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싶어한다.
바다의 풍랑을 잠 재우고 아픈 사람의 병을 고치는 그런 기적을 보고 싶어한다.
기적을 보여 준다면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겠다며 보고 싶어한다.
도마처럼 십자가 자국을 보여 달라는 말은 못했지만, 2천년 전 다른 제자들도 아마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냥은 믿어지지가 않으니까 기적을 보여 달라는 절절한 기도인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이아무개 목사님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암투병의 괴로움과 실명의 위기를 신앙으로 극복했다.
목사가 되어 몇 년간 열심히 사역을 했지만, 불행히도 암이 재발된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실명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에게 이렇게 기도했었다.
“딸이 실명하지 않게만 해 주신다면 이제부터 하나님을 믿겠다”라고.
소원대로 되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분은 평소 종교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였는데, 드디어 하나님께 나왔다는 사실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흐뭇한 이야기 거리였다.
사랑하는 딸의 눈을 고쳐만 주면 하나님을 믿겠다던 그 믿음에 대해서, 딸의 사망 후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는 없다.
과연 기적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기적으로 생각하는가?
'기적'을 한글사전에서 찾아보니 '사람의 생각이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그런 기이한 일들 중 어디까지가 기적이고 어디까지가 우연일까?
'우연'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 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생각과 힘으로 할 수 없는 문제가 인과 관계없이 일어나면 이것은 기적인가 우연인가?
오늘 아침에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우연인데 넘어져서 땅에 있는 금덩이를 주었다면 기적인가?
불치병에 걸린 것을 우연히 종합검진에서 알게 되었는데 약을 먹지 않고 나았다면 기적인가?
힘든 삶을 살다 보면 기적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겪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한 경험 후 독실한 신앙인이 된 사람도 있고 기적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기적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기적을 조건으로 한 신앙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 기적의 감격이 세월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 정도라면 몰라도 기적과 우연의 경계에 있는 일들도 많다.
또한 예전에 기적이라고 생각된 일들도 과학의 발달로 그 원인이 많이 밝혀지고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어떤 일은 기적 같이 해결되지만, 그 후 또 간절히 바라는 일들이 간혹 생겨나는데 이 일들이 계속 다 잘 되기는 어렵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은 다시 불안해지고 신에 대한 불신이 생겨날 수 있다.
신앙심도 따라서 예전과 같지 않게 된다.
그러면 다시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게 된다.
어느 노래 제목처럼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게 된다.
대부분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약하고 흔들리기 쉽다.
여기서 기적이란 환경이나 운명이 변하는 것이라기보다 본인 스스로가 변하는 것이라고 넓게 해석할 수도 있다.
사람이 성격이나 생각이 변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데 생각이 바뀌면 결국 운명도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은 요즘 들어 진보적인 신학자들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바울이 말한 '예전의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라는 말씀이 이미 기적의 정수를 표현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기적을 보여 주면 변하겠다는 것은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
기적은 ‘하나님이 나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큰 변화는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하는 과정에서 많이 일어난다.
참 좋은 해석이지만 이런 기적에 대한 해석은 다소 주관적이다.
사람의 기본이 크게 바뀌게 된 사실을 객관적으로 잘 나타내기가 쉽지 않고, 또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적적인 변화는 도덕과 깨달음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칸트가 말한 '하늘엔 빛나는 별, 내 마음에는 도덕률'이라는 문구나 동양의 노장 사상도 이러한 경지에서 근접한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기적이라고 말하기에는 개인에 따라 이견의 여지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기적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조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항상 기적 안에서 살고 있다.
살아서 숨 쉬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바로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 기적인 것이다.
기적이 확률적으로 이루어지기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면 우리가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 중 인간으로 태어날 확률에 대한 말씀이 있다.
바다에 눈 먼 거북이가 살고 있고 이 거북이가 천 년에 한 번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데, 마침 그때 떠다니던 구멍 뚫린 나무토막의 구멍에 거북이 머리가 끼일 정도의 확률이, 세상에서 인간의 몸을 얻고 태어날 확률이라고 한다.
이 비유를 '눈 먼 거북이 나무토막을 만난다' 하여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고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자체도 기적이지만, 지구에서 우리가 산다는 것을 생각해도 기적이다.
지구는 천 억개의 은하 중 하나인 우리 은하에 있는 천 억개의 별 중의 하나인 태양을, 일정하게 도는 수많은 별 중의 하나이다.
문제는 약 50억 년 후에 태양은 지금보다 2백배 가량 커져서 지구를 삼키는데, 그 온도는 6천도에서 3천 5백도로 좀 낮아진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우주의 상상치 못할 넓은 공간에서 무한히 작은 점이라고 볼 수 있는 지구에서도, 또 이렇게 제한된 좁은 장소에 우리는 산다.
또한 억겁의 과거로부터 미래의 무한대한 시간까지의 사이에서, 인간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우주가 존재하는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라면, 인간이 우주존재의 이유이고 기적 그 자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도 '온 천하를 주고도 생명과 바꿀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렇게 귀한 생명이라면 그렇게 얻기 어려운 삶이라면 그 자체가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돌아가신 친지나 부모님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그 분들의 삶이 고단하고 그리고 짧았던가.
지금 숨 쉬며 살아 있는 우리는 늘 신비한 기적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기적을 보고 싶다면 뛰고 있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 보자.
볼 수는 없지만 알 수는 있다.
이러한 기적을 생각하며 산다면 우리는 오늘을 더 사랑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나의 심장은 뛰고 있다.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