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이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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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당 (心堂) 송상현 : 평생 대학 교수와 봉사 활동을 천직으로.. 권세에 눈길 돌려본 적 없다.

wy 0 2020.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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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헤이그 ICC(국제형사재판소)에서 2014

 

교수들의 정치 참여가 당연시 되고, 진영 논리가 난무하는 시대에 송상현 박사의 지나온 삶은 독보적이다.

 

아시아 지역 출신으로 ICC(국제형사재판소) 소장에 당선된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후 뛰어난 업무 능력으로, 방대한 조직의 재판소를 활성화시키는 탁월한 지도력을 6년간 발휘했다.

 

송상현 박사는 독립운동가 고하 송진우 선생의 손자이고 남재 김상협 고려대 총장의 사위다.

고매한 선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그는, 조선시대 한 문파를 이끈 학자의 모습이다.  

이야기를 풀어 가다 보니 적극적 활동가의 면모도 강했다. 

 

최: 송소장님, 오랜 만에 뵙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장을 오랜 기간 하셨으니 소장님으로 호칭하겠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송: 제가 몇 년 전에 많이 아팠어요.

ICC 일로 아프리카 여러 곳을 다녀 온 후,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걸려서 혼이 났는데 지금은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최: 먼저 ICC(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해 말씀 좀 해주시지요.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높지는 않습니다.  어떤 기관인가요?  

 

송: 인류는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오랫동안 지혜를 모아왔는데 ICC의 설립도 맥을 같이 합니다.

그동안 유엔이 국제사법재판소와 안보리의 집단안전보장이라는 두 가지 수단을 가지고 세계평화를 잘 유지해 왔지만 유엔시스템에서는 늘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어요

 

바로 전쟁, 침략, 집단학살 및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독재자 수괴를 잡아서 응분의 처벌을못한 것이지요. 이러한 간극을 메꾸기 위하여 국제형사재판소가 창설되었습니다. 

ICC는 어떤 권력자라도 무고한 민간인을 살상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면, 그 책임을 물어 국제법정에서 처벌할 수 있는 국제형사재판소입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존재가 억지효과를 주어 다시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해 설립되었지요.

 

대량 학살이 발생할 때마다 임시로 재판소를 설치하면, 경비와 시간이 엄청나게 들 뿐만 아니라 일시적 효과뿐이니까요.

영구적인 국제형사재판소를 설치함으로써 전쟁 책임자들을 신속하게 처벌하자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1998년 국제적 기본조약이 이루어져, 4년 만에 60개국의 비준으로 2002년 7월 1일 국제형사재판소가 문을 연 것입니다. 

ICC는 유엔과는 전혀 별도의 국제기구로서 앞으로 두 기구가 협력하여 세계평화에 훨씬 더 기여할 것으로 봅니다.

 

최: 북한 지도층들의 만행도 처벌 할 수 있나요? 

 

송: 북한은 ICC 회원국이 아니어서 김정은을 제소하려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회부결의가 필요한 데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반대하겠지요.

국제 사회에서는 북한의 인권이나 독재 문제는 아직 크게 부각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시리아의 아사드 같은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더 많지요.

물론 현실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은 방법이 없지만, 실각을 한다거나 망명을 하면 ICC에 압송해서 재판을 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독재자 여러 명을 이렇게 재판하고 단죄했지요.

 

최: 중국이나 미국도 ICC의 회원국인가요? 

 

송: 중국도 회원이 아니고 미국은 ICC 설립부터 오히려 방해를 했고 회원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가입하면 우선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침공한 문제 등이 거론되어 기소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요.

 

최: 6년간 소장으로 있으면서 ICC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셨나요?

 

송: ICC의 목표가 형사정의를 통한 지속적 평화 구현입니다. 그러나 ICC는 피고를 처벌하고 끝내는 게 아니고, 피해자들에게 경제적 지원과 정신적 치료까지 해줍니다.

즉 죄 있는 자를 처벌하는 응보적 정의에서 전쟁이나 학살 피해자를 위한 치유적, 회복적 정의까지 실현하는데, 이러한 패러다임으로 재판소의 운영방향을 전개 한 것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국제 기구 중 세계적 첨단을 간다고 자부합니다.

 

초대 비서실장이 네덜란드 4선 의원이고 한 당의 당수를 하다가 온 유명 현지 여성이었는데 어디 가면 저보다 제 비서를 사진 찍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요.

두 번째 비서실장은 옥스퍼드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여러 나라의 대사를 역임한 영국외교관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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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형사재판소장실   2014  11  08


최: 힘든 일도 많으셨지요?

 

송: 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아프리카의 분쟁 지역을 몇 차례 방문해 피해 마을을 돌아보며 그들을 위로하고 현지 실정을 직접 파악 했습니다.  

전세낸 유엔 비행기가 50년 넘은 고물이라 언제 떨어질지 모르고, 같이 뜨는 헬리콥터는 한 번 밀림에서 떨어지기도했지요.   의사와 간호사 및 통역외에 경호원이 평균 15명 따라붙고 1.5리터 생수 1000병과 기관총도 50문을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콩고, 우간다, 중앙아프리카 등지에서는 반군들이 마을 주민들의 손, , 코나 귀 또는 입술을 자르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현지에는 사지를 잃은 전쟁 피해자들이 워낙 많아서 ICC는 의수족 제작소를 세우고 이를 장착하여 자활하도록 도왔습니다.

 

반군들은 밤에 마을에 와서 12-3세 아이들을 납치하여 세뇌 교육과 사격 훈련을 시킨 후, 다시 마을에 와서 그들의 부모를 죽이라고 한 후 인육을 먹게 할 정도로 잔인합니다.

아이들이 다시는 마을로 못 돌아가게, 배신 못하게 하려는 것인데 우리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모든 피해자에게 의료 봉사와 직업 훈련을 기본적으로 제공하고, 소년병 출신 청소년에게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고귀함을 교육 하고 생업의 기초를 마련해줍니다.

강간 피해자의 트라우마 극복을 돕고자 심리 상담과 치료 프로그램도 운영하지요. 


최: 송소장님은 서울 법대 재학 중 행정, 사법고시 양과에 합격했는데도 평생 학자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어떤 철학이나 인생관이 있어서 그리 하신 건가요?

 

송: 제가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고 돌아온 후 여러 길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 후 상담한 선배 교수들이 한결 같이 “내 꼴을 봐라. 교수만 하지 말고 아무거나 해라.”고 했지요.

 

그래도 저는 저의 임명신청이 기각된 후 1년을 기다리다가 서울 법대 교수로 들어갔는데 말들이 많았어요.

”저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데 감추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판검사 안하고 대학에 올 리가 없다”라며 주위에서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교수 시작할 때부터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룹이 노인, 어린이 아니면 장애인이었는데 한국의 전통적인 효 사상에도 부합하는 것 같아서 처음에 노인들을 돕기 시작했는데 계속 의심의 눈초리로 보면서 송 아무개는 곧 국회의원 나가려고 한다는 소문이 나더군요.  

저를 순수하게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지금도 세상은 비슷할 지 모르지요.

 

노인 돕는 일에서 어린이 돕는 일로 바꾸었습니다.  어린이는 유권자가 아니니까..

지금 28년 째 한국 유니세프를 돕고 있고 현재는 회장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전부터 시설을 퇴소한 고아를 거두는 중간의 집, 베트남의 라이따이한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프로그램, 그리고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 등에서도 오랫동안 일했어요.

 

최: 정부의 요직을 하실 기회도 많으셨지요?

 

송: 제가 상당히 여러 번 출사를 요청 받았습니다.

대법관, 헌법재판소 재판관 등은 여러 번 접촉이 있었고 사정수석, 내무장관, 법무장관을 요청 받았었고 국무총리 제안도 받았지요.

 

만약 제가 박근혜 대통령 말기에 국무총리직을 수락했으면 황교안씨는 총리가 안 되었고 한국의 정치지형이 좀 달라졌겠지요.

 

최: 관직에 나가는 것도 나라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인데 끝까지 고사 하셨군요.

 

송: 절친한 친구가 저에게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솔직히 말해봐라. 그런 제안이 올 때 마음이 약간은 흔들리지 않았었나?”

“아니 전혀. 조금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는 평생 두 가지 일에 큰 영향을 받았네..

첫 번째는 고하 송진우 할아버지가 암살당하신 충격,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정치 쪽은 쳐다보지도 말자'라는 다짐을 아버지와 항상 하곤 했지.

 

 실은 아버지도 장면 내각 때 장관직 제의를 거절하셨었네. 장면 총리가 아버지의 담임 선생이었는데 아버지를 너무 좋아하셨어.” 

“그건 이해가 되지만,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생각이 바뀔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두 번째는 장인어른인 김상협 총장이 총리를 할 때 그 옆에서 그림자 보좌를 하면서 권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았지.

 총리직도 실권은 하나도 없으면서 퍽 힘든 자리더군. ”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최: 네, 그러셨군요.

고하 선생의 암살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도 배후가 밝혀진 바가 없지요?

주범인 한현우는 구속된 후 6.25때 탈옥하여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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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 송진우 1890 - 1945

 

송: 할아버지의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확인된 것은 없지요.

할아버지는 스케일이 커서 일부러 공산당 사람들을 동아일보에 채용하셨지요.

박헌영, 김준연 등이 기자로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북풍회, 화요회 계통의 좌파 인사들을 모두 한민당으로 포용하셨는데, 암살 당하신 후 구심점이 없어지자 대부분 탈당했어요.

김구 선생도 암살당하고 이후 6.25가 모든 것을 덮어버렸습니다.

 

임정요인들이 귀국 후 명월관 환영식에서 있었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45년 11월 23일에 임정 요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이분들은 국내 소식에 어둡고 경제적으로 극도로 어려웠지요.

고하선생이 환국지사후원회를 만든 후 당시 900만원을 모금하여 전달합니다.

 

최: 김구선생에게 직접 주셨나요?

 

송: 돈은 조완구라는 임정 재정부장이 받았다고해요.

그리고는 하는 말이 ”국내에서 목숨 부지한 사람은 친일 안 했으면 어떻게 살아남았어. 앞으로 다 숙청해야지” 하니까 옆에 있던 설산 장덕수가 “나 같은 사람도 숙청되겠네?” 하니 임정 출신인 해공 신익희가 “어디 설산 자네뿐인가”라고 했답니다.

 

이어서 “돈을 어찌 걷었는지는 모르나 친일파 돈도 많을텐데..”라고도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일본 유학생 동문들이었지요.

 

분위기가 나빠지자, 고하가 꾹 참다가 “여러분들이 객지에서 헛고생하셨구려.

이제 해방이 되었으면 중지를 모아서 새 나라를 세울 생각을 해야지, 지금 서로 싸우게 되었오? 나라를 세워서 세금을 받으면 깡패, 사기꾼, 매춘부가 낸 돈도 있는 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논쟁은 잦아들었지만 분위기가 계속 어색했을 겁니다.  


 

최: 동아일보의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에 대해, 고하선생이 만류했다는 기록이 어디에 있던데 사실인가요?

 

송: 네 말하기 참 조심스러운 부분인데…당시 인쇄소에 가서 일장기를 없앤 사람은 이길용 체육부 기자였어요. 

 

제가 어렸을 때 6.25전쟁 이후 납북되신 그분의 부인께서 우리 집에 와서, 일장기를 지운 것은 당시 사장인 고하선생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유감스럽게 내부 사정으로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가 기록되었지요.

 

  

최: 고려대 김상협총장께서 사위인 송소장님에 대한 신뢰가 컸었지요?

 

송: 아내와 결혼하기 전부터 세배도 가고 그 분의 지도를 받았었지요.

한국은 반도이므로 앞으로 바다로 적극 진출해야 한다며, 해상법을 공부하라는 말씀에 따라 제가 그 분야를 전공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최: 김상협총장님이 5공화국에서 총리를 하신 것은 좀 의외였는데요..

 

송: 총리로 징발당하신 셈이지요.ㅎㅎ

고대 총장 마치고 다음 날 외국을 나가려고 가족들끼리 식사를 하는데 누가 갑자기 찾아왔어요. 장세동씨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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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 김상협 1920 - 1995

  

장인어른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안면이 있었습니다.

유신 이후 계속 된 긴급조치 중 7호가 고려대를 상대로 선포한 건데, 당시 장인이 총장이셨지요.

군대가 진입하여 텐트치고, 밤에 군인들이 기숙사로 들어가,학생들 옷을 벗기고 마당에 엎드리게 하고, 식당에 들어가서는 냉장고에 있는 고기를 다 꺼내다 먹었습니다.

 

당시 현장 지휘관이 전두환 대령인데 그 때 총장을 만난 겁니다.

5공화국 정권이 정통성이 약하니 장인의 명성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요.


 

최: 이후 아웅산 사태로 그만 두셨지요?

 

송: 네, 노신영 안기부장에게서 아웅산 사태를 보고받은 장인이 바로 중앙청으로 가셨지요.

이후 사표를 내셨는데 받지를 않는 거에요. 국무총리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면서..

 

도저히 안되겠어서 당시 실세인 이학봉씨와 제가 담판을 한 일도 있지요.

도덕적 책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런 사태에 집권세력의 핵심이 아닌 총리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고 주장했지요.  

 

이런 일들을 바로 옆에서 보다 보니까 총리직도 허울뿐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평생 공부한 전공을 활용하여 나라 일을 하면 좋지만, 공연히 정치 근처에 얼씬 거리면 안 된다는 것이 제 철학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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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에서   2019  03  02 

 

최: 후배 법조인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지요.

 

송: 세계가 많이 바뀌었으니 전세계를 무대로 좌표를 정해서 정진하기를 바랍니다..

한국법조인의 우수성은 세계가 인정하는데 외국어가 안 돼서 좀 답답한 면이 있습니다.

바깥세상을 잘 보면서 진취적으로 나아가면, 우리 법조인들의 능력이 더욱 열매를 맺을 수 있겠지요.  

 

최: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계획이 있으신지요?

 

송: ICC 임기를 마치면서 네덜란드 외무장관이 환송 만찬을 열어주었습니다

이 때 네덜란드 왕의 훈장을 수여하면서, 저에게 귀화 요청을 정식으로 하더군요.

 

그러면서 “12년간 하는 일을 보니 당신처럼 여러 나라 상황을 다각도로 정리하여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당신의 국제정치감각, 판단력, 리더십과 실천력을 잘 보아왔다.

앞으로 당신의 경험을 네덜란드 정부에서 활용하고 싶은데, 우선 외무부 상임고문으로 5년간 있어달라.”는 겁니다.

 

물론 정중히 사양하고 바로 귀국길로 올랐지요.

한국에서 이런 기회가 있다면 몇 갑절 더 나라를 위하여 노력하면서 이런 경험을 좀 나누고 싶습니다

현재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법의 지배, 민주주의, 자유, 정의, 평화,기후변화 등의 증진을 위하여 노력한다는 전제하에 유엔의 지속가능한 발전목표(SDG), 그중에서도 특히 16번째 목표인 평화롭고,공정하고 포용적 사회를 구현하고자 여러 국제기관이나 세계 지도자들과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습니다.

 

최 :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송 :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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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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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138일간 고하와 몽양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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