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이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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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학사'를 설립한 종교학자 길희성: 21세기에는 종교를 넘어 영성으로 가야합니다.

wy 0 2020.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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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서편 산마루에 심도학사(尋道學舍)라는 도를 찾고 공부하는 하얀 집이 있다.

마침 우한 폐렴이 시작되어 도로에 차가 없어서 심도학사에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

건축미가 뛰어난 심플한 현대식 건물의 문이 열리고 집 주인이 반갑게 필자 일행을 맞이해주었다.

 

심도학사 원장 길희성 선생은 해맑은 풍모에 반짝이는 눈동자의 소유자다.

그는 평생 진리를 찾는 구도자로서의 삶을 살아왔고, 동서양의 철학과 신학을 아우르는 한국의 대표적 종교학자이다.

 

길선생은 불교 학자로서 학술원 회원이고 평신도 교회 ‘새길 교회’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다.

겨울 방학이라 작은 학교에 수업은 없었다.

우리를 회의실로 안내하는 그의 손에는 쇼팡 녹턴 전곡 피아노 악보가 들려 있었다.

 

최: 안녕하세요. 건강은 좋으시지요?

 

길: 다른 병은 없는데 목 디스크 5-6번이 안 좋아서 손가락이 좀 문제에요.

손가락 운동도 할 겸 피아노를 종종 칩니다.

어렸을 때부터 고전 음악을 좋아했고 flute도 열심히 했습니다.

 

 

최: 심도학사라는 이름이 특이한데 무슨 뜻인가요?

 

길: 교회에서 '심방간다'라는 말을 하지요.

그 심자인데 찾을 심(尋)이지요. 도를 찾는 학사.

 

처음에 학이사(學而思), ‘배우고 생각한다’는 이름으로 하려고 했는데 벌써 다른 곳에 있더군요.

그러다 ‘심도’라는 이름을 찾아보고 무릅을 쳤어요.

강화도의 옛 이름이 심도였는데, 한문은 다르지만 여하튼 그렇게 정하게 된 이름이지요.


 

최: 심도학사 같은 곳은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동서양의 철학과 종교를 공부할 수 있는 도량을 길선생께서 9년 전 사재를 들여 만드셨지요.

 

우리나라 같은 다종교 국가에서 꼭 필요한 장소라 생각하며 헌신적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은 심도학사 겨울 방학 중인데 어디 여행 계획이라도 있으신가요?

 

길: 베트남에 가려고 전부 예약 했습니다.

건강이 안 좋다고는 하지만 틱낫한 스님과 면담을 할 기회도 있을 듯 하여 갈까 했는데..

 

비행기는 취소가 되는데 호텔은 안 가도 돈을 내야 한대요.

그래도 아무래도 안 가는 게 낫겠지요.

이번 폐렴 사태로 중국에 큰 변화, 어쩌면 시진핑이 실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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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학사  http://cafe.daum.net/simdohaksa

 

최: 선생님은 서울대에서는 철학을 공부하시고 예일과 하바드에서는 신학을 하셨지요.

하바드에서 쓰신 박사 논문은 보조 국사 지눌에 대해서로 알고 있습니다.

지눌은 어떤 분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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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 보조국사 1158 ~ 1210

 

길:  지눌 스님은 고려시대에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여 조계종을 창시한 분입니다.  

선교일치를 추구하였고 당시 타락한 불교를 개혁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지요.

그 분은 ‘돈오점수론’을 주장했는데 반드시 돈오(깨달음) 후에 점수(수행)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悟後修)

 

그 까닭은 깨달음, 즉 중생이 자신의 마음이 본래 부처님의 마음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자각이 없으면, 마음을 닦아 나가는 수행의 과정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비록 우리 마음의 본바탕이 부처님과 똑같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해도, 우리를 오랫동안 괴롭혀 온 번뇌를 일시에 제거하기는 어렵고 지속적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심, 본성이 제대로 빛을 발휘할 수 있겠지요.  

 

 

최: 돈오(頓悟)는 순간적 깨달음, 점수(漸修)는 점차적 수행이군요.

 

길: 네, 여기서 돈오점수 사상은 불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지눌은 ‘선 돈오 후 점수’의 이치를 비유로써 설명합니다.

 

우리가 얼음이 곧 물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얼음이 실제로 물이 되려면 장시간 태양의 온기를 받아서 녹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제가 말하는 또 하나의 쉬운 비유가 있습니다.  

 

시골 사람이 서울로 이사 온 순간 이미 서울시민이지만, 그가 실제로 서울 사람 노릇을 하려면 길을 익히고 사람을 사귀는 등 여러 가지를 배우는 과정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비유입니다.  

 

이러한 수행은 없던 마음을 생기게 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있는 본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요.

즉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이 아니라 내 마음의 본성이 이미 <부처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최: 하지만 돈오도 점수도 지눌 선사 같은 고승의 경지는 넘보기가 어렵겠지요.  

 

길: 수행은 사생결단을 하듯이 덤벼드는 행위가 아니라, 노닐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참 수행입니다.

번뇌가 아무리 우리의 마음을 덮고 누른다 해도, 우리의 본심과 본성은 지하에 흐르는 물처럼 여전히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말하자면, 내가 죄를 짓는다 해도 여전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고, 나를 품고 계시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최: 선생님은 세인트 올라프대, 서울대, 서강대 등에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며 비교 종교학 분야를 개척하셨지요. 

저술 활동도 활발히 하셔서 힌두교, 불교, 일본 불교. 기독교를 망라한 여러 책을 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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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일본 불교의 고승인 '신란'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셨습니다.  

신란은 어떤 분인가요?                    

 

길: 신란은 일본 정토진종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정토종을 시작한 그의 스승 호넨, 선불교의 도겐 등과 함께 일본의 국민적 영웅입니다.

 

신란 사상은 한마디로 사도 바울과 대단히 흡사합니다.

즉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했고, 신란은 오직 신심으로 성불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예일대에서 '스탠리 와인슈타인'이라는 교수 덕분에 일본 불교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십여 년 만에 얻은 안식년을 Japan foundation의 지원을 받아 신란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나고야에서 보냈습니다.

 

신란은 오거스틴, 칼 바르트보다 더 지독히 기독교적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사랑이지요.

 

예수회 설립자인 로욜라 신부가 16세기에 가톨릭을 전파하러 일본에 갔을 때 일본 불교 신도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로욜라가 일본 신도들에게 신란의 사상을 듣고, “이 빌어먹을 루터의 후예들이 우리보다 먼저 여기 와 있었네 !” 하며 놀랐다는 말이 전해옵니다.

 

 

최: 로욜라는 가톨릭을 옹호하여 반개혁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이라 루터를 싫어했겠지요.

근래에 한국에서 소승불교의 위파사나 수행이 인기입니다.

어떤 수행인가요?

 

길: 근래에 우리나라 불교계에는 부처님 자신이 가르쳐주신 위파사나(vipasyana, 마음 챙기기) 명상법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 방법은 지눌 스님 자신이 점수의 방법으로 제시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성적등지'란 마음을 텅 비우되 늘 또렷하게 마음의 상태를 주시하고 의식하는 수행법이지요. 

마음을 한 곳에 모으고 몰입하는 비움과 동시에 늘 성성(惺惺)한 상태로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정념(正念)을 닦는 위파사나 명상법은 마음을 한 대상에 몰입하는 사마티(samadhi, 三昧)수행과 달리, 누구나 약간의 훈련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일상생활을 멈추지 않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움직임과 상태를 주시하고 자각하는 수행법이기 때문에, 비교적 쉽고 효과도 즉시 나타납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서구 여러 나라에서도 많은 사람이 실천하고 있으며, 가톨릭의 향심기도(向心祈禱 centering prayer)에도 부분적으로 도입되어 있습니다.

 

즉 생활 속의 수행, 생활 자체를 수행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참 수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 종교마다 각각 다른 수행법이 있겠지요?

 

길: 종교마다 가르치는 수행법이 다르지만, 수행은 수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됨이 목적입니다.

요즘에는 수행을 무슨 공덕을 쌓는 일처럼 생각하는 종교인들이 많지요.

 

기독교인 중에는 새벽기도를 매일 다니고 금식을 한다거나 성경을 여러 번 읽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불교에서도 몇 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했다거나 경전을 모조리 통독했다는 수행자들도 있지요.

 

그런 사람들을 ‘종교 중독자’라고 부르고 싶어요.

기독교는 교회 중독자, 예배 중독자들이고, 불교는 깨달음 중독자, 화두 중독자들이지요.

 

 

최: 심도학사의 강의 중에 ‘종교에서 영성으로’ 라는 주제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길: 지금의 종교는 생동성과 역동성을 상실한 채 죽은 덩어리처럼 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러한 종교의 종살이 안 하려면 종교라는 것은 상징을 매개로 우리를 초월적 세계로 이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징 자체를 절대화 하면 바로 우상이 되고 말지요.

아직도 성경이나 십자가 등을 종교적 상징으로 절대화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문자주의적 근본주의 때문인데 놀랍게도 이는 고대나 중세보다는 오히려 현대적 산물이지요.

문자 문화가 보편화 되지 않았던 고대에는 음악, 무용, 연극들이 많았고 이때는 문자주의적 근본주의가 약했지요.

루터 이후 성경이 인쇄되어 각국에 퍼지면서 ‘오직 성경’이라는 선언의 부작용으로 문자주의가 시작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종교의 교리 자체가 상징의 상징성을 거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대 로마시대에 확정 된 예수의 신격화나 무함마드가 죽은 후 이루어진 쿠란의 절대화가 이에 해당하겠지요.

 

상징을 상징으로 알아 상징의 고착화를 피하고 낡은 상징적 언어는 현대인들이 알아듣는 수 있는 언어로 과감하게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각 종교의 현대주의자들(modernist)들이 하는 일인데 독일의 신학자 쉴라이어마허 이후 슈바이처 등 여러 신학자들이 많은 공헌을 했지요.

이슬람은 이러한 모더니스트들이 별로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최: 21C에 종교는 어떻게 발전할까요? 

 

길: 21 C는 탈종교 시대로 접어 들었고 점점 사람들은 한 종교에 만족 할 수 없게 됩니다.

 

어느 이슬람 영성가는, 처음 카바(검은 돌이 안치되어 있는 무슬림 순례자들의 성소)를 방문했을 때는 카바만 보고 하느님은 만나지 못했고, 그 다음에 갔을 때는 카바와 함께 하느님을 보았으며, 마지막 세 번째 방문에서는 카바는 사라지고 하느님만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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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메카에 있는 카바(kaaba) 신전

 

저는 이 말이 이슬람뿐 아니라 모든 종교의 신앙생활과 영성의 핵심을 드러내주는 말이고, 나아가 인류 종교사의 향방을 말해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의 영성을 촉발하고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을 매개해주는 이런 구체적인 매개체가 없이는 종교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영적 체험은 텅 빈 진공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나 집단이 특정한 시대, 특정한 지역에서 접하게 되는 영적 경험의 매개체를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매개체를 종교적 상징(symbol)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종교의 상징만 보았을 뿐 정작 이 상징물이 매개해주는 초월적 실재, 즉 상징의 존재 이유인 하느님을 만나는 경험은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것이지요.  

수많은 신앙인들이 실제로 이러한 수준의 신앙생활에 머물고 있습니다.

한 특정 종교의 외적 상징들을 접하고 배우며 그 종교의 의례를 준수하는 행위를 신앙생활로 착각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종교에 의한 인간 소외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작 상징을 만들어 낸 인간이 바로 그 상징의 노예, 전통의 노예, 종교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종교적 우상숭배는 세속적 가치를 숭배하는 우상숭배 못지않게 위험합니다.

 

원효 스님의 글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술사가 그럴듯한 호랑이를 마술로 만들었는데 이 호랑이가 되레 그 마술사를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 모든 이데올로기, 모든 종교의 역설적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가장 자유롭게 해야 할 종교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둔갑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실로 위대한 선언입니다.

 

결국 다른 종교의 상징도 상징으로 이해하고 더욱 나아가서 모든 사물, 모든 경험이 영성의 세계가 되는 경지가 되겠지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라고 했습니다.

 

21세기는 종교를 넘어 영성으로 가야합니다.

 

최: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길: 여기까지 잘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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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28  심도학사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쇼팡을 치는 길희성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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