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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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영웅' 의 그림자, 지휘자 임원식 선생

wy 0 202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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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파 임원식 1919 ~ 2002

 

임원식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경이었습니다.

 

당시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선생님과 친했는데, 연주가 끝나면 항상 운현궁 고택에서 간단한 리셉션이 있었지요.

 

거기서 뵈었던 것 같습니다만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이후 임원식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 예고와 예원학교를 이화학원에서 분리하여 이화예술학원으로, 새로운 교육재단을 만들게 되었고 필자가 이사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신봉조 이사장님의 뜻이 함께 하셨던 것은 물론이었지요.

 

두 분께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운파(雲波) 임원식 선생님의 일생을 자료들을 참고하여 간추려 봅니다.

(아래부터 존칭 생략)

 

1945년 해방이 되자 연희 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현제명이 주도하여 고려교향악단을 창단하였다.

 

그때는 지휘를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이 없어서 현제명, 계정식 등이 임시로 지휘를 하였다.

 

그러다가 1946년 임원식이 귀국하자 지휘를 부탁하였는데 당시 약관 27세였다

 

임원식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악보를 치우고 암보로 빈틈없이 지휘하여 단원들을 놀라게 하였다.

 

다음 날 신문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지휘자 임원식의 탄생을 대서특필했다. 

 

임원식은 19196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그의 집안이 봉천으로 이사하게 되어 어린 시절을 만주 땅에서 보냈다.

 

부친은 목사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음악을 접할 수 있었는데, 집안이 넉넉지 못해 교회에 있는 오르간으로 연습을 하곤 했다

 

그는 피아노 즉흥연주를 잘하여 이미 10대에 영화관에서 피아노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교회에서는 멋진 주법으로 찬송가를 연주하여 인기를 끌었다.

 

1939년 그의 나이 20세 때 러시아인들이 만든 하얼빈 제일 음악학원을 졸업하였다.

 

23세가 되던 194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경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전공하는 한편 작곡을 배웠다.

 

당시 동경에는 김원복, 유한철, 이인영, 윤기선 등이 먼저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임원식은 음악 공부를 하면서, 한편으로 영화 음악을 편곡하고 카바레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 수입으로, 유학생들에게 밥을  자주 사주었다.

 

1944년 강제징용을 피해 다시 하얼빈으로 간 임원식은 백인계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라디오 관현악단에서 편곡 일을 맡는 한편 방송 녹음 지휘도 하였는데, 이때부터 지휘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일본 관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으며 하얼빈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인 아사히나 다카시(1908~2001)에게 지휘를 배웠다.

 

얼마 후 일본의 패전으로 일본인 상임 지휘자가 갑자기 관현악단에서 추방되자, 임원식은 그를 대신해 정기연주회의 지휘자로 무대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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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임원식, 1946

 

이후 임원식은 아사히나 다카시에게 은신처를 제공했고, 결국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훈훈한 일화는 훗날 일본경제 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미 군정청은 한국을 이끌어갈 인재를 키우기 위하여 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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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음악회를 지휘하는 임원식, 1947

 

임원식은 1948년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1949년에는 미국 뉴욕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고려교향악단이 재정난으로 해산하게 되자, 다시 지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유학생 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2년 후 임원식이 한국에 돌아와 바로 전날까지 교향악단을 지휘하다 맞은 한국전쟁은, 그에게도 엄청난 시련의 기간이었다.

 

그는 6, 25 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게 되었고 이때 북한군 소령 계급장을 달고 북한 선전 활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소설가 박완서도 피난을 못 하고 남아 김일성 선전 신문 발간에 참여하였다.

 

북한군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임원식은 북으로 끌려가던 중 도망을 해서 납북을 겨우 면하였다.

 

당시 코미디언 양훈, 구봉서 등도 납북 중 목숨을 걸고 탈출하였다.

 

하지만 임원식은 잠시 북한군 소령 계급장을 달았던 부역 활동 때문에 수복 후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아까워하던 주위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

 

이기붕 당시 서울시장의 부인 박마리아와 이화여자대학교의 김활란 등이 구명운동을 하여 극적으로 사형을 면했다.

 

나중 일이지만, 임원식은 재독 작곡가 윤이상이 베를린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서울로 끌려와 1심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구명운동을 하였고 윤이상은 간신히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윤이상과 개인적 친분도 있었지만, 자신의 과거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원식 선생님과 베를린에서1994 2 19 KakaoTalk_20221030_161336377_16.jpg

임 선생님과 베를린 윤이상 선생님 댁을 방문한 후 찍은 사진, 1992

윤이상 선생 만남:  http://www.choiwonyoung.net/bbs/board.php?bo_table=meeting&wr_id=6&page=2

 

그는 오랜 기간 지휘자로서 KBS 교향악단을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나 운영난은 여전히 심했다.

 

결국, 1969년 악단을 국립으로 이관하는 작업을 마치고, 국립교향악단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아서 초대 상임으로 계속 지휘를 하게 되었다.

 

1972년 국향의 상임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 악단의 합주 기량을 국내 최고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또한, 그는 서독 베를린 교향악단을 비롯하여 뮌스터 교향악단, 뉘른베르크 교향악단, 일본의 NHK 교향악단, 오사카 필하모니, 홍콩 필하모니 등 많은 해외 교향 악단을 지휘해 왔다.

 

임원식은 체계적 조기 예술교육을 위하여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세우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이화여고 교장이었던 신봉조와 함께 이화예술고등학교를 창설한 것이다.

 

임원식은 처음에는 이 학교의 교감으로 학교의 기틀을 잡았고 뒤에 교장으로 활약하였다.

 

이 학교는 1953년 서울예술고등학교로 개명하였고 우리나라에서 중추적인 예술교육 기간으로 성장하였다.

 

1966년에는 중학교 과정인 예원 중학교를 개교하여 중학교 고등학교 일관된 교육기관을 갖게 되어 한국 예술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1973년 국제 청소년 음악연맹에 가입하고 대한민국 대표를 역임하며 한국청소년음악연맹을 창설하여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이 연맹은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30여 개 나라가 회원국으로 가입하여 월드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세계 순회 연주를 하였다.

 

1984년부터 6년간은 인천시향 상임 지휘자로 지방 교향악단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을 지냈고 은관문화훈장, 대한민국 예술원상, 구 서독 정부의 문화훈장 등도 수상하였다.

 

2019년 탄생 백 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렸는데 연주곡목은 27살의 청년을 일약 명 지휘자로 만든 베토벤의 운명과 임원식의 생애를 생각하게 하는 베토벤의 영웅이었다.

 

누가 선정한 곡들인지는 몰라도 선생의 풍모나 인품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탁월한 곡 선정이었다.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회 Screenshot 2022-11-07 at 09.23.18.JPG

  

임원식 선생은 KBS 교향악단의 명예 지휘자와 한국 지휘자 협회의 명예 회장으로 활동했고, 200261일 한일 월드컵 기념으로 열린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 출연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주회 직후 위중한 병이 발견되었고, 8월에 갑작스레 별세하였다

  

베토벤의 '영웅'을 들으며 임원식 선생님을 생각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I9HapWc4mr4

 

작곡가로서 가곡 '아무도 모르라고를 남겼다.

https://www.youtube.com/watch?v=Ci4D0MvT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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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루티스트 고순자

부인 고순자 선생은 한국 플루트 음악 발전을 위해 큰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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