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다스리던 조선시대는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정치를 했던 때다.
당시 우리나라의 모든 국가적 예식에는 중국 음악이 사용됐다.
연회장에서나 제사를 지낼 때나 중국 음악과 중국 악기가 주인 노릇을 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자신의 권력 기반이 잡힌 후에는 모두 우리의 전통 음악으로 바꾸어버렸다.
세종은 특히 종묘에서 행하는 국가적 제사에 중국 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왜 우리나라의 역대 왕들을 모신 종묘의 제사에 우리의 고유한 음악을 버리고 중국 음악을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미국식 음악 일색인 한국교회 예배음악에 대한 문제 제기로 재해석할 수 있다.
세종 당시 중국 음악은 아악(雅樂)이나 당악(唐樂)이라 불렀고,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은 향악(鄕樂)이라고 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7년(1425년) 임금이 당시 종묘에서 행해지는 국가적인 제사를 마치고 돌아와 이조판서 허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평소에 향악을 익혀왔거늘 종묘의 제사에는 먼저 당악을 연주하고 종헌에 이르러야 향악을 연주하고 있다.
조상들이 평일에 듣던 음악을 제사에 사용하는 것이 어떠한가.”(세종실록 49권)
이런 세종의 의견에 대해 당시 중국 음악 지상주의자였던 박연(朴堧)은 앞장서서 왕에게 반대했다.
우리의 음악은 중국 음악보다 질이 떨어지고 품위가 없어서 국가적 행사에 사용할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박연의 이러한 상소문은 계속되었고, 이를 모은 책이 박연의 호를 딴 ‘난계유고(蘭溪遺稿)’이다.
그러나 세종은 중국 음악을 지상 최고의 음악으로 여기던 박연 등의 신하들을 물리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연이 중국계 아악을 중심으로 한 조회악을 바로잡으려 하나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 음악이 비록 최고(盡善)는 아니라 할지라도 중국(中原)에 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또 중국의 음악이라고 해서 어찌 바르다고 하겠는가.”(세종실록 50권)
세종의 발언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당시 국제 정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중국 음악이 최고라고 우기는 자신의 권력 기반인 사대부들의 주장 속에서도 세종은 “우리 음악은 중국과 비교해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향악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하며 우리 음악에 대한 사랑과 애착을 보였다.
세종대왕의 말씀을 현재 우리의 상황에 맞추어 본다면 ‘중국’이란 말을 ‘서양’이나 ‘미국’이란 말로 바꿔 읽으면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음악에 관한 생각을 지휘자나 찬양 인도자에게 일임한 상태에 있다.
이는 예배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할 때 아주 위험한 상태이다.
예배 중의 음악은 신학의 한 부분이고 목회의 정체성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교회에는 복음성가가 기존의 찬송가를 밀어내게 되었고, 미국 음악이 한국교회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기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목회자의 역량이 양적 성장에 의하여 평가받고 있으며, 목회의 모든 관심사가 양적 성장에 있으므로, 이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신학적 판단 이전에 먼저 합리화되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예배와 음악은 한국적이지 않다.
예배가 조용한 명상이나 쉼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음악은 시끄럽고 요란한 무대 음악적 분위기가 판을 치고 있다.
미국 교회의 판박이가 된 한국교회의 예배와 음악의 모습은 부끄러운 자국 문화 결핍의 상태를 보여준다.
세종대왕의 음악에 관한 정신이 아쉽다.
문성모(강남제일교회 목사 / 전 서울 장신대 총장)