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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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세밑, 뉘우칠 회(悔)의 탄식은 있을지언정 고칠 개(改)의 돌이킴은 몹시도 아쉬운 회개, 그 얼어붙은 마음으로 이 해를…

wy 0 2024.12.31

하루의 삶은 황혼녘에 그 전체의 모습이 나타난다.

 

한 해의 삶도 세밑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모호한 얼굴을 드러낸다.

 

한 해 동안 달려온 삶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깊은 후회와 탄식에 빠져드는 세밑, 이 해의 황혼녘이다.

 

그 후회와 탄식 없이는 새로운 각오, 참신한 다짐의 새해를 맞을 수 없다.

 

후회와 탄식을 반성과 참회로 부정(否定)하고, 그 반성과 참회를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또다시 부정하는 '거듭난 긍정'이 변증법적 발전의 지양(止揚)이라면, 세밑의 성찰이야말로 새해 새로운 삶을 예비하는 튼실한 밑거름이 될 터이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휴전협정에도 불구하고 지금 중동의 하늘에는 별빛 대신 포탄의 불꽃이 튀고 송구영신의 전광판 대신 미사일의 불기둥이 맹렬하게 솟구친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군부대에 북한 군인들이 직접 끼어들면서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닌 전쟁으로 다가왔다.

 

벌써 천여 명의 북한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북한은 남북 동포가 같은 민족임을 부정하면서, 서울을 핵공격의 과녁으로 삼고 남한 선제타격을 아예 법으로 명문화했다.

 

주술(呪術)의 무기(巫氣)가 어른거리는 권력 주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무모한 비상계엄 선포, 거대야당 대표의 줄줄이 이어진 수사와 재판, 여야 정치권의 죽기 살기로 맞부딪치는 권력싸움, 두 쪽으로 갈라선 거리의 군중시위

 

지금 이 나라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혼돈의 먹구름에 뒤덮여있다.

 

그동안 여권은 오직 한 사람, 대통령 부인의 분별력 의심되는 행적 탓에 내분 상태에 빠졌고, 야권도 오직 한 사람, 여러 형사재판 법정에 소환된 피고인의 보호벽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온 국민을 보살펴야 할 여야 정치권이 각기 '한 사람 보살피기'에 몰두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이성을 잃은 정치다.

 

정권을 잡고도 국가발전에 필요한 정책 하나 올바로 추진하지 못하는 정부여당, 절대다수의석을 차지하고도 민생에 희망을 주는 법률 하나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야당.

 

이처럼 이성을 잃은 정치권을 국민이 신뢰할 아무 이유가 없다.

 

톨스토이는 탄식했다. “신은 파멸시키려는 사람에게서 먼저 이성을 빼앗는다."

 

세계도 나라도 온통 싸움판이다.

 

모두가 깨끗한 세상을 외치면서 실은 살벌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정의와 평화를 앞세운 정치꾼들의 헛소리가 나라를 얼마나 큰 혼란으로 이끌었던가?

 

총검을 치켜든 군홧발이 국가에 어떤 불행을 끼쳤던가?

 

광장의 촛불, 거리의 함성이 사회를 얼마나 심각한 갈등으로 몰아넣었던가?

 

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끔찍한 증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좌우의 이념 투쟁, 지역의 동서 분열, 세대의 노소 대립, 계층의 빈부 갈등으로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펄펄 끓는 증오와 분노의 불길을 내뿜고 있다.

 

분노는 한때의 광기(狂氣). 분노를 누르지 못하면, 그 분노에 눌리고 만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의 경고다.

  

날카로운 분별의 지성은 오만으로 흐르기 일쑤고, 뜨거운 열정의 감성은 독선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오직 겸손과 관용의 정신만이 티 없는 성찰의 지혜로 이끈다.

 

그 지혜는 한 해의 삶에 쌓여온 너절한 욕망의 찌꺼기들을 말끔히 비워내는 세밑의 그윽한 성찰이리라.

 

지성과 논리는 아침의 이념, 감성과 열정은 한낮의 이념일 뿐지성이나 감성은 저녁의 이념이 되지 못한다.

 

황혼녘의 이념은 성찰의 지혜다.

 

아마도 헤겔은 황혼녘에 날개 펴는 올빼미에서 그 성찰의 지혜를 깨닫지 않았을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되어 있다." 서양 격언이다.

 

선의를 외치면서 지옥으로 달려간 한 해가 아닌가?

 

공전(公轉)의 한 바퀴 고단하게 돌아온 세월의 끝자락뉘우칠 회()의 탄식은 있을지언정 고칠 개()의 돌이킴은 몹시도 아쉬운 회개, 그 얼어붙은 마음으로 이 해를 보낸다.

 

깊은 아픔을 껴안고 희망의 새해를 기대해야 하는 우울한 세밑, 조르죠 아감벤의 섬뜩한 성찰이 황혼녘의 텅 빈 가슴에 밀려온다.

 

천사가 된다는 착각으로 우리는 결국 악마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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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 근(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LA조선일보 칼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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