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인간 베토벤 이야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가족으로 두 동생이 있었는데 둘 다 형의 속을 무척 썩입니다.
첫째 동생 카스파(1774~1815), 나중에 양육권 소송 당사자인 카를의 아버지입니다.
형이 비서로 일을 시켰는데 초기작을 몰래 팔아먹기도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베토벤이 극구 결혼을 반대한 여자, 요한나와 카스파가 결혼하는데 여기서부터 베토벤에게 운명 1악장이 시작됩니다.
빰~~빰! 베토벤은 그것을 몰랐지요.
한 사람의 인생을 길게 보면 이런 것이 보이는데 당시에는 누구나 볼 수 없지요.
요한나는 문제가 좀 많은 여자였습니다.
여성으로서 품행이 안 좋았고, 결혼 전 사기, 절도 등의 전력도 있었어요.
베토벤 영화 중 ‘불멸의 연인’이라는 영화에서는 베토벤의 불멸의 여인이 바로 동생의 아내인 요한나라고 나오는데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나중에, 동생 카스파가 죽은 후 요한나의 아들이고 베토벤의 조카인 카를을 누가 키우느냐는 양육권을 갖기 위해 베토벤과 요한나가 4~5년간 치열한 법정 투쟁을 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베토벤이 결국 이깁니다.
이때 요한나가 법정에서, 베토벤을 음해하기 위해 사실은 베토벤이 나를 좋아한다는 발언을 하지만, 베토벤 연구 전문가들에 의하면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마치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하여 거의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스토리도 사실이 아닌 것처럼요.
이번에는 베토벤의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네페 (1748 ~ 1798)
먼저 네페라는 사람이 있는데 (Christian Gottlob Neefe) 그는 어린 시절의 베토벤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궁정 오르가니스트인 네페가 베토벤의 진정한 은인이었다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베토벤의 음악적 잠재력을 본격적으로 깨워주고 음악가라는 인생의 방향을 정해준 사람이 바로 네페였기 때문이지요.
또한, 빈곤한 베토벤에게 경제적인 도움도 주고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취직도 시켜주었습니다.
네페는 베토벤이 본을 떠나 더 넓은 세상인 빈으로 갈 수 있도록 선제후에게 청원을 하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도 있었는데 베토벤은 레슨을 받으며 네페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에 불만을 느꼈고, 네페는 베토벤의 고집을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때 좀 소원해졌는데, 약 10년이 지나서 베토벤은 네페 선생에게 그간의 마음을 풀고 편지로 감사의 마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선생님이 나에게 자주 건넸던 충고에 대해 감사히 생각합니다. 내가 언젠가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선생님 덕분입니다."
하이든(1732 ~ 1809)
다음 선생은 하이든(Franz Joseph Haydn)입니다.
하이든이 빈에서 베토벤을 2~3년 가르쳤으나 당시 워낙 바쁘고 유명한 하이든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는 못했고 베토벤은 불만을 토로합니다.
한편 베토벤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출판한 피아노 3중주 악보의 표지에 하이든은 '하이든의 제자 베토벤'이라고 쓰라는 제안을 했는데, 베토벤은 거절합니다.
하이든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은 베토벤을 위해서였는데, 자존심이 강한 베토벤은 애초에 하이든의 제자 같은 타이틀로 출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지요.
그런데 이 스토리도 어디까지 사실인지 좀 불분명합니다.
베토벤의 작품 헌정 내용을 찾아보니까 1796년 베토벤 피아노 소타나 1~3번까지가 하이든에게 헌정되었습니다.
피아노 3중주를 하이든 대신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1795년 헌정한 베토벤인데 불과 1년 후 피아노 소나타는 하이든에게 헌정했습니다.
어쩌면 베토벤이 하이든에게 미안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요.
살리에리 (1750 ~ 1825)
다음 선생은 살리에리(Antonio Salieri)입니다.
당시 베토벤에게 성악 작곡법을 제대로 가르쳐준 거의 유일한 인물이 바로 살리에리였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질투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했지만, 살리에리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유명 작곡가였지요.
성악 분야에서 베토벤의 롤모델이었던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빈에 오기 1년 전에 이미 사망했고 하이든은 대체로 기악 위주로 베토벤을 가르쳤기 때문에, 베토벤은 성악 쪽을 제대로 지도해줄 스승이 필요했었는데 이 빈자리를 메워준 사람이 바로 살리에리였습니다.
살리에리는 당시 빈에서 유행했던 이탈리아 양식의 오페라 작법과 창법, 아리아 등을 베토벤에게 가르쳤으며 둘의 사제관계는 베토벤이 작곡가이자 연주자로 본격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던 180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달리 살리에리의 가르침에는 상당히 만족했으며 자신이 남긴 글과 편지 여기저기에 스승 살리에리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바이올린 소나타 1~3번까지는 살리에리에게 헌정했지요.
이제 다시 베토벤의 음악, 5번 교향곡 2악장으로 가겠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음악, 노래, 평화이야기’에서 이 2악장이 단연 평화에 가깝습니다.
2악장 – 연주는 약 9분입니다. 안단테 콘모토(안단테보다 조금 빠르게 활기차게)
저는 예전부터 이 2악장을 들을 때마다 참으로 절묘한 악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2악장이 없었다면 베토벤 운명의 나머지 1.3.4악장의 연결이 안 되어 힘을 잃었을 것입니다.
점잖고 우아한 첼로와 비올라가 편안한 멜로디로 1악장과 전혀 다른 시작을 알리고 베이스는 피치카토로 바쳐줍니다.
1악장의 ‘빰~빰’과 극단적인 대조가 되면서 운명에 나동그라진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느낌입니다.
2악장의 주제는 아름다우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느린 악장답게 1악장에서 한껏 휘몰아쳤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서정적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1악장의 느낌을 완전히 꺼뜨리지는 않고 있지요.
또한, 목관과 금관 등 관악기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이 악장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플루트와 오보에 듀엣이 새로운 멜로디로 현악기와 대화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소리가 커지며 기쁨을 노래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4악장에서 다시 주요 주제로 크게 전개되지요.
다시 관악기들의 합주로 어린 시절 아무 걱정 없던 때의 회상 같은 느낌을 지나 슬그머니 2악장이 끝납니다.
어느 음악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베토벤 음악의 기적은 자유와 독창성이 뚜렸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일정한 유기적 설득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폴 헨리 랭
2악장 동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약 9분입니다.
동영상 14 – 베토벤 교향곡 5번 2악장, 카라얀 지휘
https://www.youtube.com/watch?v=aX5yLa0Auds
이제 인간 베토벤으로 돌아가서 그의 후원자들과 비서 안톤 신들러에 대한 이야기, 또 베토벤과 괴테가 만나서 주고받은 서신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먼저 후원자입니다.
발트슈타인(1762 ~ 1823)
발트슈타인 백작은 베토벤을 빈으로 보내는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베토벤을 보내면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하이든의 손을 거쳐 베토벤으로’ 라는 말을 했지요.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은 그에게 헌정한 곡입니다.
리히노프스키(1761 ~ 1814)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초기 10여 년간 절대적 지원을 한 귀족으로서 베토벤이 피아노 소나타 '비창' 등을 그에게 헌정했지요.
그러나 리히노프스키 공작과는 나중에 큰 사달이 납니다.
1806년 공작의 음악회에 온 나폴레옹 부대 장군들 앞에서 베토벤에게 연주하라는 부탁을 공작이 하자 베토벤이 거절합니다.
계속되는 부탁에 베토벤은 방에 들어가 방문을 잠갔는데 공작이 하인을 시켜 강제로 방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베토벤이 열 받아서 공작에게 의자를 던지려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베토벤이 그동안 거주하던 공작의 집을 나간 후 말합니다.
‘타고난 귀족은 많지만, 베토벤은 한 사람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쓰레기 청소차가 후진할 때 나오는 음악, ‘엘리제를 위하여’를 베토벤이 듣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루돌프 (1788 ~ 1831)
루돌프 대공은 오스트리아 프란츠 황제의 동생이었고 몸이 약했지만 상당한 수준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베토벤은 성질이 고약하지만 위대한 음악가이니까 싸우지 말고 그냥 넘어가라'라고 늘 주의를 주었습니다.
피아노 트리오 7번 ‘대공’은 그를 위해 쓴 곡입니다.
베토벤이 가장 많은 작품을 헌정한 인물 역시 루돌프 대공입니다.
헌정 곡은 무려 14곡에 달하는데 피아노 협주곡 4, 5번<황제>,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과 29번 <함머클라비어> 등이 있습니다.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에게 평생 지원을 아끼지 않은 후원자였고, 동시에 베토벤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운 학생으로서 매우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다음으로 아주 중요한 인물, 안톤 신들러입니다.
신들러 (1795 ~ 1864)
안톤 신들러는 베토벤 말년의 비서였습니다.
처음에는 법률 사무소에서 일했는데 바이올린에 심취한 신들러는 아예 법률사무소를 사직하고 비인 소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취직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베토벤과 인연을 맺지요.
신들러는 베토벤 숭배자를 자처하면서 그의 비서가 되기를 간청했고 결국 1822년 베토벤의 무급 재택비서로 채용됩니다.
이후 그는 1825년까지 비서 역할을 하다가 잠시 비서직을 그만두었으며 1826년에 다시 돌아와 1년 후 베토벤이 사망할 때까지 곁에 있었습니다.
베토벤 사후 신들러는 베토벤의 물건들을 많이 챙겨서 돈을 받고 팔아먹었는데, 특히 베토벤의 필답을 적어놓은 공책을 챙겨서 숨기고 또 일부 대화 내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가필하고 지우는 등 왜곡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1840년 최초로 베토벤 자서전을 출간했으나 조작과 오류가 많았지요.
베토벤이 죽기 몇 주 전, 베토벤의 오랜 친구인 브로이닝과 함께 베토벤을 간호하면서 그는 베토벤의 중요한 문서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신들러의 주장에 따르면, 베토벤은 모든 자료를 그와 브로이닝에게 위임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토벤이 죽고 몇 주 후에 브로이닝마저 사망하자 신들러는 그 자료들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가 있었지요.
1845년에는 베토벤 수집품 대부분을 프로이센 왕에게 팔아 그 대가로 거액의 헌금과 종신연금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는 베토벤과의 친밀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이 베토벤과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누며 깊은 대화를 주고받은 것처럼 내용을 조작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만들어 놓은 영웅이 된 천재의 이미지를 좋아했습니다.
신들러의 이런 행동에 대해, 자신이 그토록 흠모하던 베토벤의 순수한 이미지를 지키고 싶은 좋은 의도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결국 베토벤 삶의 진실에서 멀어져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베토벤이 쏟아놓은 무수한 명언들과 독특한 행동 중에서 어떤 것이 조작인지, 어떤 것이 사실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논란 속에 있는 정보도 많습니다.
이번에는 잘 알려진 베토벤과 괴테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당시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던 작가 베티나가 괴테에게 베토벤을 소개합니다.
1812년 여름, 마침내 베토벤과 괴테의 만남이 성사되었는데 테플리츠와 카를스바트에서 네 차례 만났습니다.
아래는 베토벤과 괴테가 서로에 관해 기록한 이야기들입니다.
첫 만남에서 괴테는 ‘그처럼 집중력 있고 진실성과 열정을 겸비한 음악가는 처음 보았다’라고 했으나 이후의 편지에서 베토벤을 비판합니다.
‘그의 재능은 놀랄 수밖에 없으나 그는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의 소유자이다.
세상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것은 자유이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까지 세상을 즐기지 못하게 해서야 되겠는가’라는 기록을 남겼다.
베토벤 역시 실망한 글을 남겼다.
‘괴테는 궁정의 분위기가 너무 좋은 모양입니다. 시인으로서 품격과 체통에 어울리지 않아요.’
베토벤과 괴테는 이렇게 서로 평행선을 걷는 관계였습니다.
괴테가 베토벤보다 나이가 20살 정도 많았고 출신이나 성향이 너무 달랐기 때문인 것 같네요.
내일 오전에 다시 베토벤 5번 교향곡 3, 4악장과 베토벤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이것으로 오늘 오후 세션을 마치겠습니다.
저녁 세션에는 노래 ‘들리는 소리’를 세계 초연하고, 와인을 마시며 쇼팽의 녹턴을 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