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이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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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네버랜드와 김포매립지에서 만난 팝의 제왕

wy 0 20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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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많은 추모 행사가 있음 직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얼마 전 공개된 다큐멘터리 ‘리빙 네버랜드’ (Leaving Neverland) 가 찬물을 끼얹었다.

 

사람들은 아동 성추행 문제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 대해 아직도 갑론을박 하고 있다.

 

미국 독립 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리빙 네버랜드'는 마이클 잭슨에게 어렸을 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30대의 두 남자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 따르면 마이클은 어린 두 소년에게 부적절한 행위를 하게 하고 보석을 선물로 줬다고 한다.

 

이에 대해 마이클 잭슨 재단은 "20년 전 무죄를 받은 사건에 다시 불을 붙이는 터무니없고 한심한 시도"라고 비난했다.

 

그의 아동 성추행 문제가 불거진 것은 1993년 ‘이반 챈들러’에게 소송을 당하면서부터이다.

 

이반은 자기 아들 ‘조디’가 마이클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으나 조디는 이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모든 것을 아버지가 시켜서 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부자지간에 법정 다툼을 했고 아버지 이반 챈들러는 2009년 11월 5일 자택에서 자살한다.

 

그의 자살은 같은 해 6월에 사망한 마이클 잭슨의 죽음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2005년에도 아동 성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지만, 마이클 잭슨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였다.

 

음악, 안무, 패션에 걸쳐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긴 최고의 아이콘이다.

 

마이클 잭슨은 오디오와 비디오의 세계를 함께 평정한 가장 창의적인 엔터테이너였다.

 

게다가 그의 삶에는 인종 문제, 얼굴 성형 문제, 아동 성추행 루머등이 확대 재생산되어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마이클은 평화를 사랑하고 자선활동을 많이 했으며, 특히 전 세계의 고통 받는 어린이들을 기억하자는 뜻으로 팔에 완장을 차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 겸 패션이 되었다.

 

 

1997년 가을, 지인의 소개로 마이클 잭슨의 집에 가게 되었다.

 

산타바바라 북동쪽에 있는 ‘네버랜드’ (Neverland)라는 대 저택으로 땅의 넓이가 여의도의 3배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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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랜드’는 동화 ‘피터팬’에 등장하는 상상의 섬으로 아이들만 사는 곳이다.


‘Never getting old land’ 에서 나온 말로서 거기 사는 사람들은 결코 늙지 않는다.

 

과연 소문대로 Neverland 안에는 동물원이 있고 기차가 다니고 있었다.

 

마이클이 주거하는 본채와 몇 개의 게스트 하우스, 수영장, 댄스 스튜디오, 영화관, 기차역 등이 있는 별천지였다.  

 

기차역의 이름은 마이클이 엄마의 이름을 따서 ‘캐설린 역’으로 지었다. 

 

그녀는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고 마이클도 한때는 신도로서 활동했었다.

 

캐설린 역에는 따끈따끈한 빵과 커피가 늘 준비되어 있었다.

 

처음 둘러 본 네버랜드에는 라마, 기린, 타조 등 어린이가 좋아할 만한 동물들이 자유롭게 돌아 다녔다.

 

본관 앞 넓은 호수에는 백조들이 유유히 떠 있는 동화 속 환상의 나라였다.

 

동물을 관리하는 사람들만 수 십 명 되는데 귀한 동물은, 한 마리에 사육사가 한 사람씩 붙어다녔다.

 

간혹 동물들이 네버랜드 밖으로 튀어 나가서 동네 사람들이 소송을 건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본관 옆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묶었는데 마이클 잭슨과 절친한 리즈 테일러가 올 때 마다 머무는 별동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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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즈 테일러가 오면 묶는 별동 건물

 

마이클 잭슨의 첫 인상은 수줍음이 많은 청소년 같았다.

 

하지만 악수하는 그의 손은 크고 단단했다.

 

그는 백인이 되고 싶어서 피부를 벗기는 박피 수술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사실은 피부병의 일종인 백반증으로 평소에도 긴 팔 옷과 마스크를 착용한다.

 

나를 만날 때 다행히 마스크를 쓰고 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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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의 성형으로 코가 안 좋은 상태라는 루머가 있어서 유심히 봤다.

 

그래서 그런지 코가 살짝 이지러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계속 쳐다보기가 민망했다.

 

가장 특이한 부분은 그의 큰 눈인데 깊은 슬픔을 간직한 눈이었다.

 

피터 팬에 나오는 장난꾸러기 요정의 눈도 그 안에 언뜻 있었다.

 

나는 그의 음악 세계를 잘 모르고 열성 팬도 아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마이클 잭슨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는 표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존재였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느낌.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닌 얼굴.

 

천사와 유령이 같이 어울려 노는 분위기.

 

어른과 아이를 수시로 넘나드는 정신 세계

 

이 모든 것들이 마이클 잭슨이라는 한 사람 안에 있었다.

 

그의 팬들이 왜 그를 그토록 우상화하고 그의 음악에 매료되는지 약간 이해가 되었다.

 

 

네버랜드의 본관 식당은 열린 주방(Open Kitchen)으로 항상 요리사 2-3명이 대기하면서 음식을 주문하면 곧 만들어 주었다.

  

마이클과 함께 네버랜드 안에 있는 영화관에서 그의 공연 실황을 보았다.

 

자신의 과거 공연을 여러 번 보면서 계속 노래와 동작들을 분석하며 메모를 한다.

 

팝의 제왕은 천부적 재질뿐 아니라 엄청난 땀방울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팬들에게 미안하지만 극장에서 본 마이클의 공연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하얀 종이와 작은 몽당 연필로 분주히 메모를 하고 있는 마이클의 옆 모습만 희미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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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부분 우울한 얼굴이었고 손님들과 별로 대화를 즐기지 않았다.

 

그의 운전기사는 마이클이  집에서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마이클의 안내로 들어가 본 그의 침실은 바닥과 벽까지 온통 인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문을 여는 순간 크기와 색깔이 다른 수 많은 인형의 눈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방을 나와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최: 이 아름다운 네버랜드에 어린이들이 단체로 자주 놀러 오는지?


MJ: 그렇게 하고 싶지만 여러 법적인 제제가 있어서 어렵다.

 

최: 당신의 다른 노래는 잘 모르고 옛날 노래 ben과 I will be there 를 좋아한다.

 

맑고 가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약간 흔들리면서 아름다운 바이브레이숀이 참 좋다.

 


MJ: 고맙다. 혹시 음악을 하는지?

 

옆에 있던 지인이 필자가 flute를 했다는 설명을 했다.


MJ: 나도 flute을 좋아한다.

 

최: 당신은 철저한 채식주의자라고 들었는데 사실인지?


MJ: 그렇다.  한국 음식 중 비빔밥을 좋아한다.

.

최: 한국에 당신의 팬이 대단히 많다.

 

우리가 초청할 테니 한국에 꼭 와 달라.


MJ: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가보고 싶다.

 

 

마이클 잭슨은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공연을 하고 싶어했다.

 

여러 대형 기획사가 그의 공연을 추진하기 위해 정부 허가를 신청했었다.

 

하지만 당시 김영삼 정부는 공연에 따른 외화 반출량이 엄청날 것이고, 마이클 잭슨의 춤이 너무 자극적이라며 공연을 불허했다.

 

기독교 장로인 김영삼대통령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더욱이 당시 그의  ‘아동 성추행’ 루머가 언론에 한참 시끄러울 때였다.

 

마이클 잭슨은 한국에서의 부정적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한복을 입고 사진도 찍었으나 YS정부에서는 공연을 할 수 없었다.


[크기변환][크기변환][크기변환]잭슨 한복.jpg

 

YS가 직접 그의 공연을 불허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결과적으로 마이클 잭슨은 DJ의 대통령 당선에 1등 공신이 되었다.

 

15대 대선 직전인 1997년 11월 21일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방문한 마이클 잭슨의 사진이 신문 1면에 일제히 나왔다.

 

그의 팬들은 환호했고 DJ의 이미지를 예술적이고 부드러운 인물로 탈바꿈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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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마이클을 만난 목적은 당시 동아건설의 김포 매립지 개발을 위해 그를 한국에 초청하기 위함이었다.

 

몇 달 후 잭슨이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그의 사생활 문제가 다시 언론에 불거져 심기가 편치 않을 때였다.

 

한국의 힐튼 호텔에 여장을 풀자 그의 팬들이 호텔 밖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이클이 어디를 가던 그의 매니저가 그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데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심지어는 화장실 바로 앞에까지 따라가서 서 있을 정도였다.

 

감옥의 죄수가 따로 없었다.

 

키가 크고 얼굴이 까만 매니저는 마이클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얼마 후 이 매니저와 마이클이 결별을 하게 되지만 당시 마이클은 이 사람의 눈치를 일일이 보며 야단 맞는 강아지처럼 행동했다.

 

무슨 큰 약점을 잡힌 건 아닌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5살 때 데뷰 한 후 매스컴에 둘러 쌓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24시간 보호 아닌 보호를 받으며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 비밀스러운 한 단면을 엿보는 것 같았다.

 

 

당시 동아는 김포 매립지에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동아는 다른 공사 다 안 해도 그 땅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서울에서 가까운 위치에, 개발 가능성이 무한했기 때문이다.

 

도착 다음 날 마이클 잭슨을 데리고 김포 땅을 돌아 보았다.

 

그가 묵고 있던 서울 힐튼 호텔에서 50분만에 도착 한 후, 인천 공항이 바로 지척인 것을 설명해주니 많은 관심을 보였다. 

 

마이클 잭슨과 동아가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외국 투자 은행 자금을 유치하여, 이 넓은 단지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구체적 방법까지 의논하였다.

 

우리는 큰 봉고차로 매니저와 경호원 등 7-8명 정도가 늘 같이 이동을 했다.

 

마이클과 내가 마주 보고 앉아서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서울로 돌아오던 중 그에게 'Peter Paul and Mary'의 노래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내가 그들의 팬이라고 하니 자기도 아주 좋아한다면서 어떤 노래를 좋아하냐고 되물었다.


'Puff'를 좋아한다고 하자 그는 갑자기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Puff the magic Dragon ~'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어느 해변가의 어린 소년과 그 바다에 살던 용에 대한 동요같이 아름답지만 슬픈 노래다.

 

가늘고 맑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 모르는 음소리가 자동차 안에서 작게 들리기 시작하는데 너무 매혹적이었다.

 

FM 라디오에서 나올 법한 아름다운 노래가 분명히 그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 노래를 신나게 부르는 마이클의 모습은 진한 감동이었고, 네버랜드의 피터팬을 좋아하는 어린 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도 조금 후에 같이 흥얼거리며 2절까지 따라 불렀고 차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국에서 나 말고 마이클 잭슨과 듀엣 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하는 농담을 했다.

 

 

그날 저녁 서울 장충동에서 동아 최원석 회장 주최로 만찬이 있었다.

 

마이클은 술을 안 마시지만 이 날은 기분이 좋은지 ‘로마네 콘티’에 입술을 대었다.

 

채식주의자인 그를 위해 신라호텔에서 산채 비빔밥과 고기 안 넣은 마파두부도 준비 했다.

 

김포 매립지를 한국정부가 용도 변경 해 준다면, 이 곳을 한국의 최고 관광명소로 만드는데 힘을 합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

 

우리는 모두 의기 투합하여 대단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이클 잭슨을 접대하는 자리라서 아무도 노래는 하지 않았고, 그에게 노래 한 곡 해 보라고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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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잭슨과 필자  1997년 11월  서울 장충동에서 

 

이 후 미국으로 돌아 간 그와 연락을 취하면서 동아는 한국 정부의 합당한 조치를 기다렸으나 곧 이어 국가부도 사태가 나면서 이 계획은 너무나 아쉽게도 수포로 돌아갔다.

 

원래 김포 매립지는 박정희대통령이 1970년대 초에 동아 창업주 최준문 회장에게 매립 공사를 하도록 강요한 땅이다.

 

아산 매립지는 현대에, 김포는 동아에 회사의 자체 자금으로 일단 농업 단지를 조성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당시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이 땅에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포는 서울의 관문이라 여기에 미국의 디즈니랜드 같은 대규모 관광 시설을 집어 넣고 국제화 된 도시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것은 위치 상으로나 그 땅의 성질상 대단히 합당한 발상이었다.

 

그 땅은 낮은 바다를 메운 땅이라 소금이 너무 많이 나와서 도저히 농사는 질 수 없는 곳이었다.


 IMF가 발생하자 동아는 단기 자금경색을 막지 못했고, 정부와 채권단에서 전 건설부 장관을 회장으로 파견하였다.

 

새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김포 땅을 모두 헐 값에 여기저기 팔아버렸다.

 

정부는 이 땅이 팔리자 기다렸다는 듯, 대부분 형질 변경을 허가하여 다른 용도로 개발을 허가해 주었다.

 

지금의 청라단지다. 

 

 

2005년, 아동 성추행 혐의에 대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마이클 잭슨은 ‘This Is It’이라는 콘서트 시리즈를 통해 화려한 컴백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콘서트는 영국 런던에서 2009년 7월부터 2010년 3월까지 50회 진행 될 예정이었다.

 

전 세계의 팬들은 열광했고 백 만장의 표는 판매 4시간만에 모두 매진 되었다.

 

마이클은 이 공연의 연습을 위해 너무 과로한 나머지 잠을 잘 수 없었다.


‘프로포폴’은 우유빛의 수면 마취제로 대장 내시경을 할 때 많이 사용된다.

 

순간적으로 수면에 떨어지는 장점이 있으나 반드시 병원에서 적당량을 투입해야 하고 습관성 마약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불면증이 심해지고 어떠한 경구약도 듣지 않으면 이 우유빛 약의 유혹을 받는다.

 

 

마이클 잭슨은 2009년 6월 25일 오후 2시 프로포폴 부작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한국에서도 종종 유명 연예인들이 불법 프로포폴 주사로 구속이 되고, 모 재벌은 병원에서 이 주사를 여러 번 맞았는데 위법성이 있는지 조사를 받기도 했다.

 

LA 경찰은 잭슨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고, 머레이는 2급 살인죄로 2011년 9월 유죄 판결을 받는다.

 

머레이는 마이클의 집에 상주하며 한 달에 150만불의 보수를 받았다.

 

마이클은 프로포폴을 맞으면 소변을 보러 화장실을 갈 수 없기 때문에, 머레이는 그에게 소변줄을 부착했다.

 

머레이의 법정 진술에 의하면 프로포폴에 중독된 마이클을 다른 약으로 재우려 했으나, 그의 강요로 할 수 없이 주사했다는 것이다.

 

그는 마이클이 프로포폴 쇼크로 사경을 헤맬 때 1시간을 허비한 후 구급차를 불렀다.

 

본인도 피곤해서 화장실에서 자고 있었다고 진술 했으나 여러 의문이 제기 되었다.

 

결국 주치의는 징역 4년을 선고 받고 의사 면허도 박탈되었다.

 

마이클 잭슨의 죽음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여러 방송국에서 추도식을 생중계 했다. 

 

사망 직후 그를 기리기 위해 미국 의회에서는 정치인이자 목사인 재시 잭슨의 주도하에 국회의원들의 묵념이 있었다.

 

 

필자는 마이클 잭슨이 갑자기 약물 과잉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리를 듣자, 이상하게 한국에서 그를 철저히 감시하던 키가 큰 매니저의 얼굴이 떠 올랐다.

 

마이클은 5살부터 아버지의 강요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야 했다.

 

그의 춤 중에 좀 외설스러운 동작은, 어쩌면 어려서 스트립 바까지 가서 노래를 하며 돈을 벌어야 했던, 마이클의 뇌리에 남아 있는 무언가가 표출된 것이 아닐까.

 

모짜르트의 아버지가 자식을 강훈련 시킨 것처럼 마이클도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만든 기계적인 천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뿌리 깊었던 인종 장벽을 무너뜨리며 흑인의 성공적인 사회 진출을 이룩한 선구자였다.

 

또한 대중 음악에 시각적 요소를 부각시키며 음악 산업을 뒤집어 놓았다.

 

그의 대표적 율동인 ‘문 워크’나 ‘중력을 거스르는 댄스’등은 지금 봐도 압권이다.

 

마이클 잭슨은 20세기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영원한 팝의 제왕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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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부터, 매니저로부터, 언론으로부터 풀려난 마이클 잭슨이 그의 우상 '피터 팬'을 만나러 간 지 10여 년이 되었다.

 

네버랜드도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팔려서 이름이 바뀌었다.

 

김포 매립지에서 서울로 올 때 그가 차 안에서 부르던 노래 ' puff the magic dragon lived by the sea~'(바닷가에 Puff 라는 마술 용이 살고 있었네~) 라는 가사만 허공을 맴 돈다.

 

마이클 잭슨이 어린 소년일 때 부른 ‘Ben’을 다시 듣고 싶다.

 

Ben -  https://www.youtube.com/watch?v=uNEClGJkV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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