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시내에서 ‘전주비빔밥’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비빔밥을 먹고, 이남곡선생이 살고 있는 '장수'로 향했다.
덕유산을 끼고 무주, 진천, 장수가 모두 계곡이 깊어서 ‘무진장’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 중 장수군(長水郡 )은 특히 무분별한 개발에서 벗어나 여전히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의 큰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좋은 마을’이란 작은 간판이 서 있다.
그 길을 자동차로 2-3분 오르니 깊은 계곡 사이로 집들이 몇 채 보이고, 넓은 평지에 어른 가슴 높이의 고동색 된장 항아리들이 오후 햇빛을 반짝이며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항아리 주인 이남곡선생의 소탈한 웃음이 우리 일행을 골목 입구부터 반겨주었다.
그는 고희를 넘긴 지 오래지만 유머 감각이 뛰어난 헌칠한 자태의 인문 운동가였다.
최: 이남곡 선생님, 반갑습니다.
여기가 ‘좋은 된장’을 만드는 천혜의 된장 공장이고, 선생님이 공장장겸 사장님이신가요?
이: 요즘은 저의 아들이 운영을 하고 있어요.
된장은 물과 햇볕이 중요한데 여기서 10년 전부터 좋은 된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최: 얼만 전 내신 책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을 읽었습니다.
책 제목이 좋고 공자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한때 저도 공자님을 ‘진부한 보수의 상징’이라는 거부감을 가졌으나, 논어를 공부하면서 ‘아집이 없는 자유인, 소통의 달인’ 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최: 공자님이 말씀하신 ‘4무’와 관련이 있나요?
이: 그렇지요. 4무는 무의, 무필, 무고, 무아(毋意 毋必 毋固 毋我) 인데 논어, 자한편에 나오지요.
즉 공자님은 4가지를 끊었으니,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없으며, 고정하지 않고, 자의식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으로 읽힙니다.
최: 공자님은 인(仁)과 서(恕)를 강조하셨는데 용서(容恕)와 그냥 서(恕)는 어떻게 다른가요?
이: 네, 어쩌면 이것이 공자 사상의 깊이를 나타내는지도 모릅니다.
서(恕)는 용서의 서와 같은 한문이지만 용서와는 다릅니다.
용서는 마음에 남는 무엇이 있지만 서(恕)는 마음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옳고 너는 틀려서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지요.
최: 선생님은 30대 초반에 ‘남민전’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서 잠시 활동했었고, 이 문제로 4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활동 중 일부가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되기도 하는데 4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저는 대학 시절에 민주화 운동과 사회 변혁 운동을 했었고 이후 농촌 지역에서 교육 관련 운동도 하였습니다.
저는 자생적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당연히 친북적이었지요.
그러다가 북쪽의 개인 숭배를 접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비록 남쪽이 모순이 많더라도 사회주의는 오히려 남쪽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유신 시대와 겹치면서 70년대 말 이른바 남민전과 연계되었습니다.
그 단체에서 비밀리에 석 달 정도 활동한 후, 제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결별했지요.
남민전과 연락을 끊기 위해 직장도 그만두고 집에서도 떠났습니다.
저는 1년 후 국가 기관에 체포 되어 남영동으로 끌려 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남민전에서 활동한 석 달로서 충분했지요.
그들의 허점과 허상이 너무 잘 보이니까 스스로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하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5년 형을 받았는데 1년 일찍 가석방 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에 대해 나름대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신영복씨도 감옥에서 만났지요.
저는 북에 대한 모든 환상이 사라졌는데 80년대에 주체 사상이 운동권에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황당했어요.
최: 당시 남민전은 무장혁명이 목표였는데 어처구니 없는 강도사건으로 전모가 밝혀졌습니다.
이: 네. 당시 우리 구성원이 누군지,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어요.
철저한 점조직이었지요.
최: 기록에 따르면 1977년 1월 남민전은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를 밀반출해 비축하고 사제폭탄을 제작합니다.
이들 중 일부는 스스로를 의적이라고 생각하며, 1978년부터 부자들의 집에 들어가 절도행각을 했지요.
1979년 4월 D그룹 C모 회장의 자택과 동대문구 휘경동의 G모 사장 집에 침입하는등 몇 차례의 강도 행위로 50여만원 상당의 금품을 털고 경비를 단도로 찌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남곡 선생님은 당시 이런 일은 전혀 모르셨지만 이 과정에서 한 사람이 체포되면서 남민전의 전모가 들어나기 시작합니다.
당시 중형을 받은 사람들 중 MB정권의 실세였던 이모씨, 현재 여당 국회의원 이모씨, 파리에서 도피 생활을 한 후 소설을 쓴 홍모씨도 있지요.
선생님의 그때 이름이 5년형 선고자 명단에 있더군요.
이: 네, 당시 제 이름은 계천(啓天)이었는데 이후 남곡(南谷)으로 바꾸었어요.
이름이 너무 커서 고생한다는 생각에 조용히 남쪽 골짜기로 내려온 거지요 ㅎㅎ
최: 요즘 한국 사회의 분열이 심각합니다.
증오와 갈등이 극에 달하고 편가르기와 진영 논리가 모든 것을 덮고 있습니다.
이런 때 공자님의 말씀이 어떤 덕이 되나요?
전북 장수 이남곡선생 댁에서- 좌로부터 안바나바 정지석 최원영 이남곡(존칭생략) 2019 8 17
이: 공자님은 알고 보면 대단히 폭이 넓고 자유로운 분이었지요.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에 제일 먼저 나오는 공자님 말씀이 있습니다.
‘無適無莫 義之與比’ 라는 한문인데 “세상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고, 오직 의를 따를 뿐이다.” 라는 뜻이지요.
저는 인문 운동의 도구로 나이 60이 넘어 처음 접한 논어를 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으며 조선을 망하게 한 원인의 하나로 지목되어온 유학은 공자를 너무 왜곡한 것이었지요.
공자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사문난적(斯文亂賊)류의 편싸움에서 벗어나는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마치 TV 역사 드라마에서 보듯이 상대방을 적폐, 토착 왜구, 좌빨 등의 단어를 구사하며 사문난적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국민의 살림살이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정권욕만 차고 넘침니다.
촛불이 그 빛을 잃어가고 있고 현 정권에 대한 기대가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최: 네, 이런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 '좌도우기'(左道右器)의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이상이나 목표는 좌파처럼 하고 그 실행은 우파의 방법을 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좌우의 연정이나 합작을 하는 거지요.
최: 내각 책임제가 아닌데 가능할까요?
이: 대통령 중심제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왼쪽의 이상을 오른쪽의 방법으로 해결하면 됩니다.
말하자면 ‘새 술을 헌 부대’에 담는 것이지요.
당장 '대통령중심제'라는 부대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또 내각책임제라고 해서 ‘좌도우기’가 반드시 잘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강력한 리더쉽이 있는 대통령이 경제 문제는 양심적이고 유능한 우파를, 양극화 해소나 복지 문제 등은 합리적이고 소신 있는 좌파를 같은 국무회의에 앉히는 거에요.
그렇게 새 술을 담으면 되는데 저는 사실 이런 협치를 문재인 정부가 시작될 때 기대했었지요.
이제는 어려워졌지만 다음에 누가 정권을 잡든지 이렇게 ‘좌도우기’의 마음으로 국정 운영을 하면 좋겠습니다.
산업화, 민주화 주도세력의 반목 대립에서 시대 교체를 담는 수준으로 융합하면서 뛰어올라야 하는데, 인물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최: 저기 벽에 걸린 족자 '이문회우 이우보인' (以文會友 以友輔仁) 은 무슨 뜻인가요?
이: "군자는 학문으로써 친구를 모으고, 친구를 통하여 인의 수준을 향상시킨다."는 뜻인데 논어 ‘안연’ 편의 끝 문장입니다.
공자의 제자 '증자'의 글이지요.
최: 공자님의 가르침이 종교는 아니겠지만 종교와 종교의 만남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공자님도 좋아하시겠지요?
이: 제가 종교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기독교나 불교 모두 예수나 석가 이후, 제자들이 기틀을 만든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원래의 취지와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겁니다.
근본적으로 종교가 인간 의식의 향상과 과학의 발전을 인정치 못하고, 복 받고 돈 벌기 위한 종교로 머물면 앞으로 그런 종교는 점점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유럽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요.
만약 종교가 공자의 사상을 새로 배우고 포용한다면 종교끼리의 대화도 아무 문제 없을 것이고 세계 평화에 크게 기여하겠지요.
왜냐하면 종교의 본질은 아집을 벗어나는 것인데 오히려 강고한 아집, 집단 아집을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최: 선생님께서 교회나 절에 가서 강연을 좀 해주시지요. ㅎㅎ
이제 통일 문제에 대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한국은 앞으로 어떤 통일을 해야 할까요?
이: 우리는 월남식도 독일식도 적합치 않습니다.
월남식이라면 이북이 남한을 공산주의로 통일하는 것인데 그런 이야기는 끝난 지 오래지요.
남남 갈등이 심해서 걱정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북처럼 살 수 없는 것은 모두 압니다.
또 막말로 누가 남쪽을 송두리째 이북에 갔다 줘도 그들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중국이 홍콩도 다스리기 어려운데 이북에 남한이 들어가면 그들의 체제가 바로 무너집니다.
반대로 남쪽이 북을 흡수 통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아직은 어렵습니다.
지금 탈북자 관리도 못해서 그들이 굶어 죽는 판인데 2천만 북한 동포를 어떻게 감당합니까.
그래서 지금은 통일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국가 대 국가로서 공존하고 협력하는 시간을 상당 기간 가져야겠지요.
이러한 방향을 반통일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은 한 민족이 한 국가를 이루는 것을 최상의 선으로 생각하는데 같은 민족이 두 국가에서 살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옛날, 일본의 침략적인 방법이 아니라 앞으로는 아시아 연방 같은 것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때 남북이 서로 협력하면서 어떤 역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한 30년 지나다 보면 또 적절한 방법으로 통일이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유럽의 EU가 그래서 생긴 것이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위해서 '국가'라는 것의 정의가 바뀔 수도있겠지요.
지금 김정은에게 우리가 걸 수 있는 희망은 그가 계몽군주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대에서 세습을 끊고 인민을 위해 경제 발전을 이루는 거지요.
4대 세습은 어차피 불가능 할테니 서서히 집단 지도 체제로 바꾸면서 경제 발전에 전념하여 중국과 같은 발전을 이루면 본인도 큰 업적이지요.
최: 마지막으로 앞으로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해 한 말씀 해 주시지요.
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어쩌면 유일한 방법은 다음 대통령을 ‘좌도우기’ 국무회의를 구성할 수 있는 인물로 뽑는 것입니다.
박정희와 김대중을 같이 품을 수 있는 대통령이 나와야 합니다.
국가의 부(생산력)를 떨어뜨리지 않고, 양극화 해소 등 갈등을 해결하는 '새로운 문명의 선진 복지국가'를 향해 협치가 이루어져야 희망이 있습니다.
다음 정부가 그것을 할 수 있느냐에 국운이 갈릴 것으로 생각이 되는군요.
최: 오늘 오랜 시간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이: 여기까지 촌로(村老)를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남곡선생의 댁에서 내려다 본 황혼 풍경 (사진 이남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