그릇 통에 떨어뜨리고 세네카가 입을 열었다.
“10년이 아니라 20년은 끄떡없으시겠어요.
폐하는 지금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시고 모든 일에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십니다.
노인들은 대개 근육 손실로 넘어지거나 거동이 불편한데 그런 기미는 전혀 없으시지요.”
“그럼요. 일주일에 3~4번씩은 아령으로 근력운동을 하세요.”
“역시 그러시군요. 또 중요한 것은 나이를 먹으면 머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돼서 판단력이 흐려지는데 폐하는 더욱 예리하고 영민해지시는 듯합니다.
항상 책을 가까이 두고 읽으시는 습관과 어떠한 정치적 문제도 순리에 어긋나지 않게 깊이 생각하시는 훈련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10년을 바로 옆에서 모신 저보다 폐하를 더 잘 아시네요.”
노미우스가 감탄하며 세네카를 쳐다보았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다만 제가 아는 한, 머리도 근육과 같이 계속 단련을 시키면 능력이 커집니다.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한 분들은 장수했지요.
약 600년 전 피타고라스 선생은 91세까지 살았고, 에베소의 대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선생은 96세, 아테네의 학교 선생이자 웅변가였던 이소크라테스 선생은 98세까지 장수하셨어요.”
헤로디아가 두 잔째 마신 포도주로 약간 불그레해진 얼굴을 끄덕였다.
“정말 그러네요. 폐하께서도 90세 이상 사셨으면 좋겠어요.”
“네, 틀림없이 그러실 겁니다.
그리고 로마역사에 제국의 기틀을 단단히 세우신 황제로 영원히 기억되시겠지요.
지금 로마의 재정 흑자가 건국 이래 제일 많습니다.
다음 황제가 되실 분은 제우스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는 분임이 틀림없습니다.”
세네카가 포도주를 한 모금 입안에서 돌리며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