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주피터’ 입구는 온통 초록색 잔디가 카펫처럼 깔려있고, 여기저기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이 까만 돌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니 눈에 잘 띄는 중앙 화단에 하얀 여신상이 서 있었다.
그 옆에 작은 분수대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지나가면서 자세히 보니 분수대 중앙의 돌사자 입에서 맑은 물이 퐁퐁 솟구치고 있었다.
본관 건물은 그리스 이오니아식으로 지은 직육면체의 2층 건물이었다.
외벽은 온통 베수비오산 채석장에서 잘라 온 하얀 대리석이었고, 2층 바다가 보이는 창문이 큰 방이 아마 황제 폐하의 집무실인 듯했다.
1층에는 창문이 안 보이고 출입문밖에 없는 것 같은데 문에는 성문을 부수는 쇠몽둥이의 공격에도 견딜 수 있게 무쇠 빗장과 쇠못이 박혀 있었다.
문을 열고 넓은 홀을 지나 붉은 카펫이 깔린 손님 대기실에 들어갔다.
실내장식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검소한 느낌마저 들었다.
귀족들의 저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아로 만든 탁자도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헤로디아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엿보였다.
잠시 후 노비우스 천부장이 조용히 들어왔다.
“폐하께서 지금 올라오시랍니다.”
황제의 집무실로 올라가는 원형 계단은 레바논에서 나는 백향목으로 만들어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느껴졌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소파 건너편 긴 책상 위에서 한 노인이 일어났다.
로마제국을 20년 넘게 통치하고 있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모습이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헤로디아에게 다가왔다.
걷는 모습이 이상하게 검투사같은 느낌을 주었다.
넓은 어깨와 곧바로 펴진 허리에서 70대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왕비가 한쪽 무릎을 꿇어 예의를 갖추었고 루브리아도 옆에서 따라 했다.
황제가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일어나라고 하는데 손가락에 누런 황제 인장 반지가 루브리아의 눈에 들어왔다.
왕비가 미리 주위를 줘서 루브리아는 아무 반지도 끼지 않았다.
황제와 악수할 경우를 대비해서 누구도 반지를 끼고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반지에 독침을 숨기는 술법으로 로마 내전 시 적장을 살해한 사건 이후의 관례였다.
가까이서 본 황제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뺨과 입가에 많은 풍파를 겪고 이겨낸 깊은 주름이 권위를 더해주는 듯했다.
“헤로디아 왕비, 어서 오시오.”
표정이 별로 없는 얼굴이지만 목소리는 따스하게 느껴졌다.
“폐하를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이 늙은이야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소이다.”
말을 마치고 루브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린 황제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헤로디아가 얼른 소개했는데도 황제의 눈은 계속 루브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루브리아가 당황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로무스 대장은 지금 로마로 가는 길이겠지요?”
황제는 루브리아의 신분은 물론 로무스의 행적까지도 훤히 알고 있었다.
“네, 폐하. 아버님은 며칠 후에 로마에 도착하실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가 루브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잡아본 그의 손은 대단히 크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황제가 곧 헤로디아에게도 악수를 청한 뒤 책상 앞 소파에 가서 앉았다.
양쪽으로 왕비와 루브리아가 앉자마자 흰옷을 입은 소녀 노예가 마실 것을 가지고 들어왔다.
모든 것이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서 진행되는 듯싶었다.
차에서는 제비꽃 향내가 은은히 퍼져 나왔다.
“폐하,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몇 년 전 리비아 국모님의 문상을 이제라도 허락해 주십시오.”
왕비의 음성이 조금 떨려 나왔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어머니가 헤로디아를 몇 살 때부터 돌봐 주셨던가?”
“제가 여섯 살 때부터입니다. 친할머니 같으셨지요.”
황제의 어머니 리비아는 로마가 점령한 각국의 왕자나 공주들을 한곳에 모아 교육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나중에 그들이 각 나라로 돌아가 로마의 문화와 법질서를 전승하는 것이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음, 선착장에 내린 물건이 문상을 위해 가져온 것이군….”
왕비가 배에 실은 2백 달란트의 금괴 중 반을 내렸는데 이것도 보고받은 것이다.
황제에게 부탁할 안건이 많은데 우선 이것을 받아주느냐가 선결문제이다.
노인의 침묵이 순간 길게 느껴졌다.
“왕비와의 개인적 인연을 생각해서 받도록 하겠네….
다만 백 달란트 모두 익명으로 리비아 자선재단에 기증하려 하는데 괜찮겠소?”
자선재단은 오래된 전란으로 넘쳐나는 전쟁 유족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제공하기 위해 30년 전 설립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만년에 부인 리비아의 청을 받아들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했고 아직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네, 물론입니다. 폐하. 국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헤로디아의 얼굴이 환해지며 목소리도 밝게 변했다.
“카프리섬에서만 나는 야생 제비꽃 차예요. 좀 마셔봐요.”
황제가 루브리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먼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왕비와 루브리아도 얼른 잔을 들었다.
연한 노란색이 카모마일 차와 비슷했다.
긴장이 조금 풀린 루브리아가 차를 마시는 황제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피부는 어렸을 때 여드름이 많이 났었는지 좀 거칠었고, 양미간에 세로로 난 깊은 주름이 오랜 세월의 풍파를 말해주었다.
가늘고 깊은 눈은 강하고 치밀한 성품을 느낄 수 있었다.
“루브리아는 나이가 몇 살인가요?”
“25살입니다. 폐하”
루브리아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황제의 눈이 다시 지그시 감기고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했다.
헤로디아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노인의 침묵을 깨지 못했다.
정면의 하얀 벽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이 걸려 있었고, 그 독수리도 노인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음, 내가 빕사니아와 헤어질 때 그녀의 나이도 25살이었지….”
황제가 눈을 뜨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머, 그러고 보니까 정말 똑같이 생겼네요!”
루브리아를 바라보는 헤로디아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