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굴라가 원로원 회계관으로 업무를 보고 있는 사무실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입구부터 위압적인 모습으로 창을 높이 들고 서 있는 경호원들의 눈매가 날카로웠고,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몸을 던져 막을 듯한 기세였다.
칼리굴라 님과 약속이 되어 있고 유대 갈릴리의 왕비라고 신분을 밝혀도 방문자 명단에 직접 서명해야 했다.
잠시 후 무장을 하지 않고 면도를 말끔히 한 비서관이 헤로디아와 루브리아를 대기실로 안내했다.
“지금 회계관님이 회의 중이신데 곧 끝나실 겁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그가 일부러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천장이 높은 대기실 중앙에 큰 벽난로가 있었고, 그 위에 박제돼 있는 사슴 머리의 긴 뿔이 두 여인을 겨냥하듯 걸려 있었다.
바닥은 하얀 대리석 위에 화려한 페르시아 카펫이 깔려 있었고, 가구들도 물소 뿔과 상아로 장식된 백향목 제품들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조금 전 비서관이 다시 들어왔다.
“실례지만 왕비님 마차에 실려있는 것 중 안 내린 것은 없으신지요?”
헤로디아는 가슴이 덜컥했지만 침착하게 없다고 말했다.
비서관이 공손한 태도로 문을 닫고 나갔지만 그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에 주려고 했던 백 달란트를 게멜루스와 나누어 반만 가지고 왔는데 이것이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안 주느니만 못할 수도 있다.
은근히 긴장되었지만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아무리 칼리굴라가 뜨는 해라지만 아직 황제의 통치가 굳건하고 더구나 그 분의 뜻은 게멜루스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으니 공연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루브리아를 쳐다보니 그녀의 까맣고 큰 눈이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다시 문이 열리며 키가 크고 얼굴이 허연 젊은이가 들어왔다.
칼리굴라 동상 Modena, Italy.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두 여인이 일어났고 젊은이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나왔다.
“아, 당신이 루브리아!”
뒤에서 따라오는 경호원도 루브리아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칼리굴라는 로마인의 긴 코에 눈이 좀 튀어나왔는데 아직도 소년티가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을 온몸에 받은 루브리아가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인사를 했다.
“칼리굴라 님, 반갑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브리아의 말에 그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신음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이분은 유대의 헤로디아 왕비님이세요.”
왕비를 바라보는 칼리굴라의 눈이 묘하게 커지며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왕비님, 어서오세요.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어머, 감사합니다. 근데 저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네, 아마 10년쯤 전에 황제 폐하의 생신 연회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제가 어렸을 때라 왕비님은 기억을 못하실 겁니다.”
“아,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그때는 폐하의 두 아드님이 모두 생존해 계셔서 아무도 저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지요.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요.”
그의 입술이 살짝 비뚤어지면서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었다.
칼리굴라가 손짓으로 경호원을 내보낸 후 다시 루브리아를 바라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너스 신과 아폴로 신께 맹세코 나는 루브리아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소.
외롭고 힘들 때면 루브리아를 생각하면서 시름을 달래곤 했지요.
왕비님이 나중에 제가 한 말에 증인이 되셔도 좋습니다.”
소년 같은 그의 얼굴이 웃어서 그런지 홍조를 띠었다.
“아, 참. 내가 큰 불충을 저질러 반역죄로 몰리기 전에 폐하의 안부를 물어봐야지.
왕비님이 만나신 황제 폐하는 건강이 어떠십니까?”
칼리굴라가 정색을 하고 헤로디아에게 질문했다.
“네, 아직 건강이 무척 좋으십니다.
10년은 문제 없으시겠어요.”
왕비도 젊은 황족에게 약간 가시 돋힌 대꾸를 했다.
“아, 그러셔야지요.
그런데 늙은 늑대와 노인의 수명은 하루 앞을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만든 속담이지만 그럴 듯하지요?”
헤로디아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칼리굴라는 아래 입술을 쑥 내밀더니 시선을 루브리아에게 돌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내가 연두색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고 그 옷을 입고 왔나요?
늙은 폐하께서 주신 자주색 드레스를 입고 오면 어쩌나 걱정했다오. 하하.”
헤로디아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카프리섬의 일거수 일투족을 훤히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공연히 불편한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칼리굴라님에 대한 기대가 아주 크시더군요.
원로원의 많은 일을 회계관님이 아주 잘 처리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셨어요.”
칼리굴라가 다시 입술을 쑥 내밀고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약간 무안해진 왕비가 품 안에서 서신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빌라도 총독의 부인 프로클라 여사가 드루실라님께 보내는 서신입니다.”
그가 프로클라의 붉은색 인장이 새겨진 봉함 촛농을 망설임 없이 뜯어내더니 서신을 빠르게 훓어내려간 후 말했다.
“내 여동생 세 명은 모두 내가 철저히 관리하고 있어요.
특히 드루실라는 총명하고 미인이라 주위에서 넘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신은 본인에게 잘 전달해 주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처음으로 호의적인 태도을 보인 칼리굴라에게 왕비가 얼른 한마디 더했다.
“천만에요. 그리고 마차에 조금 싣고 온 물건이 있었는데 제 작은 성의니까 회계관님께서 잘 거두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마침 어제 감옥에 간 아그리파 님 옥바라지 하는데 쓰겠습니다.”
헤로디아는 칼리굴라가 젊은 나이지만 영리하고 만만치 않은 젊은이라고 느꼈다.
받을 건 받으면서도 옥바라지 정도밖에 안 되는 성금이라는 것과 아그리파를 투옥시킨 것은 당신이니 당신 돈으로 돌봐주겠다는 의미가 모두 담겨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젊은 시녀가 마실 것을 들고 들어왔다.
제비꽃 향내가 나는 차였다.
“귀한 손님과 옛동무가 왔는데 너무 늦게 가지고 오는구나.”
칼리굴라가 한마디 하면서 두 사람에게 손수 차를 따라 주고 먼저 한입 마셨다.
“세네카 님이 하신 말씀인데 ‘상대방의 차에 독을 타지 않았다는 증거는 먼저 마시는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라고 하셨지요.
알렉산드리아는 몰라도 로마에서 그보다 더 뛰어난 웅변가는 아직 못 봤어요.
그분은 어린아이 이름도 잘 짓지요.
내 첫째 여동생 아그리파가 임신을 했는데 남자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네로’라고 지으라고 하더군요.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은 이름처럼 들리지요? 하하.”
칼리굴라가 길고 허연 얼굴에 처음으로 이빨을 들어내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