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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독일 집 방문 : 선생이 주머니에서 꺼낸 메모에 한문으로 "절대비밀" 이라는 빨간 글씨가 써 있었…

wy 0 2018.11.28

 

 

윤이상선생 독일 집 방문과 귀국 하루 전 취소

윤이상선생은 항상 고국을 잊지 않았다.

북한과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는 남북한을 모두 고국으로 생각했던 민족주의자였다.

예음 문화재단에서 그의 귀국을 거의 성사 시켰는데, 예기치 못한 장애가 발생하여 귀국도 무산되고, 친필 악보들을 한국으로 가져 오지도 못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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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선생 1917-1995

 

임원식선생과 독일에 있는 윤선생의 댁을 방문한 것은 199311월 하순 어느 늦가을 무렵이었다.

을씨년스러운 회색 빛 도시 베를린의 오후는 간간히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윤선생의 낮은 담장 집 현관에 들어서자 동그란 은테 안경을 쓰신 부인이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거실로 들어가니 장작이 반쯤 타고 있는 벽 난로 옆, 누런 가죽 소파에 앉아 있던 윤선생이 천천히 일어나 나에게 두 팔을 벌려 포옹식 인사를 하신다.

이런 식의 인사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따스한 환대의 뜻이라 생각했다.  
바로 옆의 자리를 권한 후 선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고 갈라져 있었다.

"
나는 최사장이 여기 오기를 오래 기다렸습니다.
'객석' 을 보면서 누가 이런 좋은 잡지를 만들고 있는지 궁금 했어요. " 하신다.

사실 이분을 만나러 오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북방 정책의 하이라이트인 남북 대화의 물꼬를 여는 상징적인 행사로,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선생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작업을 몇년 간 은밀히 진행하고 있었다.

 특히 윤선생과 오랜 교분이 있는 임원식선생이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하지만 안기부를 비롯한 정부 관리들의 반대 의견이 거세었다.
당시 시각으로 본다면 윤선생의 그간 행적에 문제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김일성 주석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윤이상 교향악단'과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북한에 설립 한 것은 예술가로서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친북 성향이 강한 범민련 의장직을 유럽에서 맡은 일은, 지나친 정치적 활동으로서 귀국에 걸림돌이 되었다.

사실 김일성주석은 윤선생에게 각별히 공을 많이 들였다.

동백림에서 자신을 납치하여 감옥에서 모진 고초를 겪게 한 한국 정부에 반하여, 본인을 높이 평가 해주고, 매년 생일 선물까지 독일로 공수하는 정성이라면, 인간적으로 북한에 기우는 마음을 돌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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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석이 보낸 생일상 

이 부분에 대해 비판이 많았지만 정치를 떠나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로서, 남북 화합의 차원에서 초청을 추진 하고 있었다.


정부 내에 찬반 양론이 있는 가운데 당시 이 홍구 총리께서 적극 지원해 주어서 우리가 하는 일이 탄력을 받게 되었고, 윤이상 선생도 동경에서 모든 정치적 활동을 중단 한다는 발표를 하면서 한국 정부와 물밑 교섭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윤선생에게 먼저 건강이 어떠신지 물었다.
긴 소파에 약간 비스듬히 앉은 선생은 거동이 불편하고 얼굴이 좀 부어있는 듯 보였다.

"
내가 심장이 좀 안 좋습니다." 라며 말꼬리를 흐리신다.

옆에서 부인이 요즘 날씨도 춥고 얼마 전부터 부쩍 건강에 더 신경을 쓰십니다라고 거드신다.

세월이 30년 가까이 흘렀지만 졸지에 독일에서 납치되어, 한국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2년이 넘는 수감 생활 중 머리를 감방 벽에 부딪쳐, 자살 시도를 할 정도였으니 그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이 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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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받고 있는 윤이상 선생 1967 11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경제적 업적도 크지만, 윤이상선생을 외국에서 불법 납치하여 고문하고 종신형을 선고 한 일은 지나친 일이었다.

결국 세계적인 예술가들 200여명이 들고 일어나, UN 인권위원회에 공동탄원을 해서 무기징역 형을 일단 유기징역으로 감형 받게 되였다

 서명한 예술가들은 스트라빈스키, 카라얀, 클렘펠러, 리게티, 스톡하우젠등이었다.

 윤선생이 "최사장은 음악을 한다지요?" 하고 물어서 "flute을 좀 합니다." 했더니 당신의 flute곡을 언급하며 언제 한 번 불어 보라고 하신다.

"
얼마 전에 '가락' 이라는 악보를 봤는데 연주하기는 물론이고 듣기도 쉽지 않습니다." 했더니 허허 웃으며 "자주 들으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신다.

소파 옆 탁자에 최근 발행 된 객석을 미리 준비 해 놓고, 필자에 대해 어느 정도 아시는 것으로 봐서, 우리의 방문을 오래 기다리셨다는 것이 인사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윤선생은 오랜 동지 임원식선생에게 강한 믿음이 있었다.

동백림 사건으로 검찰에서 사형을 구형 받고 계속 재판이 진행 될 때, 윤선생을 아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임선생이 재판에 출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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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식선생  1919 - 2002

 

"윤 이상은 음악가이지 절대 빨갱이가 아니다" 라고 증언하고 그 후 15년 형으로 감형 될 때까지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을 하여 재판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에 아무도 나서지 않는 살벌한 상황에서, 대단한 용기와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윤선생이 독일로 돌아간 뒤에도 임선생은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윤이상 작품을 지휘 하였으며, 베를린 교향악단에서 객원 지휘자로 초청 했을 때에도 그의 작품 '무악' 을 첫 곡으로 지휘했다.

 윤선생의 부인도 같이 옥고를 치러서 임선생에 대한 신뢰가 강하신 것 같았다.

잠시 서로 안부 인사를 나눈 후 한국 초청 일정과 윤 선생의 친필 악보를  예음문화재단에 기증하는 협의를 시작 했다.

윤선생이 먼저 붉은 글씨의 "절대비밀"로 시작하는 메모지를 필자에게 건네 주었다.

한문이 많고 손으로 쓴 글씨라서 자세히 읽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친필 악보에 대한 결심을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내 악보 중 1980년 이전 것은 출판사 소속이고 그 이후 것은 내 소유지요.

사실 내 소유의 곡들이 훨씬 더 음악적 원숙성과 국제적 평가가 좋은 곡들입니다.

이 악보들 만이라도 내 고향이 있는 남한 땅에 영구히 보관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당분간 절대비밀로 해 주세요" 

 

'북한당국과 이 문제를 상의 하셨냐?' 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선생님의 뜻이 잘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한국 감옥에 있을 때 임선생만 나를 도와줬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임원식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따스했다.

임선생이 겸연쩍은 듯 씩 웃었다.

두 분의 나이 차이가 2년이지만 친구처럼 막역한 사이라는 것을 느꼈다.

 

윤선생이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요즘 내 건강이 별로 좋지 못해요... 이 악보 문제를 하루 속히 매듭짓고 싶소이다."

 

나와 임선생의 눈빛이 마주쳤고 윤선생이 계속 말했다.  

"최사장과 임선생이 한국에서 논의 한대로 해주면 고맙겠어요."

 

 윤선생이 예음에 친필 악보를 기증하는 조건으로 사전에 제시한 내용이 있었으나

그 자리에서 언급하지는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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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생이 자필로 절대비밀이라고 쓴 본인의 악보 보관에 대한 구상. 


3시간쯤 대화를 나눈 후 저녁을 댁에서 같이 하자는 권유를, 윤선생이 피로해 보여서 사양하고, 대신 곧 서울에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선생은 그 특유의 포옹식 인사를 하면서 곧 서울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이 때만 해도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인지는 몰랐다.
동그란 얼굴의 부인께서 문 밖까지 나와서 정중히 배웅을 해 주셨다.

이 후 한국 정부와 계속 진행 사항을 의논하면서 독일에 예음문화재단의 김용현상무를 보내서 실무적인 일을 추진하도록 했다.

그 동안 윤선생은 한국의 남도창을 서양 음악에 접목 시켜보려는 의욕으로 월간객석에 좋은 글을 기고 해 주시면서 귀국 후의 음악활동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연구에 참고 하시라고 안숙선 명창의 CD도 몇 곡 보내드렸다.

 
드디어 1994 9월에 한국에서 윤이상 음악 축제를 열고, 이에 맞추어 귀국 하기로 최종 일정이 잡혔다. 
  

공항에 도착하면 당시 경원대학 부속병원 앰브란스차로 고향 통영을 방문하고, 다음 날 청와대로 가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는 일정까지 확정 되었다.


윤선생을 직접 모시러 음악 축제 며칠 전에 예음의 김용현 상무가 베를린으로 떠났다.

건강이 좀 걱정은 되지만 이제 비행기만 타고 오시면 된다.


귀국을 앞 둔 하루 전 독일에서 김 상무로부터 전화가 왔다.
갑자기 돌발사태가 발생하여 윤선생의 귀국이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돌발사태인지 전화로 말을 하기는 곤란하다고 하였다. 

후에 알려지기로 이 초청이 무산 된 것은 한국 정부가 윤선생에게 그간 행적에 대한 지나친 사과를 요구 했고 이를 윤 선생이 거절 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사실 당시 김영삼정부가 출범 초기보다는 대북 강경기조로 돌아서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여곡절이 좀 있긴 했으나 당시 정부와 오간 대화는 많이 수정되어 윤선생의 체면을 살릴 정도의 문구로 충분히 합의가 되어 있었다.

윤선생이 일본에서 정치 활동에 손을 떼겠다고 발표했던 일도, 쌍방의 암묵적 합의 하에 진행 되었던 일이다.

무엇보다 윤선생 자신이 건강이 별로 안 좋은 상태에서 만년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예음의 김상무가 독일에서 돌아왔다.

 출국 하루 전 윤 선생을 만났더니 돌연 모든 일정을 취소 한다고 하면서, 대단히 미안 하다는 말을 최사장에게 간곡히 전해 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사연인즉 어제 밤 북한사람 몇 명이 베를린에 와서 윤선생을 만났는데, 그들이 하루 만에 윤선생의 마음을 어이없게 돌려 놓았다는 것이다.

당시 외국에 살고 있던 윤선생의 가족에 대한 모종의 협박을 했고, 만약 귀국을 강행 한다면 심지어는 내일 귀국 할 비행기에 폭탄 설치 계획이 있다는 말도 했다는 것이다.
김현희가 KAL기를 폭파한 사건이 아직 국민들의 뇌리에 많이 남아있을 때였다.

이 후 서울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다시 귀국을 간곡히 설득 해 보았으나 결국 윤선생은 고향에 오는 것을 포기 했다.

북한 사람들의 협박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 동안 북한과의 관계가 여러모로 너무 깊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상당히 컸다.

윤선생은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를 책으로 낸 적이 있는데 그 제목이 "상처 입은 용"이었다. 
  

귀국이 좌절되자 이 제목이 다시 떠 올랐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정권이 몇 번 바뀌면서 한국에서 윤선생에 대한 몇 가지 사업이 합법적으로 추진되고, 고향 통영에는 그의 기념관까지 정부에서 거액을 들여 설립 했으니 격세지감이 있다.

윤선생은 통영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공부하고 국내에서 교편을 잡고 작곡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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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 된 나이에 더 공부하기 위해 조국을 떠났고, 북한에 한 번 다녀 온 후, 독일에서 한국 정보부에 납치되어 수감생활을 하고, 다시 독일로 가 독일 시민이 되었다.

그 후 북한을 여러 번 방문 하였으나 한국은 한번도 오지 못했다.

우리가 추진한 귀국이 마지막 기회였으나 그것이 무산 된지 약 1년 후 선생은 베를린에서 파란 만장한 인생을 마치게 된다.

그는 현재 북한과 독일에서 그리고 반대도 있지만 한국에서 세계적인 음악가로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음악제가 열리고 있다.

세 국가에서 동시에 기념하며 추모를 하는 음악가는 윤이상 선생이 유일하지 싶다.

 

윤이상음악회.jpg

평양에서 열린 제32차 윤이상 음악회.  2013 9 24-26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예술은 아니, 음악은 펜이나 이데올로기보다 강한 것인가...

고국에 돌아와 묻히고 싶었으나 그 꿈이 좌절된 "상처 입은 용, 윤이상 선생"

그의 귀국을 한 때 추진했던 사람으로 안타깝고 애석한 마음을 지금도 금할 수 없다.
 
인터넷 세상이 된 요즘 '민족주의자'라는 말의 해석도 많이 변했는데, 당시 윤선생의 민족에 대한 개념은 다음과 같았다.

"정치 이데올로기는 길게 보면 활엽수처럼 계절에 따라 무성하고, 착색되고, 낙엽이 지는 것이지만, 민족은 창공처럼 엄숙하고 영원한 것이다.

윤 이상 선생이 들어보라고 하신 fluet "가락"을 다시 한번 들어 봐야겠다.

 

[크기변환]가락.jpg

가락:  https://www.youtube.com/watch?v=qdWrFS5PeFI


      

후기) 윤이상선생의 유해가 2018 225일 부인의 손으로 고향 통영으로 돌아왔다.
같은 날 통영시에서 반대집회도 있었다.

유해 충무.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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