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돌은 조남철이 와도 못 살려! ”
살 수 없는 자신의 돌을 묵묵히 들여다 보기만 하는 상대에게, 조 아무개가 와도 안 되니 빨리 항복하라는 독촉장이다.
한국 현대 바둑의 아버지 ‘조남철’은 이렇듯 이름 자체가 대명사였다.
조남철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동아건설 서소문 사옥 별관에서였다.
1974년경으로 기억 하는데 당시 최원석 회장님의 바둑사범으로 오셨다.
학같이 마른 분이 꼿꼿하게 앉아서, 네모난 뿔테 안경 너머로 가늘고 긴 눈만
간혹 움직이는데, 내공을 감춘 무림 최고수의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50대 초반이었는데 상당히 연세가 많으신 것처럼 느껴졌다.
이 후 필자가 주로 바둑을 배우게 되었다.
조 선생은 “바둑은 모양이다.”라고 하면서 처음 배울 때부터 모양을 중시하셨다.
시작은 9점으로 지도 대국을 했는데 1년쯤 지나자 7점으로 가르쳐 주셨다.
그렇게 해야 복기도 간편하고 공부가 더 잘 되기 때문이었다.
필자 같은 하수와 지도대국을 하실 때도 어떤 때는 3-4분씩 장고를 하시는데 그야말로 반면무인의 경지를 보여 주셨다.
그럴 때마다 무척 송구했지만 “장고 하시면 죄송하니 빨리 두세요.”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10분이 넘게 시간이 아까운 장고를 늘 하지만 언제나 아무 말씀 없이 반면만 응시하셨다.
내가 치석 7점의 힘으로 초반에 당신의 돌을 맹렬히 공격하면 마치 전문기사와 두시는 것처럼
심각하게 고개를 갸우뚱 한 후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돌 하나를 놓으신다.
김인 국수와 두실 때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같은 멘트를 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또 “에라 모르겠다”는 정말 모르는 게 아니고 이미 수를 다 읽은 확신에 찬 기합이었다.
지도 대국이 끝나고 식사를 간혹 모실 때면 아주 소식을 하셨다.
위가 좀 작다고 하시며 거의 식사를 안 하시는데 신선 같은 느낌이었다.
바둑을 다 두고 복기할 때 하신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다.
필자가 “이런 때 뭔가 묘수가 없었나요?”라고 물어보면 “'보통수'만 둬도 잘 두는 겁니다.”라고 대답하셨다.
훗날 미국에서 인터넷 바둑을 둘 때 나는 아이디를 '보통수'라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보통수는커녕 떡수만 두니 아이디를 '떡수'로 바꿀까도 생각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언젠가 필자가 “선생님은 항상 바둑 공부를 하시지요?”라는 질문에 예상 밖의 대답을 하셨다.
“내가 정말 바둑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일본 유학 시절 딱 1년 반이었소.
기타니 선생 문하에 3년 있었는데 처음엔 말 배우고 적응하느라 정신없었고, 제대로 한 것은 1년 반이었지요.
그때 내가 1년만 더 공부했더라면 9년이 아니라 10년 훨씬 더 갔었을 겁니다.”
국수전을 9연패 하셨는데 그것이 아쉽다는 말씀이었다.
“그 때 1년 반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지나고 나니 딱 2주 정도 시간이 간 것 같았지...
막 바둑 공부 제대로 시작했는데 그렇게 세월이 흐른 거요. ”
선생이 가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당시를 회상하는 듯했다.
“선생님은 일본 유학을 끝내고 우리나라에 와서도 바둑공부를 계속하셨지요?”
“내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해방이 되었어요.
한성기원 설립과 바둑 저변 확대로 너무 바쁜 나머지 솔직히 개인적인 공부는 거의 못 했지요."
선생의 동년배인 일본의 '후지사와'나 '사카다'는 40이 넘은 나이에도 바둑만 공부하는 것이 몹씨 부러웠다고 하셨다.
“네, 선생님은 당시에 어려운 일이 참 많으셨지요?”
“내가 제일 견디기 힘들 때는 바둑을 둘 수 없을 때 였어요.
6 25가 터지자 늦은 나이로 군대를 갔는데 군대에서는 바둑을 둘 수 없었지...
어느 전선에서 선임 하사가 돌격 부대를 뽑는데 내가 자원했어요.
적의 총탄에 맞아 죽을 수도 있지만, 운이 좋으면 부상 만 당할 것이고 그러면 후방 병원에서 바둑을 둘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지.
내 평생의 승부수였소.
다음 날 적진을 향해 돌격하다가 다리가 뜨끔하면서 퍽 쓰러지는데 ‘아, 나는 이제 바둑을 둘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의식을 잃었지요.”
이 말씀을 들은 후 필자는 바둑 공부를 조금 더 열심히 했다.
조선생님 덕분에 귀한 바둑판을 얻게 되었다.
이 비자나무 바둑판은 大正 6년 (1917년) 작품이다.
기타니 선생이 제자 조남철 선생과 기념대국을 하고 사인을 한 바둑판인데 이 후 조 선생이 한사람 한 사람 만나서 명인들의 사인을 모으셨다.
연대 순으로 기타니 (水月이 선생의 호), 사카다, 임해봉, 이시다, 조훈현, 조치훈 명인이다.
조남철 선생은 '스승의 사인이 있는데 어떻게 제자가 그 옆에 사인을 하느냐' 라는 이유로 이 바둑판에 사인을 안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하시라고 할 걸 하는 후회가 된다.
바둑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지금은 중국으로 그 중심이 넘어가고 있다.
이제 바둑을 둘러싼 경제 규모는 물론, 우리가 우위에 있던 세계대회에서도 한국은 힘을 못 쓰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국민의 15%에 달하는 인구가 바둑을 알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그만큼 조선생의 바둑 저변 확대가 성공한 것이다.
몇 년 전 ‘알파고’라는 바둑 인공지능이 황야의 무법자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졌다.
인간의 머리로 승부를 가르던 전문기사들에게 엄청난 폭탄이었고, 바둑 세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조남철 선생이 알파고를 보셨으면 뭐라고 하셨을까 궁금하다.
어쩌면 알파고와도 '보통수'로 두면 된다고 하셨을지...
아니면 이제 '조남철이 와도 안 된다'고 하셨을지…
학처럼 꼿꼿하시던 조남철 선생님을 다시 생각한다.
1934년 11살의 조남철과 지도대국을 두는 기타니선생. 대한바둑협회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