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곡
아침에 일어나서 불을 켜면 전등불이 들어오고,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보고 물을 틀면 그냥 마셔도 좋은 물이 나온다.
가스 보일러의 가스가 끊기지 않아 겨울 추위를 모르고 산다.
그 많은 쓰레기들이 하루 지나고 나면 말끔히 치워 진다.
가장 싼 것이 쌀이라 굶는 걱정 안 한다.
길에 나서면 수많은 자동차들이 신호에 따라 잘 움직인다.
은행이나 행정 기관도 잘 돌아간다.
매월 25일 새벽이면 연금 들어오는 신호음이 어김없이 들린다.
매월 정기 검진하러 안과에 들리면 진료비 1,500원 안약 1,000원의 의료 보험 혜택을 본다.
이 모든 것들이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눈물겹도록 애써 만들어 온 것이다.
진짜 난세(亂世)는 어느 날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멈추는 것이다.
객관적인 나라의 위상은 난세가 아니다.
그런데 낡아서 쓸모 없어진 관념과 정서로 편을 갈라 이미 사라졌거나 의미 없어진 적(敵)을 불러내어 죽기 살기로 싸운다.
‘토착 왜구’니 ‘종북 좌빨’이니 하며 싸운다.
그것도 엘리트를 자처하는 지식인과 종교인, 정치인과 운동가들이 앞장서서 퇴행적인 확증편향의 광기(狂氣)를 뿜어낸다.
진영 대립은 불가피한 것이며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 필요한 역할을 한다.
진영이 정상적일 때 이야기다.
지금의 심리적 내전 상태는 정상적인 진영 대결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과 정서의 퇴행적 편가름이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망하지 못해 환장한 미친 짓이다.
어느날 문득 우리가 애써 만들어 온 일들이 멈추는 것을 보아야 깨달을 것인가?
이 어이없는 내전을 종식시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차제에 크게 바꾸고 크게 나아가보자.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다.
남북 두 국가체제로 평화 공존하다가 여건이 무르익으면 통일로 나아가는 한반도 전략은 지정학의 저주를 벗어나는 큰 그림이다.
대한민국이 퇴행적 내전을 끝내고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이고 애국적인 좌우 보혁 세력 간의 연합정치와 협동정치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대한민국이 인류적 과제인 문명전환의 선구적 역할을 할 수 있게하는 출발점이다.
세계 패권의 재구성을 둘러싼 열강의 싸움에 휘말리는 지정학의 저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명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선진국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민족의 The Next Peninsula(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출발했다면, 미래는 한반도가 중심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향한 큰 꿈이다.
근대화 시기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이미 움텄던 꿈이다.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이 그것이다.
달라진 상황에 맞게 고친다면 ‘만국활도대한민국(萬國活道大韓民國)’이다.
유혈 내전으로 가지 않고 이 난국을 창조적으로 타개할 수 있으면, 우리의 큰 꿈은 비로소 달빛이 아니라 햇빛 속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 출발이 앞으로 몇 개월에 달린 것 같다.
헛힘 쓰는 쪽이야 기진맥진할 때까지 싸우고, 진짜로 힘들을 내 보자.
나에게는 밝은 전망이 보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역사의 섭리처럼, *이성의 간지(奸智)가 작동하는 것처럼.
이남곡 - 인문 운동가
*이성의 간지 - 헤겔의 저서 '역사철학강의'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이성이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 그 방법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