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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선평화학교로 이어진 독립운동가 김이직 선생의 맥

wy 0 202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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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직 선생님의 자손들, 김지나(맨 왼쪽) 안바나바(맨 오른쪽) -존칭 생략

 

김이직 선생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김이직 선생님은 1875년 평안남도 용강군 알뫼마을에서 태어나, 유년기에는 홍경래가 수학했다는 서당 화재에서 공부했습니다.

 

1904년 이후 대한제국 장교로 근무하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부패한 지방 군수와 봉건 관리를 처단합니다.

 

1907년 러시아 연해주 니콜스크로 망명 후 애국지사인 김치보가 운영하는 건재 약국 *덕창국 니콜스크 지점의 주임을 맡습니다.

 

1912년 한인 학교인 동흥학교 설립 참여를 계기로 교육 운동에 뛰어듭니다.

 

러시아 2월 혁명 후인 191710월 니콜스크 한인회 발기인 대표로서 한인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에 선출됩니다.

 

19186월 전로중앙총회 상설의원 후보로 선출되며, 19193.1운동 직전 개편된 대한국민의회 상설의원으로 선출됩니다

 

 

김이직 선생님은 덕창국에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김이직 선생님이 주임으로 있던 건재약국 덕창국은 중요한 항일 운동 거점이자 이동휘, 김립, 이인섭, 홍범도 등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모임 장소였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에서 활동하던 정치망명자들이 서신 연락을 하거나 유숙하고 경제적 원조를 받는 장소였습니다.

 

김이직 선생님은 덕창국에서 안중근 의사 전기 간행을 위한 기념사진 판매 책임자로 일하며, 1913년 독립운동가 이갑 선생 치료비 모금도 합니다.

 

19193·1 운동 이후 무장 투쟁이 활발해지면서 최재형, 엄주필 등과 함께 한인 빨치산 부대들에 식량, 의복, 신발, 기타 군수품을 공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소득을 동포 구제 등 자선 사업에 사용합니다.

 

 

선생님은 192045일 체포되어 47일 총살당하셨지요.

 

. 191810월 말, 한인 사회당 간부인 이동휘, 김립, 이인섭은 하바롭스크에서 피신해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 동쪽인 한인 농촌에서 회합합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은 최의관 집에 머물며 빨치산 부대를 조직합니다.

 

이 계획을 원활히 추진키 위해 한인 사회 지도자인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선생을 찾아가 자금 지원을 요청합니다.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의 건재약국 덕창국 주임인 김이직은 식료, 의복, 신발뿐만 아니라 무기까지 공급합니다.

 

그러나 결국, 일본군 첩보에 걸려 45일 끌려가 7일 왕바산재 언덕에서 총살당합니다.


*니콜스크 덕창국은 아스츠라한스카야(Astrakhanskaya) 거리 10[현 시비르체바 거리 10]에 있었다.

 

*[김이직 씨는 평양인이니 금 46세라 13년 전에 도강, 소왕영 한인민단의 제1회 단장, 동포에 대한 공헌은 말할 수 없이 많아 난곤한 동포에게 밥 먹이며 의복 입히고 잠재우고 노자 주기를 십 년 하루같이 하다.

 

씨가 도아한 지 십여 년에 일 푼 저축이 없음은 그 소득을 모다 교육 구제 등 자선 사업으로 산한 고라]

-상하이의 독립신문. 1920515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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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참변 

 https://www.youtube.com/watch?v=2M0-Sqvj7dQ 

4월참변 당시 희생된 애국지사 토론회 -무돌TV 


 -192056일자 일본 신문은 육군성 발표 인용, 러시아 우수리스크 한인지도자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4명 사살 보도 

 

-상하이의 독립신문은 515일 자, 최재형 외 3인 피살 보도

 

 

국경선 평화학교에 김이직 선생님의 방이 마련되었는데, 어떤 학교이고 어떤 의미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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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선평화학교


국경선평화학교는 분단의 시대에 평화통일 일꾼 (Peace Maker)을 양성키 위해, 2023년 6월 6일 학교 건물을 철원에 준공하였습니다.

 

국경선평화학교 유튜브: 

https://www.youtube.com/@MrLedze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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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군 철원읍 월하리 국경선평화학교 인근에 있는 소이산 평화둘레길, 전국에서 찾아온 1000여 명이 평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중앙일보 박진호 기자. 2023 6 6

 

'독립운동가 김이직 교실'은, 국경선평화학교 피스메이커 1기 김지나 (김이직 선생의 증손) 가, 식민지시대에 독립학교가 있었다면 분단시대엔 국경선평화학교가 있어, 독립운동의 정신이 평화운동으로 이어나가길 바라는 염원으로 이 학교에 교실을 만들었습니다.

 

김이직 선생님이 운영하셨던 연해주 덕창국은 당시 독립운동 지원, 교육, 보건, 정보 교류 등의 일을 포괄적으로 수행했었습니다

 

우리도 남북의 접경지역인 철원에서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평화운동을 전개하길 바랍니다. 

 

이제 역사의 단절로 인한 민족의 비극을 더이상 겪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 독립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김이직 독립운동 교실'이 그 역할을 감당하길 바랍니다.

 

국경선평화학교에는 함석헌 순례자 숙소풀무원 창립자 원경선 홀등도 있습니다.

 

 

김이직 선생님의 활동이 국내에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나요?

 

김이직 선생님의 활동은 한.러 수교 이후,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한 반병률 교수님에 의해 주로 알려졌습니다.

 

하와이 대학원 역사학 박사인  반병률 교수님은 한국 외국어대 명예교수이고, 4월 참변의 희생자 최재형, 김이직 선생등의 활동을 오랫동안 연구하였습니다.

 

매년 4월 5일이면 연해주에서 4월 참변 추모제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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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참변 추모제 동상

 

최재형 선생님은 국내에 비교적 많이 알려졌고, 김이직 선생님은 국경선평화학교 피스메이커 안바나바 목사가 계속 자료들을 발굴해 알리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가계

김이직(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김린성(평남 용강에서 명신학원을 설립해 아버지 김이직의 뜻을 이어 나간 아들 김린성은 건국훈장애족장(1990)>김형숭>김지나(사위 안바나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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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직 선생의 여동생 김윤신에 대한 이야기

 

김이직 동지가 왜병들에게 희생되자 김윤신은 일본 헌병대를 찾아가서 자기 오빠 시신을 내어달라고 강경히 요구하였다

 

헌병 대장은 시신을 못 내어준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김윤신은 수다한 조선 여자들을 동원해 헌병대에 매일 찾아가 강경히 시신을 내어놓으라 항의하였다.

 

일본 헌병은 시신은 이미 불에 태웠으니 재가 된 해골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 말은 들은 김윤신은 그러면 화장한 곳을 알려달라고 강요하며 여러 날을 계속하여 헌병대에 가서 종일토록 항의하였다.

 

헌병들이 '야만적 행동을 하지 말고서 빨리들 물러가라'고 호통하자, 김윤신은 항의하기를 '일본은 소위 문명국가라고 당신이 매일 말하면서 자기 조국을 사랑하는 조선 사람들을 학살하니 당신도 만일 일본 애국자라면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학살을 당해야 한다'며 함성을 치며 대들자 수다한 놈들이 달려들어 조선 여자들을 밖으로 밀어내었다.

 

그 이튿날 다시 헌병대로 가니 어제까지 있던 헌병 대장은 없고 다른 사람이 나타났는데 '자기는 처음 왔으므로 이전에 진행된 사변들은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

 

선생들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 후 김윤신은 오빠의 원수를 갚기 위해 평남 용강에 가서 김이직의 두 아들 김린성, 김남성 형제를 만나 당시 일본 돈 5000원을 장만해 하얼빈으로 돌아오다 헌병대에게 수색당해 돈을 압수당했다.

 

그러나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토지 매각으로 마련한 자금을 두 아들에게 받아, 지린성 둥닝현 산채거우에 고무상점을 내었다.

 

한 달 뒤, 하얼빈으로 가서 그곳에서 상업하던 친일 함동철(덕창국에 침투한 밀정)을 살해하였다.

 

그 후 산채거우 고무상점을 폐쇄하고 니콜스크로 도피하였다.

 

-이 이야기는 이인섭이 원동 해방 전쟁 후 김윤신의 남편 김달하를 만나 들은 내용임

 

*김윤신은 빨치산 부대에 들어가 민족해방운동에 참여, 1928년 국내 공작원으로 평양에 파견되었으나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탄광에 노동자로 위장해 침투 독립운동 전개하던 중, 일본 헌병이 아닌 밀정 조선인에게 발각)

 

그 후 출옥해 일본 추격을 피해 소련으로 갔고 1943년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서 사망했다.

 

-박블라지미르, [운명의 멍에] 고려일보 1998.10.15.일 자 3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살던 김이직 조카 김타미라 안드레예브나(한국명 김영화, 1918년생)가 남긴 회상을 기초로 작성한 기사.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평남 용강에서 명신학원을 설립해 아버지 김이직의 뜻을 이어 나간 아들 김린성도 건국훈장 애족장(1990)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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