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마나헴이 눈을 떠보니 방안이 환했다.
어제 무슨 무릎에 좋은 약을 탓다는 포도주를 서너 잔 마셨는데 정신없이 잠에 떨어졌다.
이층 방으로 올라온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급히 옷을 걸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편히 쉬셨습니까?”
어제 그 종업원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허 참, 정신없이 잤네.
나하고 같이 있던 사람은 아직 안 내려왔소?”
“네. 어제 그 포도주를 늦게까지 혼자 남아서 마시다가 거의 새벽이 되서 올라갔어요.
아직 한밤 중일겁니다.”
“음, 빨리 올라가서 깨워요. 당장 내려오라고….”
두스가 알겠다며 돌아서는데 마나헴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아침 2인분 좀 가져다줘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음식은 똑같지만 아침은 아니고 점심입니다.
지금 점심시간이고 점심은 아침보다 비쌉니다.”
“아니 벌써 그렇게 되었나?”
가벼운 한숨을 내쉰 마나헴이 막 생각난 듯 물었다.
“아, 그리고 어제 말했던 동생이 마차꾼들에게 인도 여자의 행방을 좀 알아보았나?”
“네. 제가 오늘 아침 일찍 시켰으니까 한바퀴 돌아보고 곧 올 겁니다.
그런데 왼쪽 무릎은 좀 어떠신가요?”
“음, 그러고 보니 계단을 내려올 때 전혀 아프지 않았네.
약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아.”
“지금 한 잔 더 가져다드릴까요?”
“우선 2층에 자는 사람 좀 깨워서 내려오라고 해요.”
잠시 후 우르소가 눈을 반쯤 감고 내려왔다.
“마나헴 형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마나헴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우르소가 앞자리에 덜컥 앉았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요?
우리가 왜 여기 와 있나요?”
우르소가 힘들게 눈을 치켜뜨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 저기 앉아 있는 여자 참 이쁘네…. 유리하고 똑같이 생겼어!”
마나헴이 순간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건너편 테이블에는 젊은 남자 둘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놈이 술을 많이 먹더니 헛것이 보이는구나, 생각하는데 말릴 사이도 없이 우르소가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유리 씨, 여기 있었군요!
내가 한참 찾았어요.”
두 남자 중 얼굴이 좀 검은 편인 사람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사람 잘못 보았어요. 나는 남자요.”
“어, 금방 바뀌었네. 이 사람 마술사로군.
네가 우리 유리를 어디 숨겼구나!”
당황한 마나헴이 얼른 나섰다.
“미안합니다. 이 녀석이 아직 술이 덜 깨서…
우르소! 정신 차려, 이 놈아.”
마나헴이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자리로 돌아왔다.
점심을 가지고 나오다 이 광경을 본 두스가 남자 손님 두 명에게 사과했다.
“말투가 갈릴리 사람 같은데 어디 와서 행패를 부리려고 해.”
그들이 화가 나서 떠드는 소리가 마나헴의 귀에 들렸다.
“자, 점심이 나왔습니다.
어제 제가 고만 마시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왜 이렇게 많이 마셨나?”
마나헴이 식사를 가지고 온 두스를 올려보며 물었다.
“서너 잔 마시고부터 목이 안 아프다고 하면서 계속 마셨어요.
한 잔 마시고 목 한 번 돌려보고, 또 한 잔 마시고 돌려보고, 나중에는 목을 계속 돌리다 쓰러진 것을 위층으로 들어 옮기느라 혼났어요.”
두스의 말이 끝나자 ‘쿵’ 소리와 함께 우르소가 이마를 식탁에 박으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
로마는 서쪽으로 구부러져 흐르는 테베레강을 끼고 일곱 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카피툴리누스 언덕 위에 로마 광장이 넓게 자리 잡았고 건너편에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에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음악회와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다.
팔라티누스 언덕의 남쪽으로는 키르쿠스 막시무스라고 불리는 원형 경기장이 있다.
말 4마리가 끄는 전차 경기를 할 수 있게 5백 미터가 넘는 길이의 대형 경기장이다.
여기서 출발하는 남쪽으로 향한 도로가 아피아 가도인데 거의 나폴리까지 6백km가 돌로 포장돼 있는 로마제국의 중심도로다.
약 100년 전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한 후 이 도로를 따라 5천 개의 십자가를 세웠다.
칼리쿨라는 8명이 지고 가는 가마를 타고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평상시처럼 하얀 실크 속옷 위에 누런 양털 토가를 걸치고 다리에는 붉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아그리파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오늘은 무슨 특별한 일이 있으신가요?
원로원 회의는 오랜만에 나가시네요.”
흰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머금고 칼리쿨라가 대답했다.
“아그리파 님을 위해서예요.
명색만 재무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지요.”
재무관은 장래 로마의 지도자가 될 젊은이들이 밟는 행정 코스였고 처음에는 국고를 관리하는 전통적 임무만 수행했으나 얼마 전부터 재판이 벌어지면 사법권까지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
아그리파가 다시 물었다.
“빌라도에게 작년 회계감사의 문제가 좀 있는데, 재무관인 내가 원로원에서 그를 변론해 주겠다고 은밀히 알렸어요."
“아, 그러면 빌립왕의 영토를 헤롯왕이 통치하는 것에 반대의견을 내겠군요.”
“그렇지요. 우리가 친한 것을 잘 아니까.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속주총독의 의견을 전혀 무시할 수 없으니 원로원에서 시간을 끌 수 있어요.
1년만 끌어도 그사이에 좋은 일이 있을 수 있겠지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칼리쿨라 님의 은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벌써 암고양이 같은 헤로디아가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하하.”
“뭘요. 저는 한 번 마음 먹은 것은 꼭 이루고야 맙니다.”
“네, 반드시 대업을 이룩하실 것입니다.
제가 매일 3번씩 제우스신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신 중에서 제일은 역시 제우스신이지요.
뭔가 나하고 통하는 면이 많은 신입니다.
의상도 그렇고 특히 노랑머리가 마음에 듭니다.”
“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칼리굴라 님의 몸에서 제우스신과 같은 기가 느껴집니다.
백 년 전 로마의 대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옲은 시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군요.”
칼리굴라가 편안히 좌석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슬쩍 보면서 아그리파가 시를 외웠다.
<로마인들이여 기억하라.
그대들의 힘으로 지구상의 모든 민족을 다스릴지니 그 다스림의 기술은 이것이라.
평화를 지키기 위해 법의 지배를 강화하라.
복종하는 자들은 아껴주고 덤비는 놈들은 모두 쓰러뜨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