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마나헴이 생각보다 일찍 세겜을 떠났다.
식당에서 여로암을 유리로 착각할 정도로 황소 놈이 정신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청약수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청약수를 많이 마시면 헛것이 보인다는 소문도 사실로 확인되었다.
두스의 말에 의하면 마나헴이 미트라교에 관심이 많았고 세겜시 지도를 구매했다고 한다.
나중에 유리의 행방을 끝까지 추적하려는 듯싶었다.
그래도 일단 한고비는 넘어갔다.
이제 미리암을 되찾는 일과 카멜 수용소의 나오미를 구출해야 하는데 두 가지 다 이세벨 부주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미리암을 납치하지 않는 한 엄마로 돼있는 그녀를 만나서 설득해야 한다.
카멜의 나오미도 수용소장과 연결하려면 이세벨을 통하는 게 최선이다.
“아무래도 미트라교에 카잔 형님이 헌금을 좀 많이 하셔야겠어요.”
누보가 카잔에게 계속 말했다.
“그렇게 접근해서 우선 카멜 수용소장을 소개받으면서 일을 진행하도록 하지요.”
“내가 그런 돈이 있어야지.”
“제가 은전을 찾았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그건 앞으로 사마리아에서 열성단을 재건하기 위해 써야 할 텐데….”
“그렇긴 하지만 미리암을 되찾는 일도 그만큼 중요해요.
또 그렇게 해서 카잔 형님과 요남도 사마리아 열성단을 위해 일하시게 되면 결국 마찬가지 결과가 되는 거고요.”
“고마운 말이긴 한데….
나는 미리암을 찾은 후 열성단에서 일할 것 같지는 않네.”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시고 일단 이세벨에게 그렇게 접근하도록 하세요.”
유리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렇게 하세요. 카잔 삼촌.
벌써 미리암의 가정교사 사벳이 이세벨에게 고액의 헌금을 할 사람이 있으니 식사를 한번 같이 하자고 말했어요.”
“음, 그랬구먼…. 그럼 그렇게 해야지. 정말 고맙네.”
“당연하지요. 카잔 형님이 아니면 은전을 그렇게 쉽게 못 찾았을 거예요.”
“맞아요. 오반이 카잔 삼촌의 미모에 한눈에 넘어간 거잖아요. 하하.”
“하하. 놈이 내 콧수염이 멋있다고 생각했나 봐.”
카프리섬의 황제 전용 선착장에 헤로디아가 탄 배가 입항했다.
대단히 파격적인 대우였다.
웬만한 속주 총독들도 나폴리 항에서 배를 대고, 거기서 한 시간을 마차로 와서 다시 작은 배로 섬에 오는 것이 관례였다.
거의 풍랑이 없는 편안한 항해였으나 단단한 땅을 밟는 느낌은 루브리아에게 크나큰 안정감을 주었다.
“아, 이래서 물고기는 바다에, 사람은 땅에서 살게 돼 있네요.”
유타나가 맥슨에게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네, 발바닥으로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 땅을 밟으며 걸으니 참 좋군요.”
맥슨의 밝은 목소리였다.
이번 여행에서 유타나의 부탁대로 맥슨과 간단히 차를 같이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의 성실하고 순박한 마음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고, 가문으로 보나 인물로 보나 훌륭한 신랑감이었다.
하지만 루브리아는 맥슨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맥슨 백부장님이 아가씨와 차를 마신 후부터 뱃멀미를 별로 안 하네요’
유타나가 배에서 내리기 전 넌지시 루브리아에게 한 말이었다.
바위 언덕에 난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니 바닷물에 깎여 톱니 모양이 된 바위들과 하얗고 작은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였다.
정박한 배에서는 짐꾼들이 무언가 무거운 물건을 내리고 있었다.
검은 천막으로 포장이 돼 있었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 귀중한 물건인 성싶었다.
열흘 이상 매일 배에서 본 바다지만 조금 높은 땅에 올라와 보는 바다의 모습은 또 새로웠다.
수평선이 멀리 사파이어 색깔로 길게 한 줄로 늘어섰고, 섬에서 사는 갈매기들이 활개 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루브리아, 경치는 나중에 보고 빨리 올라와.
나하고 먼저 황제 폐하께 인사드리러 가야지.”
앞서가며 계단을 오르던 헤로디아 왕비가 루브리아의 걸음을 재촉했다.
계단을 다 올라오니 평편한 전망대가 나왔고 천부장 복장을 한 단단한 인상의 사내가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왕비님, 어서 오십시오.
카프리섬 황실 경호 대장 노미우스입니다.”
“아, 노미우스 천부장님, 그동안 승진하셨네요. 축하합니다.”
헤로디아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고 경호 대장이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왕비가 루브리아를 소개하자 노미우스가 말했다.
“아, 바로 이분이시군요….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아침부터 두 분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바로 가시지요.”
“아, 그러시군요. 폐하는 건강이 좋으시지요?”
“네, 그렇긴 하시지만 이제 연세가 있으시니까요….”
경호 대장이 왕비의 질문에 말꼬리를 흐렸다.
빌라 주피터는 카프리섬 최남단 동그랗게 솟아있는 언덕 위에 서 있어서 섬 안에 또 섬 같은 느낌을 주었다.
동쪽으로 멀리 나폴리 항을 끼고 육지가 길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