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빌리 브란트’ 하면 떠 오르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동독을 비롯한 공산국가를 향한 ‘동방정책’으로서 독일 통일의 기초가 된 그의 외교노선이다.
브란트는 1969년 총리 취임 연설에서 “독일에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독일 민족은 협력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동독을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한다’는 뜻으로 ‘동방정책’의 출발점이 됐다.
브란트는 ‘독일에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두 국가는 서로 다른 나라가 아니고, 그 관계는 특수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서독이 독일을 대표한다’는 과거 아데나워 정부의 서방정책을 뒤집는 것이었다.
화해와 공존으로 통일 정책의 가닥을 잡은 브란트는 이 후 거침없이 동방정책을 실행했다.
두 번 째는 사진의 형태로 기억 되는데, 브란트가 1970년 12월 7일 폴란드를 방문하여 서독의 총리로서 무릎을 꿇은 흑백사진이다.
찬 비가 내리는 날,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유대인 기념비를 찾은 그는, 헌화 한 뒤 한 걸음 물러난 후 돌연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약 30초간 양손을 맞잡고 머리를 숙였다.
바로 ‘세기의 사죄’라는 유대인 기념비 참회였다.
당시 언론들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으나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전범 독일 총리의 진심 어린 사죄였고, 이 사죄는 전 세계를 사진으로 감동시켰다.
이듬해인 1971년 10월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의심 어린 눈초리로 서독을 바라보던 유럽이 브란트의 사죄 이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제2차 세계대전 전승 4개국이 ‘동·서독 현안은 독일 내부 문제’라는 내용의 베를린 협정을 1972년 체결한 것이다.
돌발적으로 보이는 사과와 화해의 제스추어는 동구 유럽의 여러 나라에도 신뢰를 주었고, 그는 총리를 그만 둔 후에도 유럽 정치의 리더로서 계속 활약했다.
빌리 브란트를 시사저널에서 초청했다.
당시 주필이었던 박권상선생이 독일 유수 언론인 '디 차이퉁'의 정치부장이었던 '버트람'을 통하여, 브란트 초청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처음에는 ‘한국의 큰 신문사가 불러도 안 갔는데 가겠느냐’라며 회의적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뒤 ‘브란트 총리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관심이 많다’며 상당히 희망적인 말을 전해왔다.
박주필이 5월 초 서베를린에서 열린 IPI(국제의원총회)에 가서 기조 연설을 한 브란트를 직접 만나, 어려운 초청을 성사시켰다.
시사저널 창간호가 나오기 며칠 전 브란트가 한국에 왔다.
일종의 국빈이었다.
1주일 동안 머무르며 청와대와 판문점, 설악산을 방문 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 정책과 남북 문제 등을 주제로 청와대에서 브란트와 1시간 넘게 환담했다.
서베를린 시장과 서독의 총리를 지낸 그는 동서 화합, 대화와 소통 등의 상징이었다.
YS와 DJ, JP 등이 브란트와 따로 만나고 싶다며 필자를 찾았다.
그는 누구와도 개인적 만남을 원치 않았고, 우리는 정치인들을 동시에 초청하는 만찬을 플라자 호텔에서 열었다.
예상대로 만찬은 대성황이었고, 3김씨를 비롯하여 얼굴을 알 만한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브란트와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는 상황이 발생했고, 대충 교통 정리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YS는 브란트 바로 옆에 은은한 미소를 지며 계속 서 있었고, DJ는 동방정책에 대해 간단한 대화를 했고, JP는 오래 전 베를린에서 그를 만났다며 반갑다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브란트 수상은 장거리 여행에 좀 피곤한 모습이었고, 만찬 내내 담배를 많이 피웠다.
체구는 크지만 배가 좀 나온 편이고 얼굴에 표정 변화가 별로 없었다.
다음 날은 강영훈 총리의 오찬이 롯데 ‘메트로폴리탄’에서 있었고, 오후에는 ‘동방정책과 한국의 남북문제’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세미나에서 브란트와 필자.
브란트가 ‘독일과 한국의 통일 전망’에 대한 발표를 간단히 했다.
그는 당시 독일이 곧 통일 된다고는 전혀 생각치 않았다.
여건이 많이 성숙했으나 앞으로 10년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가 한국을 떠난 후 2주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역사는 이렇게 평생 독일 통일의 기초를 놓은 사람에게도 전혀 예측 할 수 없게 흘러간다.
당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도록 동독과 소련이 방치 한 것은, 고르바초프의 지시가 잘 못 전달 된 실수였다는 설이 있었으나 여하튼 10년이 2주로 앞당겨 진 것이다.
한국의 통일에 대해서는 앞으로 오래 걸릴 것이니 서두르지 말고, 가능한 일부터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조언이었다.
그의 발언 후 기자들의 간단한 질문이 있었고, 77세 노정치인의 건강을 위해 세미나를 끝내고 쉬시도록 했다.
다음 날은 판문점을 다녀 온 후 오후에 설악산으로 향했다.
날씨가 좋아서 헬리콥터를 타고 설악 파크호텔에 도착하니 브란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서울에서 정치인들과의 공식만찬과 세미나에서 해방 된 것이다.
마침 설악의 단풍이 한창이었고, 청명한 한국의 가을 하늘에 브란트가 매료되었다.
당시 시사저널 창간호가 막 인쇄되고 있었기 때문에 박주필 대신 내가 설악에 동행했다.
나도 온 정신은 창간호에 쏠려 있었지만, 국빈 대우를 해주는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시킬 수는 없었다.
저녁을 한식으로 대접 한 후 커피를 마시면서 질문을 했다.
“총리님, 어제 세미나에서 한국의 통일에 대해 언제 쯤 될 것 같다는 구체적인 시간은 말씀 안하셨습니다.
독일이 적어도 10년은 걸릴 거라고 하셨으니 한국은 아무래도 더 걸리겠지요? “
‘알고 보니 이 젊은 발행인도 기자였군’ 하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내가 남북한 문제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20년은 걸릴 것이고, 어쩌면 30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한국이 통일 될 때 제가 또 총리님을 초청 할 테니 그 때까지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덕담을 건네자 그가 미소를 지었고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했다.
“ 한국의 정치인 중 총리님과 교류가 있는 분이 있으신가요?”
그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대답했다.
“오래 전 내가 서베를린 시장을 할 때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어요.
김대중씨는 사회주의 민주화 연맹을 통하여 알고 지내는 사이지요.”
브란트가 DJ의 노벨상 추천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었다.
“총리님은 키징거 기독 민주당과의 연정 내각에서 외교장관으로 있을 때부터 동방정책을 세우셨고, 총리 취임 후 더욱 확고히 추진 하셨는데 힘든 점도 많으셨지요?"
“다른 당이나 외부의 비판 보다는 내부가 흔들리는 것을 조심했어요.
어떤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이 많이 다를 때에도 나는 우리 당의 인간적 결속을 중시 했지요.”
필자는 고개를 끄덕인 후 계속 질문했다.
“총리님은 60년을 정치인으로 사셨는데 이 땅의 정치 지망생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잠시 생각 하는 듯 하더니 그의 좌우명이라 할 만한 말을 했다.
“정치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몇 가지 개인적 질문을 더 한 후 설악파크호텔 지하에 있는 나이트 클럽에 가시겠냐고 물었더니,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이트 클럽은 시끄러운 노래가 고막을 자극했고 조명이 현란했지만, 브란트는 따로 준비 된 방에서 양주를 꽤 많이 마신 후 무대에 나와 흥겹게 춤도 추었다.
방으로 돌아와서는 무대에서 춤을 추는 한국여성들이 아름답다고 관심을 보였다.
동방정책에서 여성정책으로 방향이 바뀌는 저녁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막 인쇄 된 시사저널 창간호를 브란트 총리와 한 장 한 장씩 같이 넘겼다.
빌리 브란트는 1913년 사생아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17살에 사민당에 입당, 일찍이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자 그는 노르웨이로 망명하여 나치 독일과 투쟁했으나, 독일 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된 후 극적으로 탈출한다.
브란트는 노르웨이가 나치의 점령하에 들어가자 스웨덴으로 이주했고, 독일 국적을 박탈당한 후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해서 군인으로 계속 싸웠다.
이러한 젊은 시절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브란트는 정치가로서 성공했다.
그는 1992년 사망 할 때까지 31년간 서독 연방의회 의원이었고, 1957년부터 9년간 서베를린 시장, 1966년부터 3년간 외무부장관, 1969년부터 5년간 서독 총리를 역임했다.
브란트는 1971년 노벨상 수상연설에서 "전쟁이 결코 정치의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 며 평화에 관한 확고한 믿음을 재천명 했다.
하지만 그의 동방정책은 대내외적으로 심한 반발에 부딪쳤고, 많은 사민당 의원들이 급진적인 동방정책에 반대해 기독교연합으로 가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란트는 72년 총선에서 사민당에 압도적 승리를 안겨주며 2차임기에 들어갔으나, 74년 측근의 간첩 스캔들로 돌연 총리직을 사임했다.
1990년 독일 통일을 실행에 옮긴 콜 총리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가장 큰 공을 돌렸고, 이 후 그는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빌리 브란트' 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간단치 않다.
정치인으로서는 친화력이 있었지만, 인간 브란트는 약점이 많고 냉정한 인물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지나친 술 담배와 우울증, 여성문제 등이 계속 따라 다녔다.
그러나 정치인 브란트는 현실적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분단된 독일의 화해 정치를 구현하였고, 소통과 설득의 진정성을 통해 유럽의 정치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정치인을 정치꾼과 정치가로 구별 할 수 있는 명확한 장면이다.
작금의 우리 정치인들 대부분은 흑백논리의 편가르기, 내로남불의 안면몰수로 일관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서민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지금 이 나라는 분열로 치닫고 있으며, 미래를 이끌 정치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불안과 혼돈의 시대가 계속 되고 있다.
공영 방송이 정권에 따라 계속 대변인 노릇을 하니, 그 반작용으로 우후죽순처럼 개인 방송들이 생겨났다.
일부 순기능은 있지만, 편파적이고 자극적인 가짜 뉴스가 범람하고, 증오와 저주를 취재원으로 삼는, 불량 방송이 판을 치는 어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2019년은 브란트가 설악산에서 ‘한국 통일이 30년쯤 후에는 되지 않겠느냐’는 바로 그 해이다.
베를린 장벽이 갑자기 무너지듯이 휴전선이 어느 날 뻥 뚫릴 것 같지는 않다.
대포나 기관총의 위협은 줄어 들었는지 몰라도, 국제정세는 더욱 복잡해졌고 핵무기의 위협은 상존하고 있다.
그러나 휴전선의 지뢰 하나가 제거되는 것도 작은 발자국이니만큼,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앞으로 설령 또 30년이 걸릴지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평화적으로 우리 민족이 통일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빌리 브란트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좌로부터 (존칭생략) 박권상, 필자, 조완규, 이홍구, 강영훈, 브란트, 최호중, 이상훈, 서독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