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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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대수로 공사와 오렌지 주스

wy 0 2019.01.04



나는 동아건설에서 1977년부터 1987년까지 10년 간 해외 출장을 엄청 다녔다.


처음에는 사우디를 나중에는 리비아를 주로 갔다.


1984년 12월 하순 어느 날, 비서실장이 그 해 같이 타고 다닌 보딩패스를 모두 모았다가 나에게 보여 주었다.   


124장 이었다.   1년 동안 평균 3일에 한 번 비행기를 탄 것이다.


총 비행시간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웬만한 기장이나 스튜어디스보다 더 자주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이렇게 다니다 보니 자다가 깨서 흔들리면 비행기 안이고 안 흔들리면 숙소다.


비행기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 김우중 회장과는 4-5번 만났다.

  

그분은 타자마자 잠시 옆에 앉은 임원과 바둑을 둔 후 1등석 복도 바닥에 담요를 깔고 잠을 잔다. 


금방 코를 골며 옆으로 누가 가까이 지나가도 깨지 않는다.  


여행 할 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시차 적응인데 오래 다니니 요령이  생긴다.


여러 나라를 다녀야 할 경우 지구를 서쪽으로 먼저 돌기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덜 피곤 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한 번의 여행에서 N.Y와 London을 가야 할 경우 런던을 먼저 가고 뉴욕을 가는 방법이다.


방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음식인데 식사 약속이 있어도 서울의 새벽 1-5시 시간대에는 가볍게 먹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잘 지키면 큰 도움이 된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현장은 사우디 알주악 산악도로, 나이제리아 호텔 개발, 사우디 전신전화 공사, 리비아 대수로의 사리르 공장등이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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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사에 대한 내용을 처음 들은 것은1970년대 말이지만 본격화 된 수주 경쟁은 1981년경 전두환 정권 초기였다. 


공사를 따기 위해 동아는 대우건설, 현대건설과 먼저 국내에서 치열한 수주경쟁을 벌여야 했다.


당시 동아 콘크리트의 김교련 사장이 보안사 출신이라 5공 실권자들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활용하여 공사 수주 과정에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 당시 대규모 외국 공사는 정부의 지급 보증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실상 정부가 진출 회사를 내부적으로 지명 해 주었다.


한국 회사끼리 서로 가격 경쟁을 안 하게 되는 이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 협약이 현지에서 깨지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권력층과의 밀착도에 따라  상황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어수선한 시대였다.


동아의 최원석 회장이 정부측과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동아가 결정적으로 선두주자에 서게 되었고, 그 후에도 이 공사만큼은 어려울 때마다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많은 후유증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큰 사업을 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대수로 공사는 큰 파이프로 물을 공급하는 공사인데 우리 계열사 중 '동아 콘크리트'라는 콘크리트 관 제조회사가 있어서 또한 안성 맞춤이었다.


후일 리비아 발주처 책임자에게 들으니 동아는 건설, 파이프 제조 그리고 그 관을 운반하는 통운까지 계열회사로 가지고 있어서 어떻게 이렇게 대수로 공사에 필요한 세 회사가 모여 있을까 하고 내심 대단히 기뻐하며 표정관리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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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기술 제휴를 할 수 있는 미국의 '프라이스'라는 회사를 현대보다 우리가 먼저 제휴 할 수 있게 된 것도 한 발 앞서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현대건설의 사장은 이명박 전대통령이었다.


이명박 사장은 프라이스의 회장을 은밀히 만나 동아를 비난하며 현대건설과 계약을 추진 했다.


프라이스 회장이 두 회사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당시 실세인 H모씨가 “야, 이 XX야 한국 회사끼리 경쟁하지 말란 말이야”라고  전화로 이명박 사장에게 소리를 질렀고 이 후 상황이 종결되었다. 


국내에서  어느 정도 준비가 된 후 이 공사를 입찰하러 가게 되었다. 


리비아에서 두 번 째 큰 도시인 벵가지라는 곳에서 입찰을 했는데 당시에는 이름도 생소한 곳이며 현지 사정에 익숙한 사람이 없었다.


런던 공항은 출국 수속 후 비행기 보딩 장소가 멀기로 유명하다.


입찰 서류가 여행용 트렁크로 12개쯤 되었는데 6-7명이 양 손에 3-40kg정도 되는 무거운 가방을 하나씩 들고 오래 걸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예상 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트리폴리에서 벵가지로 가는 비행기에 입찰 서류가 잘 못 실려 다른 도시로 간 것이다.


 급히 다시 벵가지로 서류를 가지고 왔는데 이 번에는 입찰 서류가 통관이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대수로 공사 입찰 서류라 보안이 필요하다고 해도 공항 검색 말단 관리가 막무가내였다.  


이 많은 서류가 어떤 내용인지 모르니 일일이 서류를 읽어 보고 불온 문서가 아니면 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독재적 사회주의 국가의 병폐 중 하나다.


입찰은 이틀 후 인데 서류를 찾을 방법이 막막하던 중 마침 삼성현지 책임자와 연락이 돼서 이 분이  잘 아는 공항 관리에게 부탁을 하여 간신히 입찰 서류 원본 가방 하나만 되 찾게 되었다 


이 후 런던에서 수 차례 회의를 하며 어려운 과정을 거쳐 우리가 협상 대상 회사 중 1번 순위로 선정되었다.


몇 달후 리비아 발주처 대표들이 최종 낙찰자를 결정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단장은 S 라는 벵가지 사람인데 지역유지로 차관급이였으며 부드러운 인상에 유럽 영화에 나오는 미남 배우 같았다. 

 

그 외에 부단장으로 4명이 왔는데 처음에는 좀 경직되고 자기네끼리도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인상이었다.


 어느 장소든 5명이 동시에 입장하고 퇴장하였다. 


 그 중 몇 사람은 미국 텍사스와 알라바마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 했는데도 영어를 안 하고 겉으로는 미국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았다.


보름 정도 지나고 거의 동아로 방향이 결정되자 긴장이 풀리는지 극구 사양하던 술도 같이 하면서 친분을 좀 더 쌓아가게 되었다.


 이 후 벵가지와 런던에서 반년 이상 여러 차례 회의를 거친 다음 낙찰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몇 몇 경쟁사들의  끈질긴 방해 공작으로 진전이 없었다.


 그 들이 발주처를 우회하여 리비아 권력층에 직접 로비를 하는 정황도 포착 할 수 있었다.


발주처에서는 우리를 선호 했지만 다른 회사와 가격을 비교하면서 동아의 가격을 내리라는 고위층의 지시를 강하게 반대 하기가 어려웠다

.

결국 다른 회사의 가격보다 높으면 안 되는데 워낙 큰 공사이다 보니까 계산 방법에 조금만 차이가 나도 몇 천 만 불은 쉽게 왔다 갔다 하였다. 

 

이태리 회사가 얼마를 다시 깎아서 견적을 냈다는 루머가 나 돌고 있었다.


이런 시간이 1년 이상 지나던 어느 날 발주처 책임자로부터 런던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런던 공항에 나가 리비아 벵가지에서 오는 발주처 일행을 맞이 했다.


공항 입국 게이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보자 그 중 한 사람이 환히 웃으면서 다가 왔는데, 이 사람들은 친해지면 가볍게 포옹하며 서로 얼굴을 부빈다.


그가 인사하는 듯이 얼굴을 가까이하며 귀속말로 '이번에 너에게 선물을 가지고 왔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공사를 드디어 계약 하는구나 '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들은 국제전화는 물론 런던시내에서도 전화로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자기네들 전화는 모두 도청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날 오후 바로 런던 힐튼 호텔 17층 방안에서 그 사람을 조용히 만났다.


벌써 2년 이상을 같이 지내며 좋을 때는 술 친구지만 가격을 네고 할 때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적군으로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들었는데 이제 결론이 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그는 내방에 들어오자마자 맞은 편 작은 소파에 털썩 앉아 던힐 담배를 한대 꺼내 물더니 코트 안쪽에서 두터운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턱 던져 준다. 


상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입찰 가격을 최종 결정 하여 일을 마무리  할 수 있는 자료가 있었다.


발주처 사람에게 결정적인 자료를 건네 받은 나는 작은 냉장고를 열고  그 안에 있는 미니 오렌지 주스 한 병을 건네 주었다.

 

그는 병 째 들어서 후딱 마시더니 재떨이에 담배를 부벼 끄고 복도의 좌우를 살피며 조심스레 내 방을 나갔다.  


모두 5분도 채 안된 시간이었다.


 나는 옆 방에 있던 비서실장을 불러서 "33억불어치 서류 받고 미니바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 한 병 줬어요." 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최원석 회장께 곧 자세한 보고를 했지만, 현지 임원들에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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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에 하나 말이 새어 나가면 발주처 사람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가격을 더 깎아야 한다는 임원들에게 더 이상 절대로 가격을 내리지 말라고 했지만, 자세한 설명을 못하니 답답하기도 했다.


이 후 며칠 간 런던에서 세부적인 회의를 한 후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숫자인 33억불의 1차 공사를 정식으로 낙찰 받게 되었다.


동아는 이 후 이 공사에 총력을 기울이는 체제로 가동되었다.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 했던 문제가 여기저기서 마구 튀어 나왔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특수성에 익숙지 못해 공사 준비 과정에만 시간이 많이 걸렸다.


사하라 사막이라는 자연조건도 사우디의 경험은 있었지만 쉽지 않은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동아, 통운 임직원 모두 이 공사가 세계 8대 불가사의가 될 거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열심히 하다 보니 공사 착공 반년쯤 지나자 어느 정도 본 괘도에 오를 수 있었다.


처음 계획보다 어려운 공사지역이 여기저기 나온 것은 공사 진척에 따른 설계 변경등을 통하여 오히려 수익증대를 이룰 수 있었다.


동자부 장관을 지낸 유양수 부회장이 현지에 거의 상주 했었고 해외 현장에서 오랜 기간 고생한 최재영 사장, 최영태 사장, 정진삼 상무 등도 초기 발판을 닦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런던에서는 유성룡 사장이 해외활동을 긴밀히 지원 해 주었다.


어려웠던 초창기에 선발 주자로 사하라 사막에서 많은 역경을 이겨낸 여러 직원들과 근로자들께 가장 고마운 마음이다.


그 당시 리비아는 가다피의 혁명으로 이미 많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 공사는 가다피 필생의 숙원사업으로서 세계적 이목이 집중되었지만, 업체 선정이랄지 세부적 사항은 발추처 의견을 존중 하는 것을 보면서 가다피가 상당히 공정하고 리더쉽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자기의 출생지역이 아니고 반대파가 많은 벵가지를 중심으로 공사를 시작하는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했다.


혁명 후 현지인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지방 자치적인 체제로 나라를 운영하는 이런 면이 카다피의 리더쉽의 주요 부분이라 생각되었다.


또 자세히는 모르지만  다른 중동국가의 권력자들보다는상당히 청렴한 사람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반면에 그에게 저항하는 반정부 학생들을 학교 운동장에서 공개 처형하는 극단적인 독재자의 면모도 있었다. (그는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하여 42년간 장기 집권했으나 2011년 내전 중 반군에게 사살되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1986년에는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트리폴리를 전투기로 공습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고, 이 후 미국의 기술 제휴 회사에서 도움을 받기가 어려워 졌다.


발주처 사람들도 해외 여행을 거의 안했고  공사대금 지급도 연기 되는 등 많은 문제가  발생되었다.


이 밖에도 이런 저런 난관이 있었으나 이 후 동아는 2차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주하게 된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한국 해외 건설사의 새 장을 여는 분수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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