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를 알현하고 나온 왕비와 루브리아는 황제 전용 실외 목욕탕에 들어갔다.
물은 적당히 따스해서 편안했고, 탕 안에서 바로 보이는 탁 터진 전망은 카프리섬이 육지와 거의 붙어있는 듯한, 바다가 짧아지는 느낌을 주었다.
드디어 황제 폐하를 만났다는 생각에 긴장감이 풀리면서 루브리아는 온몸이 나른해졌다.
눈을 감으니 바로 바라바 님의 얼굴이 나타났다.
지금쯤은 갈릴리 가버나움에 계실 것이다.
처음 비너스 흉상을 찾다가 만난 가게서부터, 안토니아 감옥 문이 열리며 혼자 걸어 나오는 모습이 떠올랐다.
“빕사니아가 누군지 모르지?”
헤로디아 왕비가 루브리아의 상념을 깨뜨렸다.
“네, 처음 듣는 분인데요. 누구시지요?”
“폐하의 첫 번째 부인이셨지.”
“어머, 그러세요?”
루브리아의 크고 까만 눈이 더 동그랗게 커졌다.
“40년 전 일이라 나도 어렸을 때였는데 그분의 얼굴이 루브리아와 정말 비슷하네….”
왕비가 당시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의붓아버지인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티베리우스를 자기 딸과 결혼시키려고 강제로 두 사람을 갈라서게 했고, 그 충격으로 빕사니아는 배 속에 있던 둘째 아이를 잃었다.
억지로 맞이한 황제의 딸 율리아는 천성적으로 방탕해 다른 남자들을 침실로 끌어들이는 행태를 되풀이했다.
이런 소문이 널리 퍼지자,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두 사람의 이혼을 허락했고 자기 딸 율리아를 간통죄로 종신 유배형에 처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빕사니아 님이 낳은 첫 번째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응, 그분이 드루수스 님인데 10년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
루브리아는 노인 황제의 얼굴에서 언뜻 보이던 고뇌와 고독의 그림자가 다시 느껴졌다.
“폐하는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불행한 분이네요.
가정의 행복은 전혀 없으셨겠어요.”
헤로디아가 따스한 물을 어깨에 뿌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자기 딸을 유배시키고 황제는 비로소 티베리우스 님을 후계자로 세우셨어.
그것도 게르마니쿠스 님과 공동 후계자로….
다시 말하면 잠깐 황제를 한 후 젊고 인기 있는 게르마니쿠스에게 물려 주라는 뜻이었지.”
“아, 그러니까 게르마니쿠스 님의 독살을 지시한 사람이 티베리우스 황제라는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겠네요.”
“그렇지. 아마 칼리굴라 님도 틀림없이 그렇게 확신하고 있을 거야.”
“황제 폐하를 자기 아버지의 원수로 생각하며 후계자도 돼야 하니까 상당히 머리가 복잡하겠네요.
이번에 만나면 어떻게 변하셨을지 궁금해요.”
왕비가 아무 말을 안 하고 욕탕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나왔다.
바로 옆에 침대 모양의 하얀 대리석 위에 두툼한 상아색 큰 타월이 깔려있었다.
그녀가 거기에 배를 대고 엎드리며 루브리아에게도 나오라고 눈짓했다.
아직 여름은 아니지만 날씨는 적당히 따스했고, 얼굴이 까만 소녀 안마사 두 명이 나타나서 안마를 하기 시작했다.
얼굴을 왕비에게 돌리고 루브리아가 물었다.
“아까 정원에서 본 대리석 여신상은 누구인가요?”
“그 분이 바로 리비아 님이시지.”
왕비가 짧게 대답했다.
역시 로마제국의 황제도 나이를 먹을수록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런 심정을 간파해 백 달란트를 자연스럽게 건네주었으니 헤로디아의 첫 번째 목표가 성공했다.
다리를 안마받으며 누워있는 왕비의 모습에서 느긋함이 엿보였다.
오늘 저녁에 만찬을 황제와 같이 하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으리라.
소녀 안마사가 루브리아의 허리를 자근자근 주물러 주니까 그동안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카프리에서 3일 정도 머문 후 로마로 떠나면 아빠보다 며칠 일찍 로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아빠에게는 왕비와 같이 황제를 만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미리 걱정하시게 할 필요는 없었다.
왕비의 속셈대로 황제의 눈에 들어서 칼리굴라 님과 정식으로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그때 알려 드려도 될 것이다.
칼리굴라 님의 첫 번째 부인이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그런 논의 자체가 시기상조일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일은 루브리아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을뿐더러 언젠가는 바라바 님과 함께 카프리섬이나 로마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행운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칼리굴라의 아내가 될 수밖에 없더라도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는 지워질 수 없는 사랑과 그리움이 감추어진 보물처럼 간직돼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바라바 님을 생각하며 미소 지을 수 있으면 행복할 것이다.
왕비가 마사지를 끝내고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루브리아도 서둘러 일어났다.
가운을 걸치고 귀빈 숙소로 앞서 걸어가는 왕비를 따라갔다.
“루브리아, 그러면 조금 이따 연회장에서 만나. 내가 준 목걸이 하면 이쁠 거야.”
“네, 왕비님. 알겠습니다.”
숙소로 돌아온 루브리아에게 유타나가 말했다.
“오늘 저녁 만찬에 이 자주색 옷을 입으시라는데요.”
가슴이 깊게 파인 고급 파티복이었다.
“누가 그래?”
“황제 폐하 시녀장이 조금 전에 이 옷을 주면서 폐하의 분부라고 꼭 입고 나오시라고 했어요.
근데 자세히 보니까 꽤 오래된 옷 같아요.
상당히 고급옷이긴 한데….
한번 얼른 입어보세요.”
루브리아가 입어보니 허리가 약간 작지만 큰 무리는 없었다.
왕비가 말한 목걸이를 하니까 굵은 진주가 영롱한 빛을 발하며 자주색 옷과 아주 잘 어울렸다.
반지도 세트로 끼고 한 바퀴 돌아보았다.
유타나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왕비님 같으세요. 아니 왕비보다 더 높은 사람이 뭔지 모르지만,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황제 폐하가 어떻게 아셨을까….”
루브리아도 침대 옆에 있는 청동 전신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았다.
생각보다 자주색 옷이 마음에 들었고 오래전 유행 스타일이지만, 어딘가 상당히 품위 있는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언뜻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폐하의 첫 번 부인이신 빕사니아 님이 입던 옷 아닐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응, 아니야. 탈레스 선생님과 맥슨 백부장은 만찬에 참석 못 하지?”
“네, 처음에는 참석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인원을 줄인 것 같아요.
저도 혹시 멀리서라도 황제 폐하를 볼 수 있을까 했는데 꿈 깨야겠어요. 호호.”
루브리아가 다시 한번 거울에 뒷모습까지 비춰보았다.
항해 중 운동은 못 하고 식사를 많이 해서 그런지 엉덩이가 빵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