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좌(座), 오른쪽 우(右), 새길 명(銘)의 좌우명(座右銘)이다. 좌우명은 자리의 우측에 새겨둔 말씀을 뜻한다.
교훈이 될 만한 말씀을 자리 가까이에 두고 자신의 인격과 삶을 갈고닦는다는 뜻이다.
좌우명은 중국 후한(後漢) 시대 학자이며 명필인 최원(崔瑗)의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최원의 스승인 채옹은 숭산 석실에 들어가서 30년간 서도(書道)에 매진했는데, 드디어 득도하여 영자(永) 8법을 익혔고 당대 최고의 명필이 되었다.
채옹의 서체가 최원에게 전해졌고 최원의 필법이 제자 장지에서 위부인, 왕희지에게 차례로 전수됐다.
최원의 좌우명은 다음과 같은 글귀로 시작하고 있다.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고(無道人之短), 나의 장점을 자랑하지 말라(無說己之長), 남에게 베푼 것은 기억하지 말고(施人愼勿念), 은혜를 입은 것은 잊어버리지 말라(受施愼勿忘).”
종이가 없던 그 시절에는 돌이나 쇠붙이에 글을 새기고 옆에 두어 보면서 인격 수양의 도구로 사용했다.
요즘에는 종이에 좌우명을 써서 집 안에 붙여 놓기도 하고 수첩에 적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새김은 마음에 있어야 한다. 마음에 교훈의 말씀을 새기는 것을 명심(銘心)이라고 한다.
이 좌우명에 대해서는 춘추전국시대의 제환공(霽桓公)의 술독에 대한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제(霽)나라 왕인 그는 아주 이상한 술독을 옆에 두고 살았다.
술독은 비어 있을 때는 옆으로 기울어졌다가 적당한 양의 술이 채워지면 바로 섰다. 또 아주 가득 차버리면 다시 기울어지는 술독이었다.
공자(孔子)는 이 술독에 대해 제자들에게 “다 배웠다고 교만을 부리는 자는 기필코 화를 당한다. 이 술독과 같이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게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좌우명이라고 생각한다. 애석하게도 한국교회에는 좌우명이 없다.
성장을 부추기고 독려하는 현수막은 교회 안팎에 요란하게 걸려 있으나 시대의 정신적 지주로서 사회에 영향을 주고 성도들의 가슴을 울릴 만한 좌우명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
한국교회는 로버트 슐러의 현란한 언어에 취해 버렸다. ‘선구자, 신기록 수립자, 헌신적인 몽상가, 성화된 기회주의자, 영화로운 도박꾼들’ 같은 언어적 마술에 도취된 한국교회 목회에는 세상의 경영 논리가 판을 치고, 비즈니스 전략이 좌우명을 대신하고 있다.
이러한 경영 논리로 교회가 세상을 품는다고 문을 개방했지만, 오히려 교회는 세상의 문화에 물들어 세속화돼 버린 느낌이다.
세속화된 교회는 경쟁심리 영웅주의 승부욕에 빠져 커지고 많아지고 1등이 되고, 최고가 되겠다는 비전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세상이 머리를 숙일 만한 종교 지도자로서의 감동적인 좌우명을 찾기 어려운 시대이다.
많아지고 커지고 재정이 늘어나는 것이 목회의 목적이고, 이것이 좋은 목회자를 판단하는 기준이고, 이런 목회자만이 교계에서 대접받는 한국교회는 비참하다.
주님을 닮은 신앙 인격과 성직자로서의 숭고한 좌우명을 가진 사람이 존경받는, 진정한 주님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
한국교회가 살길은 더 얻으려는 욕망에서 자유롭게 되어 내려놓는 자족함을 실천하는 것이다.
분에 넘치는 승부욕을 내려놓고, 영웅이 되려는 야심을 내려놓고, 성공 신화의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교회의 본질을 망각했던 망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고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거룩한 좌우명을 마음에 새겨야 할 때이다.
문성모(강남제일교회 목사 / 전 서울 장신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