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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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터폴 레드’ 의 도피생활 14년

wy 0 2020.11.10

 

                                                                                                                     

*이 글은 2012년 여름, 귀국을 앞두고 쓴 글입니다.       

올해로 미국 생활이 14년째인데, 8할이 도피생활이었다. (어느 시인의 말을 빌림)

그 동안 내 인생은 급격한 변화가 몇 번 있었다.

 

1977년 이후 약10년간은 선친께서 만드신 동아그룹 사장으로,

리비아를 비롯한 해외 건설현장을 다니며 소위 재벌2세로 살아왔다.

 

그 후 88년부터 약 10년간은 시사저널 창간, 학교 이사장 등 언론과 교육분야의 일을 주로 하였다.

이런 일들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대학원에서 flute을 공부했고, 영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97년 외환위기로 건설 회사를 비롯한 관계회사들이 무너지며, 학교 이사장 배임혐의에 대한 검찰 조사를 받은 후 미국에 온지 어언 14년이 되었다.

 

그 동안 나는 사업가로, 언론인으로, 그리고 도피자로 세 번의 다른 삶을 살았다.

직업 끝에 붙는 명칭도 각각 가, , 자의 변화가 있다.

 

미국에 45살에 와서 이제 59살이 되었으니 상당히 오래 조용히 살았다.

나그네 설움’(조경환 시 이재호 곡) 2절 가사에 "타관 땅 밟아서 본지 10년 넘어 반 평생 사나이 가슴 속에 한이 서린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 동안 이사를 16번 다녔다.

한미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된 후 집요하게 나를 추적하는 어느 이민국 경찰과의 숨바꼭질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의 이름은 루고로 기억한다.)

지난 14년 동안 큰 아들은 결혼하여 7살짜리 딸이 있고, 둘째 아들은 대학원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막내 딸도 대학을 졸업하였으니 자식들은 나름대로 다 장성하였다

내 모습은 팽팽한 피부에 검은 머리가, 이제는 좀 삭은 얼굴에 반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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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름 아내와 딸과 함께, 산타 모니카 해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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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둘째 아들과 함께, 어느 카페에서.  

 

오래 전 '도망자' 라는 미국 TV 드라마를 참 재미있게 보았다.

의사 리차드 킴불은 아내를 살해 했다는 누명을 쓰고, 도망자가 되어 미국의 작은 도시들을 전전한다.

 

잠깐씩 머무는 동안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마을의 분쟁을 해결 해주는 데, 주위에는 반드시 의심과 질시의 눈으로 그를 보고,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그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다. 

나는 드라마의 도망자처럼 엉뚱한 누명을 쓰지는 않았고(나는 배임혐의가 있다) 의사로서 사람들을 치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가 도망자로 쫓기며 하루하루를 지내는 심정만큼은 잘 이해한다. 

나도 그와 같이 가명을 쓰며 살고 있다.

 

미국에 온지 거의 2년이 되던 어느 날, 경찰이 나를 잡으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내 이름에서 won을 빼고 그냥 young choi 로 바꾸었고 steve choi라는 또 다른 이름도 사용했다.
자동차 운전도 이 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내가 운전하다 경찰에게 티켓을 받을 때, 옆에 탄 나의 신분증을 경찰이 보자고 할까 봐 조마조마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길을 걷다가도 경찰이 멀리서 오면 저절로 내 발은 발길을 돌린다.
L.A
한인타운에서는 불법체류자를 길거리에서 불심검문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히 조심해야 한다.

 

스릴이 있는 생활이지만 즐거운 생활은 아니다.

그 동안 몇 번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는데 병원에 가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에는 눈에 이상이 생겨 급히 큰 미국 병원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신분증을 집에 놓고 왔다고 하니 다음에 신분증을 가져오는 조건으로 다행히 의사가 진료를 해주었으나 이 후 다시 가기는 어려웠다.

혹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한국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잘 가지 않는다.

 

도피생활의 절정은 1년 전쯤 아파트로 경찰이 찾아온 순간이었다.

나는 오전에는 주로 아내와 같이 아파트 주위를 산책하는데, 이날은 무슨 일로 아내 혼자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에게 나는 무심코, ‘조심해 다녀 오라는 한마디를 했다.

그런데 아내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얼른 문을 세게 닫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나는 문으로 다가가서 귀를 기울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가 영어로 미국 남자들과 무슨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문을 한 번 더 잠그는 장치를 살며시 돌렸다.

2-3분 정도 실랑이를 하는 듯 하더니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내 핸드폰으로 아내가 전화를 했다.

어떻게 된 거야? 누구야? ”

나의 다급한 질문에 아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민국 사람들이라며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하니 문을 열라고 해서 아무도 없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네들이 안에서 남자 목소리를 들었다며, 신분증을 보여주는데 이민국 경찰 같았어요.”

 

몇 명인데?”

“3.. 수갑도 허리에 차고 있고..”

이때 갑자기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전화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이 놈들이 문을 두드리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아무도 없어서 문을 열어 줄 수 없고, 만약 열고 들어가려면 판사의 가택 수색 허가를 받아 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태도를 부드럽게 바꾸면서, 잠깐만 안에 누가 있는 지 없는 지 확인만 하자고 하는데, 바쁘다면서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전화하는 거에요.”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면서,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났다.

 

단독 주택이라면 정원으로 나가 숨거나, 뒷문으로 피신을 할 수도 있는데,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이거야 독 안에 든 쥐가 따로 없었다.

12층이라 뛰어 내릴 수도 없었다.

 

나는 일단 전화를 끊고,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는 수 밖에 없었다.

30분 정도 계속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조용해 졌다.

 

더는 문을 안 두드리는 시간이 10분 정도 지나자, 이상하게 그 때부터 내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와들와들~

10분 후에 그랬는지는 신경의학적으로 연구해볼 과제라 생각한다.

 

떨리는 와중에도, ‘이민국 경찰들도 무척 바쁜데, 여기서 하루 종일 기다릴 수는 없을 것이라는 희망과, 이들도 점심은 먹으러 잠시 자리를 비울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요즘 말로 뇌피셜)

하지만 이들이 복도 끝이나 1층 정문에서 잠복하고 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아내에게 살며시 전화를 했다.

2시간쯤 후에 돌아와서 이들이 철수했는지를 살펴보라고 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아내가 조심스럽게 여기저기를 확인 한 후 아무도 없는 것 같다면서 아파트로 들어왔다.

 

이제 이 장소와도 이별이다.

경찰들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하루 속히 여기를 떠나야 한다.

 

미국에서 이들에게 잡혀 구속되면 일단 재판을 받아야 하는데, ‘인터폴 레드는 큰 액수의 보석금을 내고 나오지 않는 한, 추방재판이 1-2년 걸리고, 이 기간은 한국에서 받는 형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즉 여기서 잡히는 게 최악이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려는 나에게, 남들은 못 와서 난리인데, 그냥 미국에서 사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는 분들이 있다.

고마운 말이지만, ‘사람은 뭐든지 없어 보아야 그 귀중함을 아는데, 그 중 자유가 특히 그런 것 같다라는 대답을 했다.

 

지금 이 글도 며칠 전 나를 찾는 경찰을 피해 LA시내 허름한 모텔로 거처를 옮겨 인터넷이 잘 안 되는 방에서 쓰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위급한 순간이 몇 번 있었고, 이런 급작스런 피신은 TV 드라마 도망자의 리차드 킴불과 흡사했다.

갑자기, 그리고 모든 것을 두고 몸만..

 

14년 전 겨울, 1년 간의 검찰 조사를 마치고 미국에 올 때에는 나름대로 희망이 있었다.

당시 마이클 잭슨과 협의 하던 동아 건설 소유의 김포매립지(지금의 청라 신도시) 개발을 성사시켜 한국에 돌아가 얽힌 문제들을 푸는 것이었다.

 

일들이 여의치 않았고, 그러다 세월이 그만 이렇게 흘러 버렸다.

 

1999년 우리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은 LA 근방의 글렌데일이라는 도시이다.

큰 아들이 그 근처 대학을 다녔기 때문인데, 글렌데일은 L.A 한인타운이 가깝고 알메니안이 많이 사는 곳이다.

 

 

 어느 일요일 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집에서 가까운 한국교회가 눈에 띄었다.

글렌데일 침례교회라는 곳인데 교인 수가 많지 않은 개척교회로서 시작한지 얼마 안된 곳이었다.

 

윤여각 담임목사님이 친절하시고, 집도 가까워서 계속 그 교회에 나가기로 했다.

피아노 반주자로 김신아 선생이 있었으며, 나도 교회에서 flute을 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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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flute 준비 찬송. 1999년경

몇 달 후 10여명의 작은 성가대를 만들었고, 모든 단원이 한 마음으로, 작지만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목사님도 테너를 같이 하시고, 내가 지휘도 하였다.

돌아보니 미국 초창기 이 시절이 경찰에 쫓기지 않고, 교회에서 음악을 하며 보낸 즐거운 시간이었다.

 

또 이런 기회에 한의학 공부를 하고 싶어서, 시내 한의대에 등록을 하고 제일 나이 많은 학생으로 학교에 다녔다.

재미있게 공부를 하던 중 나를 체포하러 온 경찰 때문에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국에서 누가 경찰청을 움직여서 미국에 있는 나를 인터폴 수배자로 만든 것이다.

그것도 인터폴 레드즉 가장 긴급히 체포해야 할 국제적 테러분자가 된 것이다.

내가 이사장이던 학교의 손해가 모두 회복이 된 상태로 출국을 한 나는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글렌데일 집까지 찾아 온 이민국 경찰들을 피해서 우리는 LA 동남부에 있는 테미큘라로 이사를 했다.

2004년 초인데, 이 무렵 마침 큰 아들이 글렌데일 집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날짜까지 잡아둔 상태였다.

 

경찰이 집을 알고 나를 잡으러 온 상황에서, 내가 결혼식에 참석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
결국 참석하지 않기로 했는데 내가 잡히는 것도 문제지만, 결혼식에서 그런 소동이 나면 아들의 결혼식을 완전히 망치게 된다는 걱정에서다.

지나고 보니 그 때 참석 해도 되었는데 하는 회한이 있다.   

 

우리가 이사 한 테미큘라라는 도시에는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던 김유미 선생이 살고 있었다. 

이 분은 시카고에서 소설가로, 또 학교 교장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은퇴하여 이 작은 도시로 왔는데,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

 이사하면서 막내 딸은 아직 어려서 같이 오게 되었고, 둘째 아들은 마침 버클리 대학에 가게 되었다.


[크기변환]Family Photo 3.jpg

형서, 아미(강아지), 서윤, 필자, 아내, 윤선, 금희, 형우 (좌로부터)  테미큘라에서

이 때부터 약 2년간 공기 좋고, 여름에는 꽤 더운 테미큘라에 살게 되었다.

나는 잠시 이민국 경찰의 포위망을 벗어나, 골프를 열심히 쳤다.

샌디에고 근처의 골프 학교에서 티칭 프로 시험을 보고 USGTF(us golf teacher's federation)의 회원이 되었.

 

비교적 한가로운 생활을 하던 중 막내 딸이 UCLA에 합격하여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런 세월 동안 고마운 일은 아이들이 학업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고, 쉽지 않은 환경에서 잘 성장 한 것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컴퓨터 음악을 배우며 작곡을 하였다.

가곡 위주로 여러 곡을 만들고 직접 노래를 녹음하기도 했다.

[크기변환]김총장, capture 006.jpg

 

그 약속 https://www.youtube.com/watch?v=62zxRBQioTM

 

호흡음악’(breathmusic)이라는 건강관련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편안한 음악을 들으며 일정한 호흡을 하면 혈압이 내린다는 미국 고혈압 협회의 발표에서 착안한 아이디어다.

엄선한 고전 음악 16곡에 호흡 소리를 넣는 작업을 몇 개월에 걸쳐 성공적으로 만들었다.

아틀란타의 어느 한국 라디오 방송국과 호흡음악에 대한 인터뷰도 했다. 물론 최영이라는 이름으로..

그 동안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어머니의 임종을 모시지 못 한 불효다.

어머니는 2010 7 4일에 돌아가셨는데 아내가 내 대신 한국에 가서 임종을 지켰다. 

미국은 독립기념일 축제로 불꽃 놀이가 밤 하늘을 밝혔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마침 한국에 간 큰 아들이 할머니가 사시던 필동 댁을 방문하였는데 노환으로 늘 누워 계시던 할머니께서 원영이가 왔냐며 벌떡 일어나셨다고 한다

큰 아들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와 비슷하다.

돌아가시기 2-3달 전부터 음식을 못 드셔서, 전화를 받으실 수 없었는데 마지막 전화로 나에게 잘 있어라는 한 마디를 하셨다.

아주 따스한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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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7순 잔치에서 

 

사실 그 동안 서울에 돌아가려는 생각을 몇 번 했었는데, 여권도 만기가 되었고 인터폴에도 이름이 올라있어 못 갔다.

만약 귀국해서 구속이 되면 어머니가 얼마나 충격을 받으실까 하는 생각도 귀국을 망설이게 된 변명 중 하나이다.


지금은 얼마 전부터 변호사와 상의하며 서울에 돌아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사실 여기서 계속 꼭꼭 숨어 지내려면, 못할 바도 아니나,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내가 계속 쫓기고 있으니 나 때문에 모든 가족들이 불안해 한다.

 

다 큰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 그 동안 고생한 아내의 짐을 이제 좀 덜어주고 싶다.

물론 나도 4번째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여기 살면서 제일 마음이 편할 때는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탈 때이다.

그 때는 경찰이 검문을 해도 신분증이 없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소리는 딩동하는 벨소리와 똑똑하는 노크소리이다.

작은 도시에 살 때는 옆 집 아이들이 벨을 누르고 도망가는 장난을 간혹 했다. (특히 핼로윈 무렵)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꾸준히 찾아와서 문을 조용히 두드리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도 친절히 대하느라 힘들었다.

 
미국에 있으면서 나름 보람 있었던 일은, 몇 분들에게 골프 레슨을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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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카마리오 근처의 골프장에서 

앞에서 언급한 윤여각 목사님, 김유미 선생님은 골프를 처음 시작하여 나중에는 휠드에서 골프를 즐길 수 있게 되셨고, 젊은 사람들 몇 명을 우연히 만나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일본인들도 있었다)

1시간에 30불씩 받고 레슨을 해주면서, 학생들의 실력이 늘 때 마다 큰 기쁨이었다.

현장에서 번 돈을 아내의 손에 쥐어주는 맛도 알게 되었다.

 

LA 생활 중 또 하나의 즐거움은 실내악 트리오를 하는 일이었다.

서울에서부터 가족끼리 친분이 있었던 임성범씨를 어느 교회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 아내 제인정씨가 마침 첼리스트라 피아노의 김신아 선생과 같이 실내악 트리오를 하였다.


멘델스존, 웨버, 슈베르트 등을 주로 하였는데, 모두 가족 같은 분위기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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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신아, 필자, 제인정 (좌로부터  존칭생략)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던 지난 14년의 세월을 돌아보니, 톨스토이의 말대로 인간은 자기의 앞날을 모른다는 사실이 더욱 실감난다.

당시에는 최선이라 생각 하고 열심히 한 일들이 결과는 안 좋았고, 회한이 남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모두 허송세월만은 아니었고, 하루하루 돌아보면 기적 같은 감사한 세월이었다.

14년의 미국 생활을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힘든 환경에서도 늘 낙천적이며, 온갖 고된 일을 내 대신 헤쳐나간 아내 덕분이다. 


이제 돌아가서 내 인생의 4막을 시작하려 한다.

나에게는 무사히 돌아가는 자체가 일단 큰 성공이다.

LA 공항을 빠져 나가는 문제도 쉽지 않고(공항에서 잡히면 구속)인천 공항에서 바로 집으로 갈 수 있을 지, 아니면 검찰청으로 가게될 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나의 인생 4막의 시작은 구치소나 교도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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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몇 달전 손녀 윤선이와 

그러나 이 시기만 잘 넘기면 매우 희망적이다.

서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마음 편히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내는 물론 가족들도 나를 적극 응원해 주고 있어서 더욱 마음 든든하고 고맙다.

 

귀국을 결심한 이유들을 다시 정리해 보았다.

1)가족들에게 더 이상 나로 인해 신경을 쓰게 할 수 없다.

2)어머니가 안 계셔서 구속이 되어도 괜찮다.

3)나의 삶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즉 새로운 시작은 못하나 새로운 끝을 만들 수는 있다.
그럼으로써 여기서 보낸 14년도 살아날 것이다.

 

비행기표를 예약하기 위해 여행사에 전화를 해야겠다.

(이후 귀국하여 몇 년간 수감생활을 했고, 2020년 가을에 소설 ’예수의 할아버지’ 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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