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굴라가 만족한 듯한 미소를 띠며 아그리파에게 말했다.
“우리 로마가 다스리는 민족 중 유대 사람은 참 특이해요.
그리스 사람들보다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데, 아직도 아우구스투스 신을 경배하지 않고 있지요?”
“아, 네. 아직 좀 그런 면이 있습니다.”
아그리파가 송구한 듯 고개를 숙였고 칼리굴라의 말이 계속되었다.
“유대인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얌체들 같아요.
그들이 진출한 곳은 모두 돈이 모이는 곳이지요.
알렉산드리아나 안디옥에도 그리스 사람들이 어렵게 개발해 놓은 상권을 나중에 들어가서 단물만 빨아먹고 있어요.
들리는 말로는 곧 두 민족 간에 큰 분쟁이 일어날 성싶은데 그리스 사람들 심정이 이해돼요.
아, 이거 아그리파 님에게 너무 유대인 욕을 했네요.”
“아닙니다. 우리 유대인의 발전을 위해서 고칠 것은 고쳐야지요.”
가마의 속도가 조금 느려지며 사람들이 많은 광장 옆 사크라 길로 진입했다.
“솔직히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 밑에서는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말 한마디 못 하고 목숨을 잃었습니까?
안식일은커녕 그리스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모두 감옥에 처넣거나 주동자는 처형해 버렸지요.
결국 마카비 가문에서 일으킨 반란 운동이 잠시 성공은 했지만 오래 못 갔지요?”
“네, 약 90년 정도 유지되었지요.
하스몬 왕조라고 합니다.”
“음, 그래요. 하스몬 왕조… 왜 그렇게 빨리 무너졌나요?”
“당시 예루살렘에서 정권을 잡은 당파의 지도자들은 사두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맞서 자기네들이 정통파라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이 세를 불리면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지요.”
“음, 역시 내부 분열이 문제였군요.”
“네, 당시 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두 형제 중 한 명이 자신의 큰 뜻을 지원해 달라며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파병 요청을 한 것입니다.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이었지요.”
“아, 그럼 폼페이우스 장군은 그냥 열린 성문으로 무혈입성했군요.”
“네, 거의 그런 셈이지요. 약 90년 전의 일입니다. 허망했지요.”
“음, 그러니까 독립을 90년 유지했고 무너진 지 90년 되었으니 애매하네요.
독립에 대한 미련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겠어요”
“네, 그렇습니다. 열성단을 비롯한 강경 세력이 그래서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 열성단의 누가 원로원으로 청원서를 보냈더군요.
안건이 두 가지던데….
재무관인 내가 보기에는 여행 자유화는 나쁠 건 없을 것 같고, 성전 세를 내리는 건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가 찬성하지 않을 거예요.
특히 지금은 적절치 않아요.”
아그리파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성전 세는 시리아 총독으로서는 큰 수입원입니다.
빌라도가 그 안을 그대로 올린 것이 좀 이상하네요.
원로원 통과가 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여하튼 통과 안 되게 해야지요.
새 황제가 유대인에게 줄 선물로 남겨 놔야 하니까요, 흐흐.”
칼리굴라의 웃음소리가 가마 안에서 낮게 울렸다.
마나헴의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려서 벌써 욥바 항구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식당 종업원의 동생이 유리가 사용한 마차를 찾지 못하자, 마나헴은 아직도 반은 잠들어 있는 우르소를 태우고 바로 세겜을 떠났다.
어차피 이번에 유리 모녀를 잡기에는 시간이 없었지만 적지 않은 소득이 있었다.
그녀가 세겜에 있는 것은 확실했고 사마리아인들이 미트라교를 중심으로 반란을 꾸미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시급한 정보였다.
이른 시일 내에 토벌단을 구성해 다시 와야 한다.
그때 시간을 두고 유리를 찾으면 충분할 것이다.
야곱 호텔 식당을 떠나기 전 그리심산의 지도와 세겜 지역 도로를 표시한 안내 책자도 구할 수 있었다.
은전 세 개를 주고 종업원에게 산 것인데 곧 토벌단과 세겜을 포위하러 올 때 대단히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옆자리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우르소가 여전히 코를 골며 자고 있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어젯밤 마신 약 포도주가 대단히 효과가 좋은 것이다.
그동안 온갖 약을 먹고 바르고 했어도 낫지 않던 왼 무릎이 말끔히 나았다.
우르소가 어젯밤 다섯 병을 먹어서 숙박비보다 술값이 더 나오기는 했지만 무릎이 나은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무릎이 안 아파서 일찍 생각을 못 했는지 아무리 찾아도 마차 안에 놓아둔 지팡이가 보이지 않았다.
여관 안으로는 분명히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고 식당에서도 사용한 기억이 없었다.
시간이 없어서 더 찾지 못하고 떠났지만, 그동안 분신과도 같았고 위급할 때 단도로도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없어진 것이다.
찜찜한 느낌이 들면서 또 한 가지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옆자리에 앉았던 젊은이에게 우르소가 ‘유리씨 여기 있었군요’라며 다가 갔을 때 그놈이 금방 ‘나는 남자요’라고 한 것이 지금 생각하니 좀 이상했다.
‘유리라는 이름이 인도 이름인데 어떻게 여자 이름인지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마나헴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급한 것은 내일이라도 가야바 대제사장을 만나서 사마리아놈들의 상황을 보고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정식으로 성전경비대장으로 근무하는 첫날부터 이렇게 시작하면 2~3년 안에 헤롯왕의 근위대장으로 승진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가 무관으로서 마나헴이 올라갈 수 있는 제일 높은 자리인데 만약 토벌대장으로 사마리아의 반란군을 무찌른다면 정치적 위상도 높아져 잘하면 산헤드린 의원으로 진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리 모녀가 어떤 생각으로 그동안의 은혜를 배신하고 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되면 이번 일을 깊이 후회하게 되리라.
유리를 증오하는 마음이 생길 때면 그녀를 당장 목 졸라 죽이고 싶다가도 통통하고 매력적인 그녀의 얼굴을 생각하면 참 아까운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과 균형 잡힌 오뚝한 코, 그리고 서글서글한 눈이 마나헴의 가슴을 다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