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황제가 고개를 끄덕인 후 세네카를 바라보았다.
“선생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네, 폐하. 저는 유대 땅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책으로 본 상식으로는 같은 생각입니다.
다만 폐하께서 이미 지적하셨듯이 유대교가 그들의 법과 일상생활을 모두 지배하고 있는바, 종교의 해석이 다른 경우 큰 분쟁이 일어날 위험은 상존한다고 사료됩니다.”
세네카가 잠깐 주위를 돌아본 후 계속 말했다.
“특히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은 민족이었으나 오래전 시리아 민족과 혼혈이 되면서 유대인들의 멸시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사해 오른쪽의 나바테아 왕국, 남쪽으로는 에돔인들이 민족의 정체성과 종교들이 조금씩 다름으로 언제든지 군사적 도발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어머, 세네카 님은 한 번도 안 가 보시고 훤하시네요.
폐하, 실은 나바테아가 대규모 군사를 국경에 집중 배치하고 호시탐탐 유대를 공격한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헤로디아가 황제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였다.
“아, 그런 상황인가?”
노인의 시선이 노미우스를 향했다.
“저도 그런 정보를 듣기는 했습니다만 함부로 침공은 못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혹시라도 오판해 군사적 행동을 못 하도록 폐하께서 헤롯왕이 다스리는 지역에 대한 확고한 지지 성명을 발표해 주시면 더욱 안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황제가 삶은 버섯을 몇 조각 먹은 후 말했다.
“그럼, 경호실장이 성명서 초안을 만들어서 내일 보고하도록 하시오.”
노미우스가 고개를 숙였고 헤로디아의 중요한 안건 중 하나가 쉽게 넘어갔다.
모두 말없이 식사를 계속하는데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세네카 선생은 에스파냐 출신이지요?”
“네, 폐하. 코르도바가 고향입니다.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로마제국 서쪽 끝으로는 지상의 마지막 땅 에스파냐가 있지요.
북으로는 브리튼 남부를 점령했으나 후퇴했고 동쪽으로는 게르마니아의 라인강을 제국의 방어선으로 삼고 있소.
이것은 선대 황제께서 로마제국의 국경선으로 정해 주신 경계선인데 이 안에서 우리는 로마의 평화를 모든 민족에게 보장해 주고 있소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노인은 찬찬히 잔을 들어 건배했다.
“로마제국의 평화를 위해….”
모두 잔을 들어 황제와 눈을 마주쳤다.
천천히 포도주 한 모금 마시고 그가 말을 계속했다.
“제국의 질서를 해치는 침략행위는 용납돼서는 안 되지요.
나바테아가 유대를 침공해 로마가 이룩한 평화를 깨뜨리는 일은 내가 황제로 있는 한 일어나지 않을 거요.
또한 유대 총독 빌라도가 군사력을 함부로 사용해 현지인들을 핍박하고 살해하는 일도 없을 것이오.”
“사마리아나 에돔 지역도 마찬가지인가요?”
왕비가 슬쩍 물었다.
“물론이오. 자기네들끼리는 싸우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볼 때는 모두 제국 안에서 평화를 누려야 하는 다 같은 구성원들이오.”
“폐하의 은덕이 마치 하늘의 해가 모든 사물을 비추듯이 제국의 방방곡곡으로 두루 퍼지고 있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영원할 것입니다.”
세네카가 감동한 듯한 목소리로 황제를 찬양했다.
헤로디아가 느끼기에 노인은 빌라도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다.
“폐하, 세네카 선생의 말씀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었습니다.”
왕비가 노인의 눈치를 보며 계속 말했다.
“그런데 세네카 선생은 천재적 시인으로도, 웅변가로도 널리 알려졌는데 원로원의 재무관까지 하시면 정치에도 입문하시게 되네요.
축하드립니다. 원로원의 정치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가겠습니다.”
“모두 폐하의 은덕일 뿐입니다.”
세네카가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왕비가 모르는 척 다시 물었다.
“지금 원로원의 재무관이 누구시지요?”
“칼리굴라 님이십니다.”
세네카의 간단한 대답이었다.
“아, 게르마니쿠스 장군님의 아드님이시지요.
여기 루브리아 양이 어렸을 때 칼리굴라 님과 같이 게르마니아 전장에서 자랐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헤로디아가 노인의 반응을 살폈다.
황제가 손을 뻗어 앞에 놓인 포도주잔을 드는데 거의 빈 잔이었다.
식탁 위로 몇 발짝 떨어져 서 있던 술 시종이 황급히 다가와 붉은 포도주를 따랐다.
“여기 있는 삶은 버섯을 누가 제일 좋아하셨는지 아시는가?”
엉뚱한 질문이었다. 왕비가 얼른 대답을 못 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셨네. 그분은 평생을 기름진 음식을 드시지 않았지.”
노인이 화제를 바꾼 것으로 봐서 칼리굴라에 대한 언급을 하기 싫은 것이다.
루브리아를 칼리굴라와 맺어주자는 이야기는 오늘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몸에도 별로 맞지 않으셨지만, 항상 술을 자제하시며 절제된 삶을 사셨네.
선대 황제께서는 원래 건강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 섭생에 대단히 신경을 쓰셨는데 거의 채식을 하셨지.”
“아, 그러셨군요. 저는 엄청 힘이 세고 용맹하신 장군님으로 생각했어요.”
루브리아의 말에 황제가 크게 웃었다.
헤로디아는 그가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당황해서 얼굴이 발개지는 루브리아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길이 다정했다.
“용맹한 장군은 따로 있었소.
'아그리파'라는 황제의 오른팔이었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물리쳐서 로마제국을 통일한 일등 공신인데 황제보다 훨씬 일찍 세상을 떠났소.
선대 황제와 내가 항상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정말 부러운 것은 아그리파같이 유능한 장군이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것이었소.”
술을 좀 해서 그런지 노인의 독백 같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람들이 내가 잔인한 공포정치를 한다고 뒤에서 비난하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또 어떤 사람들은 늙은 황제가 카프리섬에 대형 수족관을 만들어 어린 소녀들을 데리고 음탕한 놀이를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지요.”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하게 가라앉았다.
“어떤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나도 짐작하는 바가 없지 않소.
이번에 로마에 가서 그 소문의 진원지를 헤로디아 왕비가 좀 알아보시오.”
노인의 말에 헤로디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로마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평화를 누렸던시기를 말하는데,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시기부터 시작되어서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 Augusta)'라고도 함.
대체적으로 BC 27년에서 CE 180년까지의 기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