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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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전환을 위하여,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 이남곡

wy 0 2023.10.24

배움()의 의미에 대하여

 

공자가 말한 행복의 원천을 찾아서스북()로 기사보내기트위터()로 기사보내기URL복사()로 기사보내기바로가기기사저장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 而不慍 不亦君子乎

이 문장은 논어를 전혀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아마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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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사상의 정수(精髓)가 이 한 문장 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기쁘고(즐거운()것이 인생의 당연한 모습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시대를 초월하여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불행이나 고통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 아니고,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인생은 행복한 것이 진짜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선언입니다.

 

그리고 기쁨과 행복의 원천을 진리 탐구, 벗과의 진실한 교류, 심층 의식의 진화에서 찾고 있는데, 그 표현 방식이 절묘합니다

 

불역(不亦; 이것 또한)이라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부()와 권력(權力)과 명예(名譽같은 끝없는 욕망의 굴레 속에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공자는 그러한 인간의 현실을 일단 인정하면서, ‘당신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있지만, 이것 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하는 표현으로 슬그머니 자신이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행복관을 끼워 넣는 방식입니다.

 

바꿔치기의 방식도 있습니다

 

논어의 이 첫 문장에 나오는 군자(君子)’만 하더라도 원래는 봉건 군주제와 가부장제라는 신분 계급 사회에서 귀족이나 관료를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신분이 아니라 인격의 성숙을 나타내는 말로 그 내용을 슬그머니 바꿔치기합니다

 

당시의 사회제도로 보아 이것은 혁명적인 바꿔치기입니다.

 

오늘은 공자가 진실한 행복의 원천으로 첫 번째 제시하고 있는 배움()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어쩌면 불안과 고통으로 점철될지도 모르는 인생에서 자유와 행복을 향한 첫 여정을 ()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공자는 열다섯쯤의 나이를 배움()과 만나는 시기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세웠다.

 吾十有五而志于學

 

열다섯이면 지금의 학제로 고등학교 입학 시기쯤 됩니다

 

이른바 좋은 직업(돈 많이 벌고 권력이 있는)을 얻기 위한 경쟁에 올인하는 지금의 교육을 생각하게 됩니다

 

학생들도 힘들지만, 엄청난 사교육 투자가 부모들의 허리를 휘게 합니다

 

그러니 배움이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동안 교육개혁이라는 말은 주로 입시제도의 개혁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어 왔지만, 이제는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고등학교부터는 학생 스스로 자신을 최대로 살릴 수 있는 분야를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전반의 혁명적인 전환이 필요하겠지요

 

그 핵심은 배우는 것이 기쁨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공자는 스승 중의 스승으로 추앙받은 사람이지만, 그 자신은 자신의 정체성을 호학(好學)’에 두었습니다.


열 집이 사는 작은 고을일지라도 충()과 신()에서는 나와 같은 사람이
반드시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섭공이라는 사람이 자로에게 공자의 사람됨을 물었는데, 그가 대답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한 대목이야말로 공자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그대는 왜 말하지 못했는가

 

그 사람됨이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 발분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發憤忘食)즐거워서 근심을 잊어버리며(樂以忘憂늙어 가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라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와 같은 끝없는 탐구의 즐거움은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요?


나는 논어를 60이 훌쩍 넘어서 처음 접한 사람입니다만, 다음의 문장을 읽으면서 그야말로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깊은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無知也).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온다면, [선입견이나 주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텅 비어 있는 데서(空空)출발하여, 그 양 끝을 두들겨 끝까지 밝혀 보겠다(叩其兩端而竭焉).”

 

아는 것이 없다.’ 놀랍게도 이는 지혜의 상징인 공자의 말입니다

 

공자의 배움에 대한 끝없는 열정은 바로 아는 것이 없다는 무지의 자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공자가 말하는 지혜란 곧 무지를 자각하고 있는 상태와 다름이 없습니다

 

공자에게 배움()이란 더 많은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무지를 자각하고 더 배워야 할 것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공자 사상의 핵심을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합니다만, 나는 무지의 자각을 바탕으로 한 탐구 정신이 공자 사상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의예지가 이 바탕에 서지 않으면 특정한 시대와 사회 속에서 형성된 화석화된 관념으로 되어 오히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방해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장면들이 논어 곳곳에 나옵니다.

 

공자와 자로의 다음 대화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대는 육언육폐(六言六蔽)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는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말해 주겠다. 인을 좋아한다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어리석어지고, 지혜를 좋아한다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허황해지고, 신의를 좋아한다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의를 해치게 되고, 정직함을 좋아한다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가혹해지고, 용기를 좋아한다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난폭해지고, 굳세기를 좋아한다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무모해지는 것이다.”

 

무지의 자각은 대단히 과학적입니다

 

요즘은 중학교 정도에서 배우는 기초 과학으로도 쉽게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을 봅니다. 예를 들어 꽃을 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꽃 그 자체입니까

 

자기가 본 것이 꽃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각자의 눈을 통해 자기 망막에 맺힌 상()인 것입니다.

 

망막에 맺힌 상()이 실물에 아무리 가까워 보여도, 그것은 실물 그 자체와는 별개의 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사물과 사건을 인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감각과 자신에게 저장된 정보에 의한 판단이라는 필터를 거친 것입니다.

 

장님의 코끼리 만지기라는 우화(寓話)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해당합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무지의 자각인 것입니다

 

일종의 메타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머리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실제로 삶을 영위하거나 사회적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는 잘되지 않습니다

 

특히 고상한 가치를 실현하려는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나 집단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그 주관적 의지와는 반대로 이런 태도가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참극을 일으킨 원인으로 작용해 온 것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주관에 사로잡히지 말고 사물과 사건에 대하자는 취지로 있는 그대로 보자라거나 보고 싶은 대로 보지 말고 보이는 대로 보자라는 말을 합니다만, 그보다는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더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확증편향에 빠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영역의 사회적 활동에서 갈등과 대립, 적대와 증오를 벗어나기 위한 출발점이 됩니다.

 

우선 나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내 생각이 틀림없다는 완고한 아집 관념에서 벗어나 이웃과 사이좋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껄끄럽지만 만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은 주변에 늘 있습니다. 그 사람과 당장이라도 해보면 어떨까요?

 

인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물질과 제도 면에서 상당한 진보를 이룩했지만, 인류의 행복도(幸福度)는 그다지 높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인류의 존속이 무너지는 위기 앞에 스스로를 노정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는 인간의 관념 계에 내재(內在)하는 부자유와 불행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중심 과제로 되고 있습니다

 

그 시작이 무지의 자각을 바탕으로 한 호학(好學)이라고 생각합니다.

 

뛰어난 과학자일수록 말합니다

 

무지를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출발점이고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가는 인간의 참된 지혜라고 말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알고리즘에 의한 집단적 확증편향에 빠지기 쉬운 것이야말로 과학 기술 시대의 가장 반()과학적인 위험입니다.

 

무지의 자각이야말로 이 위험한 쓰나미를 막는 방파제입니다. (IPKU 기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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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 인문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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