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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창간을 회고하며

wy 0 2019.09.21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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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저널은

사실과 진실의 등불을 밝히고,

이해와 화합의 광장을 넓히며,

자유와 책임의 참 언론을 구현합니다     

                       1989년 10월 발행인 최원영

 

시사저널의 사시를 30년 만에 다시 써 본다.

창간호 첫 페이지의 창간사인데 지금 봐도 아득한 말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살 사건에서, 그의 자살은 사실인데 그가 죽어야만 했던 진실은 무엇인가?

 

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과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서로 어떻게 화합 할 수 있는가?

 

노 전대통령을 비난하는, 또는 찬양하는 행위가 모두 자유라면 그 자유 안에 언론은 어떠한 책임이 있는가?

 

30년전 이 아득하지만 올곧은 창간사를 구현하기 위해 뜻 있는 언론인들이 모였다.

 

시사저널을 창간하고 10년의 세월을 같이 했다.

 

예상치 못한 풍파로 시사저널을 떠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1988년 가을

역사적인 서울 올림픽을 치르며 한국의 경제는 도약하고 있었다.

동아건설도 리비아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사세가 뻗어 나가고 있었다.

 

나는 당시 미국에 출장 갈 때 마다 얼마 전 창간 된 ‘USA Today’라는 신문을 유심히 보았다.

 

이 신문은 인쇄할 때 칼라를 많이 쓰고 도표를 잘 이용한다.

신문을 섹숀 별로 잘 분리하여 따로 접어서 읽기 쉽게 정리하였다.

 

'워싱턴 포스트'나 '뉴욕 타임즈'보다 친근감이 있고 일목요연하게 사실을 전달하는 힘이 강했다.

 

나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주보를 발간했는데 어느 겨울날 주보에 예수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갈보리’라는 제호 아래 얼굴 윤곽만 흑백으로 나타나게 그렸다.

 

등사판 위에 시커먼 '타르'를 묻힌 ‘가리방’을 조심스레 밀면서 인쇄를 할 때이다.

 

추위로 곱은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면서 주보를 한 장씩 뽑아내었다.

 

1984년 3월에 나는 음악 공연 예술지 "객석"을 창간하였다.

 

본격적으로 신문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국일보 장강재회장과 개인적인 친분으로 자주 만나면서부터이다.

 

소탈하면서 보스 기질이 있던 그는 언론 통폐합으로 속이 많이 상했는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계속 언론 사업에 관심이 있던 중 미국의 USA Today 같은 신문이 한국에서 나오면 좋을 듯하여 사전 가능성 조사에 들어갔다.

 

신문의 외형과 편집 체계를 바꾸는 일도 중요하지만 알찬 내용을 위해 막강한 편집진의 구성이 필수였다.

 

특히 편집인의 선정은 신문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막중한 일이었다. 

 

편집 책임을 맡을 분을 은밀히 물색하고 있던 중, 당시 명망 있는 언론인중 한 사람인 박권상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문화방송 사장을 했던 이환의선생의 소개였다.

 

동아건설 사장실에서 처음 만나 신문 발행에 대한 뜻을 밝히고, 대화를 나눠보니 과연 정론을 펴는 논객다웠다.

 

악수를 하는 그의 손은 유난히 부드러웠으나 시국을 보는 혜안은 예리하면서 치우치지 않았다.

 

당시는 노태우대통령 초기로 민주화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으며, 조선, 동아 해직 기자를 중심으로 한계레 신문도 창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박권상선생과 수 차례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그 당시 어떤 신문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많은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선생을 모실 수 있었다.

 

동아일보 복직은 물론 한겨레 창간에도 참여할 수 있었지만, 시사저널에 오신 것을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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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상 창간 편집인

 

이런 과정 중에 신문이 성공하려면 예상보다 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국에 지사를 두는 판매 영업망 확충은 물론 우선 인쇄기 구입만 하여도 수 백억이 든다. 

 

처음 시작하여 광고 수입이 크게 오르지 않으면 초기의 엄청난 적자를 오래 버티기가 어렵다.

 

당시에는 내가 동아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라면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삼성이나 현대도 신문사를 소유하고 있었고 순복음 교회나 통일교도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권상선생의 뜻은 확고했다.

언론을 재벌의 이름으로 시작한다면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언론을 하려면 내가 동아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몇 달 간 생각을 정리한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걷기로 했다.

 

그 때 내가 그냥 동아에 남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간혹 하지만 프로스트의 "숲 속에 난 두 갈래 길" 이라는 시처럼 한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서울예고의 이사장으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서서히 문화 예술 방면으로 활동의 영역이 바뀌고 있었다.

 

이후 신문 창간을 목표로 사업 타당성 조사를 몇 달간 해보니 한국에서 새로운 신문을 낸다는 것은 무리라는 결론이 나왔다.

광고에 대한 전망이 어두웠고 신문 판매도 카르텔 조직이라 그 벽을 뚫기가 어려웠다.

 

고심 끝에  아직 미개척 분야인 '시사 주간지' 발행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이 권위 있고, 신문에서도 못 쓰는 심도 깊은 취재를 하는 시사 정론지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고 박권상선생도 흔쾌히 동의 해 주었다.

 

큰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주간지들이 몇 개 있었으나 내용이나 외형이 아직 시사정론지로 보기에는 미흡하였다.

 

나는 우선 박권상 선생을 편집인으로 모시고 유능한 인재를 계속 영입하기 위해 기자 보수를 그 당시 제일 큰 신문사 수준으로 책정하였다.

 

미국 일본 영국 중국 등에 특파원도 파견하기로 하였다.

 

한국일보 출신으로 해박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신중식선생이 시작할 때부터 합류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처음 기자 모집을 하고 원서 마감을 해보니 생각보다 많은 인재들이 몰렸다.

 

데스크급은 박권상 편집인의 주도로 진철수 편집주간, 박순철 경제부장, 표완수 국제부장, 김승웅 정치부장, 김동선 문화부장, 조천용 사진부장 등을 영입했다.

 

중견 기자들로는 김춘옥 김재일 박준웅 박중환 박상기 서명숙 김당 김상익 김창용 장영희 이흥환 이숙이 김현숙 문정우 이등세 김재태 정희상 남문희 이문재 성우제 양한모 이강빈 등 새 언론에 뜻을 같이 하는 유능한 기자들이 힘을 합쳤다.(이 외에도 미처 기억 못하는 많은 분들이 참여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는 기자들을 진철수 편집주간의 인솔로 미국의 시사주간지’US News and World Report ‘에 연수를 보냈다.

 

정통 주간지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배우는 현장 학습은 기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자신감도 더욱 충만하게 되었다.

 

잡지의 외형을 중요시 하여 영국의 ‘더 타임스’ 디자인 부국장 ‘에드윈 테일러’씨를 초빙했다.

 

그는 3개월 동안 <시사저널> 디자인의 틀을 잡았다.

중앙일보도 1995년경 그를 초빙해 몇 달간 디자인을 혁신했다.

 

또 미국인 ‘올슨’ 미술부장을 ‘US News and World Report’ 에서 스카웃하였다 .

지금 보아도 당시의 산뜻한 디자인이 질리지 않는다.

 

신문을 하려고 했을 때 경향신문에서 영입한 인쇄 전문가 차건성이사가 폰트에 대한 개발도 계속 해주었다.

잡지를 만드는 종이도 LWC라는 가볍고 질긴, 눈에 피로감이 덜한 종이를 수입하였다.

 

기자들의 문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들이 쓴 글을 김승옥선생등 당대의 문장가 몇 분들이 교정을 보도록 하였다.

  

한편으로 한승주 한승헌 최일남선생등 최고의 칼럼니스트들도 모셨다.

 

편집뿐만 아니라 행정 지원 업무를 위해 임철규사장 서정원고문 양남훈상무 차건성이사 한윤경전산실장 김봉국정기구독본부장  이승부이사 장승운기조실장 박경환영업부장 김충배광고부장 문신관차장 이성혜차장 이정구과장 이병희과장등 ‘객석’을 발행하는 예음의 식구들도 힘을 합쳐서 판매망을 확충하고 광고부를 보강하며 창간을 위한 여러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기자들이 취재원을 만나기 위해 개인적으로 먼저 경비를 쓰면 나중에 회사에서 모두 지급해 주었다. 

 

동시에 그 당시에는 거의 관행이었던 촌지를 우리 기자들은 처음부터 받지 않았다.

 

발행인, 편집인부터 일선 기자까지 모두 자유와 책임의 참 언론을 만들어 보자는 일념뿐이었다.

 

드디어 창간호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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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부 정도를 발행 했는데 매진이 되었다.

한국 역사상 주간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에서 제대로 된 시사주간지가 막 탄생한 것이다.


세련된 모양과 질 좋은 종이가 우선 독자의 시선을 끌었다.

창간 백일 전부터 카운트 다운을 하면서 신문 1면 등 각종 매체에 내보낸 대대적인 광고의 효과도 있었다.

 

무엇보다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대적인 배경과 알차고 신선한 내용이 같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창간 기념 기획으로 독일의 빌리 브란트 전 수상을 초청했다.

 

그는 소위 ‘동방 정책’으로 유럽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고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분이다.

 

같은 분단 상황을 겪고 있는 우리의 처지에서 독일의 분단 극복에 진력한 브란트의 한국 방문은 의미 하는 바가 컸다. 

 

브란트와 설악산에서 http://www.choiwonyoung.net/bbs/board.php?bo_table=meeting&wr_id=8

 

 이후 천체 물리학자 ‘호킹’박사, 방콕의 ‘잠농’시장, ‘시라크’ 당시 파리 시장등을 초청하여 시사저널의 위상을 높여갔고 CNN의 '테드 터너'를 방문하여 한국의 케이블 TV 시장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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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을 보고 있는 CNN의 테드 터너와 필자 

 

이렇게 대외적인 활동을 펼쳐나가며 시사저널 한 호 한 호를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듯이 매주 발행하였다.

 

표지 작업은 디자인 감각이 좋고 인형 모형도 만드는 미술부의 양한모기자와 매주 같이 상의하며 진행했다.

 

편집 교정도 인쇄 직전 마지막 점검이 중요함으로 시간이 나는 대로 원고를 내 방으로 가지고 와서 다시 한 번 보았다.

 

기사 자체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지만 사실 관계는 반복 확인하였다.

 

시사저널이 크게 앞서 나가자 다른 신문사에서 비상이 걸렸다.

 

몇 달이 지나자 큰 신문사에서 우리의 모양을 본 딴 잡지들을 서둘러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두 주자로서 시사저널의 발행 부수나 충실한 내용을 쉽게 따라 올 수는 없었다.

 

이렇게 우리가 시사 주간지 시장을 평정해나가자 시사저널을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험담은 ‘편집인이 호남출신이라 시사저널은 호남편이다.’ 라거나 ‘시사저널은 역시 DJ를 지원하는 언론이다’등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박권상선생이 DJ 때 KBS사장을 했으니 두 분이 개인적으로 친밀한 사이였는지는 모르나, 시시비비를 가릴 때에는 엄정했기 때문에 DJ측에서 우리에게 섭섭하게 생각할 때도 많았다.

 

어떤 정치인은 ‘발행인이 사업을 하던 사람인데 왜 좌익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업혀서 이런 잡지를 내느냐’ 하는 원망도 했다.   

 

안기부에서 직접적인 경고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해나 비난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우리는 유능한 인재들을 계속 찾았다.

탁월한 기자 근성의 안병찬선생과 뛰어난 문장가 김훈선생 등을 영입했다.

 

이후 안병찬선생은 시사저널의 편집 주간으로 편집국을 이끌었고 김훈선생도 시사저널과 TV저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는 보수와 진보를 떠나서 사실과 진실을 알리려 했고 영남과 호남을 말하기 보다는 이해와 화합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러 분야를 다루다 보면 시간이나 지면의 제약으로 충분이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 사건을 보는 관점이 회사 내에서도 다를 때가 있었다.

 

때로는 비판적 기사들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특정 개인이나 단체에 고통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미안할 때가 많았다.

 

우리는 상대방의 주장이 타당 한 것이 입증되면 언제든지 정정 기사를 내고, 반론을 실어 주는 편집 방침을 처음부터 고수했다.

 

언론은 자유만큼 책임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난 오늘, 언론 혹은 미디어 상황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시사저널도 내부 진통 후 ‘시사IN’ 으로 갈라져 나가는 큰 변화가 있었다.

 

인쇄 매체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지만, 공중파는 물론 우후죽순처럼 생긴 많은 채널들, 요즘의 대세인 너도나도 you tube까지 모두 엄청난 양의 정보와 주장을 쏟아내고 있다.

 

소비자인 시민들은 정신이 혼란할 지경이다.

 

여기에 한국 사회의 분열이 극에 달하여 언론도 양편으로 나뉘어서, 진영 논리가 ‘지록위마’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 시대 유튜브의 순기능도 많지만 편파적이고 자극적인 가짜 뉴스가 범람하고, 증오와 편가르기를 조장하는 불량 방송이 적지 않다. 

 

일부 유튜버들은 대중 매체로서는 쓰면 안되는 비속어와 막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30년 전 시사저널의 창간 정신이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함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시사저널의 성공은 민주화로 향한 시대의 변화와 함께 창간했고,

편집인을 비롯한 유능하고 신념 있는 언론인들과 직원들의 헌신,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매체를 기다렸던 독자들의 성원 덕분이었다.

 

어느새 오래 전 이야기가 되었지만 지금도 생생하다.

 

 

추신) 1997년 IMF 사태를 극복하지 못한 저의 불찰로 당시 시사저널을 비롯한 예음 가족들이 큰 어려움을 당한 것에 대해 이번 기회를 통해 대단히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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