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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 선생을 생각하며

wy 0 02.2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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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윤정희 선생(이후 윤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70년 경으로 기억한다.

서소문에 있던 우리 집에서 어느 날 영화촬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촬영장 특유의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혹시 무슨 문제가 없는지 잘 지켜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촬영이 진행되는 정원 현장에 서 있었다.

 

 

조명기사로 보이는 3-4명이 땀을 흘리며, 네모난 은박 널빤지를 어깨로 지고 다녔고, 촬영기사들은 커다란 장비를 점검하며, 현장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나타났는데 바로 윤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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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막의 스타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바라보며 다가왔다.

나는 내 주위에 나 말고 누가 있나 하고 좌우를 살폈으나 아무도 없었고, 그녀가 어느새 바로 내 앞에 와 있었다.

 

언뜻 '오드리 헵번'이 아닌가 싶었으나, 그녀는 공손한 태도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였다.

“이 옷 좀 안에 잠시 놔 주실 수 있을까요?”

 

윤선생은 척 보고, 안경 끼고 머리 짧은 고등학생이 이집 사람인 지 알고, 자신의 옷을 맡긴 것이다.

나는 ‘네, 그럼요.’ 하고 얼른 들어가서 그녀의 옷을 집 안 거실에 잘 걸어 놓았다.

 

하얀 재킷이었고, 한 여름이라 날씨가 무척 뜨거웠다.

그 영화는 대종상 감독상을 받은 최훈 감독 작품이었고, 영화 제목도 두 자 같은데 생각이 안 난다

 

윤선생과의 인연은 10여년 후로 다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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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인 송지영 선생

 

1982년경 나는 당시 문예진흥원장 우인 송지영 선생과 종로의 반줄 식당에서 저녁 약속을 했는데, 윤선생과 백건우 선생이 같이 나왔다.

그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 나는 윤선생에게 십여년 전 서소문 어느 집에서 영화 촬영한 일을 혹시 기억 하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어렴풋이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며, 감독의 이름을 나에게 말해 주었다. (윤선생은 1970년 당시 1년에 30-40편의 영화 촬영을 할 때이다.)

 

송지영 선생은 우리에게, 앞으로 서로 도울 일이 많을 거라며, 기분이 좋으신 지 와인잔으로 여러 번 건배를 하셨다.

 

나는 당시 클래식 음악 월간지를 창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음악뿐 아니라 연극과 무용도 같이 넣어서 종합 공연예술을 다루는 잡지를 구상했다.

 

유럽에도 특파원을 두고 싶었는데 윤선생이 파리에 있어서, '객석'의 특파원으로 기사를 써 달라는 부탁을 했다.

윤선생은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윤선생은 배우로서는 이미 한국 영화계의 큰 별이지만, 백선생과 결혼 후 파리 제3대학교에서 영화예술학을 공부하며 석사 코스를 밟고 있었다.

 

또 1971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영화사 측면에서 본 한국 여배우 연구」 라는 논문을 쓴 석사 여배우였다.

'객석'의 파리 특파원으로 손색이 없었다.

 

(당시에는 아직 잡지의 이름을 정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객석'으로 한 것도 윤선생 부부와 설악산에서 상의하여 결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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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 선생과 설악산에서 - 1983년 경

 

 

1984년 초 객석 편집부는 3월 창간호 발행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동아일보에서 '음악동아'가 곧 나올 예정이라 우리가 한 달이라도 먼저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미가 있었다.

 

국내외 여러 음악 예술인들이 창간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고, 폭 넓은 여론조사를 통한 기획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창간호 표지 인물로는 국내에서 3월 연주 예정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선생으로 정했다.

 

이렇게 객석의 편집진은 물론 영업, 광고 팀도 보강하여 창간을 향해 매진하던 어느 날 갑자기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창간호 표지로 확정한 정경화 선생의 국내 연주가 돌연 취소된 것이다.

 

갑자기 표지를 바꿔야 했고, 고심 끝에 3월에 내한 공연하는 flutist '알랑 마리옹'으로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윤선생이 세계적 지휘자 바렌보임과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 '객석'의 앞 면을 비워 놓았는데 이것도 갑자기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백남준 선생을 뉴욕에서, 윤이상 선생을 베를린에서 인터뷰한 기사가 확보되어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창간호에 세계적 외국 음악가를 인터뷰 못 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고 창간호 인쇄를 막 시작하려는데 윤선생에게서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바렌보임과 다시 인터뷰 약속이 되었고, 본인이 뮌헨으로 가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윤선생에게 너무 고마웠다.

성실과 집념의 윤정희 특파원의 멋진 특종이었다.

 

아래 기사는 윤선생이 지휘자 바렌보임을 인터뷰한 내용 중 일부이다.

기사를 보면 그녀의 음악에 대한 깊이가 상당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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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렌보임을 인터뷰 하고 있는 윤정희 특파원 - 1984년 2월

 

스페셜 인터뷰 – 윤정희가 만난 바렌보임

 

바렌보임과 나는 서로 같은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국(?)땅 뮌헨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는 1월 중순부터 한 달 가량 베를린에서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를 지휘하면서, 틈틈이 본이나 뮌헨 등 독일의 주요 도시에서 독주회를 가지느라 바쁜 일정 속에 있었다.

 

어렵게 얻어낸 베를린에서의 첫 인터뷰 약속은, 본에서 예정되었던 음악회까지 취소될 만큼, 그의 갑작스런 병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다시 인터뷰 장소는 뮌헨으로 바뀌었다.

2월의 뮌헨은 여전히 사람을 움추러들게 하는 음산함이 있었다.

 

'피어 야레스차이텐'(4seasons) 호텔 로비에서 만난 그는 환한 웃음을 띠며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몇 번이고 미안하는 말을 되풀이했다.

기관지가 부어 며칠 동안 혼이 났다며 독일의 음울한 날씨를 불평한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 얼굴이 부드러웠고, 괴팍하다는 사람들의 평과는 달리 친절하고 따뜻했다.

약간 촌스럽게 입은 옷 때문에 오히려 친밀감이 갔고, 흐트러진 자세에서는 훈훈한 인간미를 느꼈다.

 

파리의 음악인들 사이에서 소문난 거만하고 못된 성격을 지닌 바렌보임이 아닌,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기에 흐뭇했다.

우리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처음 만난 사람들 같지 않게 술술 얘기가 시작되었다.

 

Q 당신의 예술세계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모짜르트’와 ‘이스라엘’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습니까?

 

A 물론 모짜르트는 나의 음악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이스라엘 역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지요.(1967년 6일 전쟁이 일어나자 바렌보임은 모든 연주 계획을 취소하고 이스라엘로 날아갔다.)

 

'부조니'가 얘기했듯이 ‘이 지상에는 저속한 작곡가, 좋은 작곡가, 훌륭한 작고가, 천재적인 작곡가가 있고 그 다음에 존재하는 것이 모짜르트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그의 오페라를 보면 인간에게 숨겨져 있는 모든 것이 그려져 있습니다.

 

모짜르트를 연주해보면 그 곡들이 너무나 순수하기에 나의 음악세계를 정화시켜 주곤 합니다.

(모짜르트라는 이름을 말 할 때 그는 어떤 위대한 표상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엄숙 해진다.)


베토벤이나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와는 달리 모짜르트 작품에서는 어떤 감정이든 강조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만이 남아야 되기 때문에, 가장 연주하기가 힘이 듭니다.(그의 적절한 템포로부터 오는 안정과 균형은 모짜르트 음악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지휘 특성에서 오는 것인지?)

 

Q 어떤 작품을 준비할 때에 곡을 분해(Decomposition)한다고 말씀하시던데 그 ‘분해’에서부터 마지막 연주까지는 어떤 절차를 거치게 됩니까?

 

A 작곡자와 연주자는 그 작업과정이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작곡가들은 아주 작은, 마치 어린 세포와 같은 아이디어나 영감을 발전시켜 나가며 곡을 씁니다.

(그는 얘기 도중에 손짓과 표정을 아주 적절히 구사한다. 마치 오키스트러를 지휘하듯)

 

그러나 연주가들은 처음 악보를 대하면 먼저 전체적인 느낌, 전체적인 형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작곡가는 속에서 밖으로, 연주가는 밖에서 속으로 핵심을 찾아 들어가게 됩니다.

될 수 있는 한 작곡가의 의식 세계에 가까이 가도록 노력을 하지만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 이하 줄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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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윤선생을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은 2016년으로 기억한다.

몇 년간 수감생활을 할 때였는데 윤선생 부부는 한국에 올 때마다, 면회를 왔다.

두 분이 각각 서점에서 책을 2-3권씩 골라서 가지고 왔는데, 그 중 몇 권은 내가 소설 ‘예수의 할아버지’ 를 쓸 때 참고가 되었다.

 

2019년 11월, 백건우 선생이 어렵게 부인의 알츠하이머를 언론에 공표했을 때 무척 마음이 아팠다.

시중에 윤선생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간혹 있었으나, 이제 사실로 확인 된 것이다.

2016년 그녀와의 만남이 떠오르며, 그 때 뭔가 좀 이상한 점이 없었나 되집어 보았다.

 

몇 가지 장면이 떠 올랐다.

당시 윤선생이 무릅이 아파서 곧 수술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나는, 그녀를 보자 마자 무릅은 좀 어떠시냐고 물었다. 

 

윤선생은 치마 오른 쪽을 살짝 올리고, 나에게 무릅의 살색 보호대를 보여주면서, 일단 수술을 보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건강이 어떤 지,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빨리 나와서 파리에 한 번 오라는 등 위로의 말을 해 주었다.

 

백선생은 비교적 과묵한 편이라 주로 윤선생이 대화를 이끌어 갔다.

잠시 후 입회 간수가 면회시간이 다 되었다며 이제 마무리를 하시라 말 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작별 인사를 하는게 보통인데, 윤선생이 갑자기 “조금만 더 하면 안되요?” 라며 간수를 올려다 보았다.

간수는 약간 당황한 채 나와 윤선생을 번갈아 쳐다보며 곤란해 했다.

 

윤선생 덕택에 아마 4-5분 정도 더 면회시간이 연장되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그때는 그냥 넘어갔으나, 알츠하이머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면 약간 어색하게도 생각된다.

하지만 그때의 윤선생은 적어도 쉽게 눈에 띄는 증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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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면회를 마치고 나가는 윤선생 부부가 갑자기 나에게 “저희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두 분 모두 가톨릭 신자이고, 그동안 간혹 비슷한 언급은 했지만, 그때는 어쩐지 심각한 느낌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점점 악화되어가는 건강 상태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이후 백선생은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으나, 윤선생은 전화 통화 밖에 할 수 없었다.

최근에는 백선생과 윤선생 동생들 간에 어려움이 있는 듯하다.

윤선생의 건강으로 인해서 발생된 문제라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한국 영화계의 전설, 40년 우정을 이어온 예술의 벗, 객석 창간 파리 특파원 윤정희 선생이 보고 싶다.

두 분은 내가 어려울 때 나를 찾아와서 위로해 주고 힘이 되었는데, 나는 아무 도움도 줄 수가 없다.

 

내가 어느 신문사 특파원은 아니지만 파리에 가서 다시 물어보고 싶다.

 

“1970년경 서소문 어느 집에서 영화 촬영하실 때, 안경 낀 학생에게 하얀 재킷을 맡긴 적이 있나요?”

 

“네 그럼요. 그 때 한 여름이라 참 더웠지요.”

 

그녀의 미소 띤 대답이 들리는 듯하다.

 

윤정희 선생의 건강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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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HTdGz1M2Hqw&t=20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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