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가을은 조국 사태로 서울이 지역별 내전 상태다.
이 사태는 곧 끝나겠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한국의 대통령 중 잊혀진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그를 물태우라고 불렀다
본인도 알고 있었지만 이런 호칭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와 식사를 하며 이러한 언급을 에둘러 한 필자에게 빙그레 웃을 뿐 별 반응이 없었다.
물태우라는 이름에는 뭔가 약하고 우유부단한 느낌이 있다.
특히 전임자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비교할 때 더욱 그렇다.
그는 역대 대통령 중 존재감이 거의 없다.
진보 진영에서 칭송 받는 노무현대통령이나 욕을 먹는 이승만대통령, 보수 진영에서 칭송 받는 박정희대통령이나 욕을 먹는 김대중대통령에 비해 노태우대통령은 잊혀졌다. (이하 존칭 생략)
한국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들이 현대 정치사의 오랜 시간을 점하고 있다.
통일이 되기까지는 이념 논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그 동안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정확히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가수나 배우의 대중적 인기가 그들의 음악성이나 연기력과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닌 것 처럼, 한 나라의 대통령의 치적과 평가도 간단히 판단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간혹 발표되는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노태우에게 가혹하다.
그에 대한 여론 조사 지지율은 1%도 되지 않는다.
한 때는 박정희가 60% 이상 지지를 얻었고 김대중, 노무현 등은 늘 두 자리 수의 지지를 유지하고 있다.
이 숫자들은 표본 크기나 발표 시기 등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그가 집권한 1988년은 한국 근대 정치 역사상 중요한 변환기였다.
5 16 이후 그를 포함한 3명의 장군 출신 대통령이 30년을
집권한 후, 군사 정권을 끝내고 문민 정부가 이루어 지는 기반이 이 때 다져진 것이다.
여소 야대 정국이었고 민주화 열기가 뜨거워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문민 정부 탄생에는 노태우의 역할이 중심에 있었다.
물론 그는 12 12 쿠데타의
주역이고, 전 전대통령의 후계자라는 한계가 있다.
광주의 비극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퇴임 후 비자금 문제 등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과도기의 대통령으로서 임기 중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다.
YS와 DJ가 서로 싸우는 바람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위태로운 정치적 변환기를 잘 넘겼다.
그런 면에서 물태우라는 이름은 흐르는 물처럼 긍정적인 이미지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 당시 적절한 속도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 문민 정부로 민주적인 권력 이양이 없었다면, 이후에 또 어떤 사태가 발생
했을지는 아무도 장담 할 수 없었다.
그 시대를 같이 호흡한 사람으로서 노태우 정부의 민주화 이행은,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었다는 평가만으로는 부족하다 하겠다.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대통령은 아무리 약해 보여도 가장 막강한
힘이다.
당시 YS, DJ도 노태우대통령과 독대 할 때는 '각하' 라는 깍듯한 호칭을 쓰며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공식적 만남에서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양 김씨가, 독대를 할 때는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하는 것에 대해 노태우 본인도
재미 있어 했다는 후문이다.
민주화 외에 그의 임기 중 주목할 부분은 대외 정책이다.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던 시기는 미-소간의 냉전 체제가
와해되고 있었다.
이러한 때, 한국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한 적절한 외교 및 통일 정책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의 붕괴가 시작 되면서 한국은 공산권으로 분류되었던 여러 나라들과 수교를 하게 되었다.
중국과는 다소 서두른 면이 있었지만 소련은 물론 동유럽의 많은 국가와 국교를 수립했다.
다양한 나라들과 교류가 가능해졌고 점점 국제화, 개방화 되어가는 추세에 발 맞추어 나갔다.
대북 정책도 어떤 면에서는 그 후 김영삼 정부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태우'(泰愚)라는 이름은 한문으로 크게 어리석다는 뜻이다.
적어도 그의 집권 5년간 민주화로의 이행과 대외 정책은 이름 같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따르는
자가 없는 부덕한 사람이며, 소신이 없는 기회주의자’라 비난한다.
이러한 비난이 사실이라 해도, 그는 한국 근대 역사의 변혁기 5년간 어쩌면 대통령으로서 적임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전두환 체제에서 민주화로의 이행에 완충 역할을 하였고,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인 대외 정책은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의 집권 기간 중 이루어진 과감한 인프라 투자는 장기적으로 경제 발전에 기여 했다.
5대 신도시를 필두로 대량의 주택 공급을 시행했다.
인천 국제공항, 경부 고속도로 확장, 서울지하철 5~8호선 등을 비롯한 교통 시설을 착공했다.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복합 화력발전소를 완공시키는 추진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대규모 투자는 많은 문제점과 부작용을 가져왔다.
시멘트를 비롯한 각종 자재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부실공사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섬유를 비롯한 전통적 수출 산업이 위축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집중적인 투자와 과감한 정책 시행으로 대한민국의 경제는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노태우는 비교적 사람을 잘 골라 썼다.
국회가 3김이 지배하는 여소 야대 정국이어서 정부의 행동 반경이 크지는 못했으나 주위에 인재가 많았다.
원만하고 신망이 높은 강영훈총리를 비롯하여 이홍구,노재봉, 김종인, 김학준교수 등 쟁쟁한 학자들이 포진했다.
외교, 경제, 국방, 교육 등에도 적절한 인재를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는 음악적 재능이 많아서 악기를 잘 다루었고, '베사메 무초'를 부를 때는 어느 가수 못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지금 건강이 안 좋다.
말을 하거나 움직이기 힘들어 오래 전부터 국가적인 행사에 모두 불참했다.
얼마 전, 잊혀진 대통령 ‘노태우’의 이름을 오랜 만에 들었다.
그의 아들 노재헌씨가 광주 묘역에 가서 무릎을 꿇고 헌화를 하며 사죄를 하는 사진이 언론에 나왔다.
그의 이런 행동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법원에서 선고한 추징금 2628억 원을 다 갚은 것도 괄목할 만한 일이다.
등소평은 정권을 잡은 후 모택동에 대해 ‘공7,과3’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우리는 이제 이승만, 박정희 찬양은 보수, 노무현, 김대중 찬양은 진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테면 보수가 김대중을 ‘공3, 과7’ 정도라도 평가해주고, 진보가 박정희에 대해 '공7, 과3'의 평가를 해 줄 수는 없는 것인가.
평화적인 남북 통일보다 평화적인 남남 화합이 더 시급하다.
김동길 교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두 번 청와대에서 독대했어요.
처음 점심을 함께 할 때, “'지난 번 대선에서 나는 김영삼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말했더니 웃으면서,
“그러면 어떻습니까” 하였어요.
그 다음에 또 나를 초청한 걸 보면 노태우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노태우 전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서서히 나아지지 않을까...
노재헌씨가 광주 묘지에 헌화하며 쓴 글이 진솔해 보인다.
ps) 맨 위 노태우 캐리커처는 이철원 작품.
이 글을 쓴 지 약 2년 후 2021 10 26, 노태우 전대통령이 오래 투병생활 끝에 별세하셨다.
서거라고 쓰지 않고 보통 사람을 주장하신 그 분의 뜻대로 별세라고 쓰고 싶다.
가족들이 발표한 유언의 내용 중 "자신의 과오를 용서해 달라"는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노태우 전대통령 국가장 영결식 2021 10 30 올릭픽 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