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옷의 사내가 주위를 한번 돌아보더니 가볍게 담을 넘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을 밝히는 은은한 램프 두 개가 사내의 콧수염을 비추었다.
여로암이 알려준 교주의 침실로 막바로 들어가려던 카잔의 귀에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아까 들어간 경비의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놀란 카잔이 얼른 밖으로 나가려 하다가 경비의 방문 사이로 오른쪽 귀를 바짝 들이대었다.
자세히 들으니 흥얼흥얼 잠꼬대하는 소리였다.
청약수를 준 여로암과 무슨 대화를 하는 듯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침실로 들어갔으나 너무 어두웠다.
거실에 있는 램프 하나를 가지고 들어와 사방을 비추니 침실 건너 작은 방이 또 하나 있었다.
침실에서 나는 강한 향수 냄새를 느끼며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책상이 방 한가운데 놓여 있었고 한쪽 벽에는 섬찟한 모습의 황소 머리를 수놓은 큰 카펫이 걸려있었다.
램프가 흔들리며 황소의 뿔이 움직이는 듯했다.
책상은 서랍이 없었고 그 위에 놓인 물건도 별로 없었다.
카잔이 지난번 미트라교 집회 때 멀리서 본 황금 성배는 어린애 머리만 했는데 이 방 어딘가에 숨겨 놓았을 것이다.
왼손으로 램프를 들고 벽면을 살펴보았다.
언뜻 눈에 띄는 특이한 부분이 없어서 오른손으로 벽 전체를 고르게 두드려 보았다.
뒷면이 비어서 소리가 울리는 곳도 없었다.
황소 머리 카펫을 잠시 들여다보던 카잔이 카펫을 들어 올렸다.
역시 벽 중앙에 움푹 파인 곳이 있고 네모난 검은 상자가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함께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상당히 무거웠다. 누런 쇠로 된 자물통은 단단히 잠겨져 있었다.
카잔이 품 안에서 작지만 탄탄해 보이는 톱을 꺼냈다.
하얀 강철로 된 것이 웬만한 쇠는 다 자를 수 있을 것처럼 생겼다.
톱을 단단히 움켜잡고 자물통의 이음새를 썰기 시작했다.
서걱거리는 쇳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쇳소리에 섞였다.
잠시 후 상자의 뚜껑이 열리고 황금 성배가 모습을 나타냈다.
카잔이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후 준비해 간 큰 보자기로 푹신하게 싸는데 누군가 방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램프 심지를 엄지로 눌러서 끄고 벽에 바짝 붙어 섰다.
발걸음 소리가 크지 않은 것으로 봐서 미리암이 화장실에 가는 성싶었다.
순간적으로 지금 그냥 미리암을 데리고 나갈까 하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아까 그 경비 놈은 지진이 나도 깨지 않을 정도로 청약수에 떨어져 있고 시몬과 이세벨이 없는 이런 기회는 언제 또 올지 모른다.
문제는 미리암이 순순히 따라오지 않을 텐데 잘못하면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황금 성배를 가지고 나와 미리암과 교환하자고 해도 시몬이 그의 요구에 틀림없이 응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들이 카잔의 마음과 같다면 성배 열 개와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어지럽게 오락가락하는데 다시 발걸음 소리가 났다.
침실문을 살짝 열고 내다보니 역시 미리암이 눈을 반쯤 감고 잠옷 바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자기 방 앞에서 카잔이 있는 침실 쪽을 한번 쳐다보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미리암은 곧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카잔의 가슴은 계속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황금 성배를 보자기로 다 싼 다음 검은 상자를 카펫 뒤에 다시 그대로 옮겨 놓았다.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정지되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카잔은 거실로 나와 미리암의 방문에 바싹 귀를 대고 서 있었다.
그녀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새 잠이 푹 든 것 같다.
카잔이 램프를 손에 들고 그녀의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았다.
잠깐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가고 싶었다.
조금 떨어진 침대 위에 누워 자고 있는 미리암의 얼굴이 보였다.
카잔이 자기도 모르게 성큼 한 발짝을 들여놓았고 그러다 보니 좀 더 가까이 그녀를 보고 싶었다.
침대 머리맡 램프에 비친 카잔의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 본 그녀의 자는 모습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양의 무릎뼈를 던지는 점을 치기 위해 식사를 안 해서 볼살은 좀 빠진 듯했다.
자고 있는 그녀를 번쩍 들어서 업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고 그녀의 동그스름한 이마에 뽀뽀만 하고 나가려고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바로 그 순간 자고 있던 미리암이 눈을 반짝 떴다.
당황한 카잔이 얼른 머리를 들고 그녀를 보고 웃었다.
미리암이 놀라워하며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잠이 덜 깬 얼굴로 말했다.
“카잔 아저씨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봐!”
카잔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른 말했다.
“미리암아, 꿈이 아니고 네가 보고 싶어서 잠깐 들어왔어.”
“어, 정말이에요?”
그녀가 좌우를 돌아보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우리 미리암이 요즘 식사를 못 해서 좀 여위었네. 배고프지?”
“괜찮아요. 원래 신탁 점을 치는 연습을 할 때는 그래야 해요.
배를 비우고 청약수를 마셔야 양의 정강이뼈를 잘 던질 수 있어요.”
카잔이 살며시 그녀의 방문을 닫고서 침대 옆 작은 의자에 앉았다.
“청약수를 먹고 자면 꿈과 생시가 잘 구분이 안 될 때가 많아요.
꿈을 꾸면서 자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이면 꿈인데 지금은 꿈이 아니네요.”
미리암이 방긋이 웃으며 설명하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아, 그렇구나. 신탁 점 끝나면 아저씨가 미리암이 좋아하는 마늘빵 많이 사줄게.”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부모님은 집에 안 계세요.
갈릴리 출장 가셨는데 내주에 오시면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경비 아저씨가 아무 말 안 하던가요?”
미리암은 지금 몇 시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카잔이 마음을 굳게 먹었다.
“미리암아, 지금부터 아저씨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해.”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커지는 듯했다.
“지금 너와 살고 있는 엄마 아빠는 너의 친부모님이 아니셔.
이 말을 듣고 많이 놀라겠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란다.”
미리암이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카잔에게 곧바로 물었다.
“그럼 제 친 부모님은 누구세요?”
‘내가 바로 네 친 아빠란다’라는 말을 막하려다 카잔이 생각을 바꾸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을 하는 듯했고 미리암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카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내가 미리암의 친 부모님이 누군지 알고 있는데 조금 나중에 말해줄게.
그리고 이런 말, 오늘 나를 만난 일은 누구에게도 하면 안 돼.
잘못하면 친부모님을 못 만날 수도 있어요.”
“네, 아무에게도 안 할게요.
이번 신탁 점이 끝나면 알려주세요.
그런데 지금 제가 꿈을 꾸는 건 정말 아니지요?”
“그럼, 물론이지. 내가 우리 미리암 이마에 이렇게 뽀뽀도 하잖아.”
카잔이 동그랗게 솟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대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